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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디에도 없는 사람 Oct 24. 2021

돈, 머리, 섹시 중 하나만 고르라면

3부 너를 만나면 불이 나는 듯했다

#밤낮열일하는두얼굴의남자

#에로배우와정치가  


내가 이 나라에서 지내는 기숙사 뒤로는 5분 거리에 강변 공원이 있다. 언제나 물을 끼고 살아야 하는 팔자의 내게는, 최적의 조건이다. 그날은 집에서 10분 거리의 과일 가게에 들렀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횡단보도 맞은편에서, 너를 보았다. 4, 5년 만이었다. 한눈에 알아보았다. 너는 강변에서 조깅을 하다 왔는지 웃통을 벗은 채 신호를 기다리며 뛰고 있었다.


횡단보도 중간에서 만난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너는 근황을 전하며 명함을 하나 내게 건넸다. 자신의 벗은 상반신 사진이 흑백으로 박혀 있었다. 자신이 그토록 선망하던 이웃나라에 건너가 나이트클럽에서 일할 때 명함이라며, 대학원 졸업 후, 다시 그곳으로 워킹홀리데이를 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 명함을 내려다보는 순간, 이 아이 S와 보냈던 몇 년 전의 순간들이 한순간에 환기되었다.


S는, 유럽 지중해 연안 나라에서 온, 입을 열기 전까진 다소 학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클래스메이트였다. 그 학기에 새로 합류한 나와 달리, 이전 학기부터 같은 반에서 올라온 반 아이들은 내게 S에 대해 신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그 이야기들을 듣고 있노라면 대체 이 정보들을 내가 본 이미지와 어떻게 종합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S는 당시 클럽의 쇼맨이었고, 스트리퍼였다. 평소 그의 몸에 눈길을 줘본 적이 없었는데, 알고 보니 그는 벗었을 때 비로소 빛이 나는, 벗어야 매력이 뿜 뿜 나오는 찰진 근육의 소유자였다. 반 아이들이 동영상으로 보여준, S의 쇼맨십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바지도 뜯고, 여자를 무릎에 앉히고 돌리는 등 그의 밤 생활은 화려했다. 그리고 아침이면 누구보다 세상의 진보를 희망하고 정치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뚜렷하게 피력하는, 학구파 학생으로 돌아왔다.


학기 동안, S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거나 가까이 어울리는 사이는 아니었다. 자주 무리에 섞여 같이 놀기는 했지만, 각자 가까운 무리가 따로 있었다. 당시 우리 반은, 수업 후에 매일 다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매일 밥을 같이 먹는 그룹의 난제는, 오늘은 뭐 먹을까. 어디로 갈까 하는 것이다. S는 일 때문에 참석이 들쭉날쭉했다. 하지만 S가 같이 밥을 먹을 시간이 되는 날에는, 그날의 식당이나 메뉴 결정권은 무조건 S에게 있었다. 이유는 S의 예산은 정해져 있었고, 매번 오늘 자신의 점심 예산이 얼마인지 모두 앞에서 공표를 했기 때문이다. 그의 예산은 늘 빠듯했다. 내 기억에 한화 4천 원을 늘 넘지 못했다. S는 그럼에도 전혀 부끄러워하거나 머뭇거리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면, 반 아이들은 그 예산에 맞춰 아이디어를 냈고, 역시 그런 S를 부담스러워하거나 불편해하지도, 이후 모임에서 배제하지도 않았다. 외국에서 돈이 부족하다는 것은, 많은 제약을 가져온다. 심리적으로도, 생활면에서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나는 돈이 없는 게 늘 부끄럽고 불편했는데, 그에 반해 돈에 이토록 자유로운 S가 신기하고 좋았다. 나는 왜 저 아이처럼 할 수 없었을까. 돈이 없는데도 그 아이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그 어떤 반 아이들보다 자유로웠고, 즐거워 보였고, 돈이 없음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게 그 아이를 더 매력적이고 섹시하게 만들었다.


S는 자신의 나라에서도 아주 시골에서 자랐고, 그의 부모는 그에게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줄 수 없었다. 그래서 밤마다 일을 병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억하기로, 지난밤의 업무가 얼마나 과격(?)했든, S는 매일 꼬박꼬박 수업에 나왔고, 한 번도 수업 중 조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언젠가 밥을 먹다 우연히 내 앞자리에 앉았던 S가 말했다. 자기의 꿈은, 이웃 나라(그 당시 S는 그 나라의 언어를 열심히 독학하고 있었다)에 가서 성인영화배우가 되고, 정치가로 성공하는 거라고. 성인영화배우와 정치가. 웬만해선 등가로 놓일 일 없는, 한 인간에게 같이 존재하기 쉽지 않은 이 두 직업군을 그의 입을 통해 듣는 순간. ‘와, 얘 참 섹시하구나. 생각이 참 섹시하네’하고 인상 깊었던 기억이 난다.


이토록 인상적인 클래스메이트, 그리 친하지도 않은 백인 남자아이, 밤에는 찰진 몸으로 스트립쇼를 하고 아침에는 수업에서 똑똑한 머리로 열띤 토론을 하는 두 얼굴의 남자와, 이후에 내가 여행을 가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단 둘이. 역시 그래서 인생은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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