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바보상자라 불리던 친구는 우리를 위로해 주었다.

"가끔은 아무 생각없이 쉬어도 돼" 라고

by 여지행

바보상자는 사실 우리들의 쉼표 상자였다.

늘 할 일을 미루면 안된다는 일상 속에서

유일하게 쉬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존재였다.


어른들은 텔레비전을 이렇게 말하곤 했다.

“텔레비전은 바보상자야.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약하게 만들고, 자극적인 것만 보여 줘서 우리 뇌가 단순해져.”


물론 그 말은 일리가 있다.

텔레비전은 사고하는 힘을 무디게 하고, 일방적인 자극을 흘려보낸다.

어릴 적부터 우리는 그것이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고 배웠다.


하지만 살아보니,

우리는 생각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과거에 대한 미련 속에서

머릿속은 단 하루도 편히 쉴 틈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바보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바보상자는, 늘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를 조용히 멈춰 세워 주는 친구가 되었다.


내가 불안함에 휘둘리며 존재하지도 않는 상상 속의 고통을 떠올릴 때,

그 상자는 나를 상상 밖으로 데려다 주었다.


내가 슬픔에 지쳐 어떤 생각도 더는 떠올리고 싶지 않을 때, 그 친구는 나를 아무 생각 없이 조용히 웃게 해 주었다.


그럴 때, 나는 바보가 된다.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는 바보.

어떤 결론도 서두르지 않는 바보.

그 순간, 바보상자는 내 곁에 조용히 앉아

나를 감싸 안는다.


그러다 문득, 나는 깨닫게 되었다.


바보상자는

우리를 바보로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때로는 바보가 되어도 괜찮다고

살며시 말해 주는 존재라는 걸.


우리는 너무 많이 고민하고,

너무 치열하게 애쓰고,

너무 오래 견뎌낸다.


가끔은 누군가 이렇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멈춰도 괜찮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저 지금을 흘러가게 두어도 괜찮아.”


그렇게 보면,

텔레비전은 단순한 바보상자가 아니었다.

그건 우리에게 쉼표 하나를 건네는 상자였다.

우리의 지친 마음을

살며시 토닥여 주는 상자였다.


그래서 이제,

나는 그것을 더는 바보상자라 부르지 않는다.

그건 가끔, 내가 바보여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가장 따뜻한 친구였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에펠탑 위에서는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