나의 광대스러움에 대하여
묶여 있는 사람.
“너는 모른다. 이 고통을. 지옥이 따로 없다.”
'응, 아빠 나는 모르고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아.'
정신이 없을 때는 잠에 취해 있거나 힘없이 늘어져 있고 정신이 좀 돌아오면 묶여 있는 자신을 풀어달라고 갖은 수로 주변 사람들을 괴롭힌다.
보호대를 어떻게든 풀려고 하고 손목에 꽂혀 있는 주삿바늘을 뽑아버리고 요양 보호사들, 간호사들, 담당 의사에게 고함을 지른다.
핸드폰이 있으면 주로 엄마에게 가끔 나에게 전화를 해서 같은 말을 반복하게 만든다. 엄마와 나에게 협박을 했다가 감정에 호소를 했다가 화를 냈다가 가끔 받아들였다.
올해 초부터 시작된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중환자실을 거쳐 퇴원을 했다가 또 응급실행. 그 주기는 점점 짧아졌고 두 번째인가 세 번째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을 갔을 때 퇴원을 집이 아닌 요양병원으로 했었다. 그때는 엄마도 나도 처음이라 요양병원에 적응을 못하고 집으로 가고 싶어 하는 아빠를 외면할 수가 없어 며칠 만에 집으로 모시고 왔다. 집에 가서 철저히 관리하고 다시는 응급실 가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하기로 철썩같이 약속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또 머지않아 응급실행.
아빠가 응급실에 실려갈 때마다 안 그래도 안쓰러운 엄마는 정말 10년씩 팍팍 늙어갔다. 다시 다른 요양병원행. 이번에는 그 요양병원 시설의 노후화를 이유로 사위와 손녀가 병문안 갔을 때 감정에 호소하여 다시 집으로 퇴원. 결과는 또 응급실행.
이번에는 엄마와 내가 마음을 정말 단단히 먹기로 동맹을 맺었다. 그래서 다시 첫 번째 요양병원으로 퇴원.
“나보고 여기서 죽으란 말이가. 죽더라도 집에 가서 죽겠단 말이다.”
죽어야 끝난다. 내가 편한 사람들과 있을 때 종종 하는 말이다. 어쩜 이 상황에 딱 맞는 하지만 대놓고 입밖에 낼 수 없는 말이다.
이런 감정을 도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존재하는 감정을 표현할 수 없는 아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끼는 상태. 유일하고 무이한 이 감정.
그나마 가장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이 나에게는 엄마이고 엄마에게는 나이지만, 하지만 우리 둘에게 그는 각각 다른 존재이다. 엄마에게는 남편이고 나에게는 아빠.
살아오면서 내가 외동인 것에 대해 큰 불만이나 부족함을 느낀 적이 없었는데 요즘 많이 느낀다. 이럴 때 그가 아빠인 언니나 오빠나 동생이 있다면 조금 덜 힘들까. 하지만 그가 남편인 유일한 엄마를 생각하며 헛된 만약을 지워버린다.
그가 고통에서 벗어나 평안해지기를. 그로 인해 남은 우리에게도 한 치 앞을 모르는 하루하루가 아니라 조금은 홀가분한 날들이 오기를 바라는 것도 조심스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