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수십 개 프로필 사진 리스트에는 각종 여행지 사진이 즐비했고, 그 사이에 여전히 내 아이의 동영상과 사진이 그대로 있었다.
아마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저 사진을 지우지 않으리라. 그녀는 트로피가 되지 못할 아들의 이혼을 결코 주변에 알리지 않을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강남 아줌마들 골프 모임의 주된 화젯거리가 될 '누구 집 아들의 이혼' 사실을 그녀 스스로 밝힐일은 없을 것임도. 20년간 가족에게도 숨긴 그녀의 직업처럼, 아들 가족의 이야기도 미제로 남을 것이다.
그녀의 프로필은 굉장히 재미난 구조를 갖고 있다. 우선 메인 사진은 늘 같은, 굉장히 holy 한 성당의 사진이다. 그 뒤에 쌓여있는 수많은 사진들은 간간히 업데이트가 되는데, 일단 사진을 올린 뒤 다시 그 성당 사진으로 바꾸는 수고를 반복한다. TMI로 내게 알려주었던 이 수고의 주된 이유인즉슨, 그 많은 여행사진이나 내 아이의 사진조차 친구들이 '질투'할까 봐 메인 사진에 올리지 않고, 굳이 리스트를 눌러야만 볼 수 있게 뒤로 감춘다는 것이다.
그녀가 유난히 남의 말을 먹고사는 사람임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다 싶다. 다른 것이야 그렇다 쳐도 안부조차 묻지 않는 손주 사진을 그대로 박제해 두는 마음은 대체 무엇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이내 그만두었다. 어차피 저 프로필 앨범 속 내 아이는 결코 자라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사실 그녀가 사진을 지우건 말건, 그 어떤 사진이 업데이트가 되건, 정작 그 친구들은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것을 그녀는 모르고 나는 안다.
원래 남 얘기는 쉽다.
저 집 엄마가 어쨌다더라 그 집 애는 어떻다더라 등, 듣다 보면 때때로 '카더라'가 더해져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구분도 힘든 다른 이의 가정사를 자주 접한다. 특히나 그것이 꽤 자극적인 소재일 경우에는, 심심한 일상에 몸부림치던 사람들이 하이에나처럼 귀를 쫑긋 세우며 달려들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살을 더하고 더한다.
아파트 놀이터만 가도 그늘 아래 자리를 잡은 아주머니 부대의 단골 이야깃거리로 몇 층 몇 호 아저씨의 사생활과 그 부인의 더한 비밀에 대해 들을 수가 있다. 어젯밤 들은 위층 부부싸움의 전말이라던가 방금 재활용 쓰레기를 버린 아주머니의 취미 생활까지, 느긋한 부채질에 남의 집 이야기가 실려온다.
우리 집은 연식이 오래된 아파트이고, 주민들도 아파트만큼 오랫동안 꾹 눌러 산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인지 그 커뮤니티 내에서는 이야기가 꽤 돌고 도는 편인 것 같다. 특별할 것 없이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사는 것 같은데도 이 집 저 집 할 것 없이 매일같이 입에 오르내릴 이야기가 생겨나는 것이 참 신기하다.
가끔 늦은 밤 아파트를 바라보면서 서랍칸처럼 층층이 자리한 네모 박스들에 불이 켜지고 꺼지는 것이 게임 속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각 스테이지의 에피소드처럼, 저 불 켜진 네모들 속에서 각자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나와 아이가 사는, 한 때는 그도 함께 살았던 네모칸에서도 많은 일이 일어났다. 때때로 큰 소리가 났고, 그는 문을 박차고 가출을 했다. 그러니 아마도 몇몇은 저 집 아저씨가 언젠가부터 안 보인다던가, 언젠가 저 집이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는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이것은 근거가 있는 합리적 의심이다. 싸운 것도 사실이고, 자주 마주치던 놀이터 아줌마 부대 중 몇몇의 이상한 눈초리와 정면으로 마주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혼이 진행되는 동안 시골에 머물면서 가끔씩 볼일을 보러 집에 들렀었다. 그 당시에는 아파트 초입에만 와도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고, 아는 얼굴을 마주치면 괜히 주눅이 들어 눈을 피했다. 혹시나 내가 없는 동안 그나 그의 가족이 찾아와 문제가 생기진 않았을지 걱정이 되었고, 괜히 남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것 같은 쓸데없는 피해의식이 들었던 것 같다.
남의 말은 삼일
지금 생각하니 좀 우습다. 까짓것 놀이터 토크에 잠깐 등장하면 좀 어떻고, 이상하게 쳐다보면 그것 또한 어떤가. 뭐 이미 벌어진 일인 데다가 어차피 저들에게는 내 에피소드 다음에 올 새로운 이야기가 매일 생겨나는데 말이다.
남 얘기가 쉬운 만큼 관심도 쉽게 사라진다. 남의 말은 삼일이라지 않는가. 내가 그들의 삶에 관심이 없듯, 그들도 내 이야기를 하염없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면서도 나는 괜히 찔렸던 것 같다.
때로는 이런 불편함이 지인들에게도 느껴졌는데, 가끔씩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문득 말을 걸면 그의 안부를 함께 물을까 으레긴장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내가 먼저 오픈을 했지만, 애매하게 친한 사람들에게는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어차피 언젠가 알게 될 거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메신저로 구구절절 이야기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금에서야 마음이 편해지고 요령이 생겨 잘 대처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매우 곤욕스러웠다.
그러고 보면 누군가에게 소식을 알릴 때 관계의 거리를 고려해야 하는 건 마찬가진 듯하다. 아무리 기쁜 소식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재수 없는 자랑질이 되기도 하고, 혹은 내게 너무나 힘들었던 일이 커피잔 사이로 흩어지는 오후의 수다거리로 전락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이런 적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결국 이런 종류의 것은 관계의 깊이 문제인 것 같다.
깊은 관계에서는 서로를 쉽게 입에 올리지 않는다. '헤아림'이라는 배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제는 내 소문에 스스로도 무관심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는다. 깊이가 없는 관계에서는 그 이야기들 역시 한낱 스쳐가는 단어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 역시 알고 있지 않는가.
아직까지는 그냥 입 꾹 닫고 지나가는 수준이지만, 언젠가 더 내공이 쌓이면 그 어떤 나의 이야기에도 '하하하 그러게요'라면서 능글맞게 대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입방아에 오른다는 것은 어쨌든 기분 나쁜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작년 즈음, 우리 아파트에 내 또래의 사람들이 꽤 들어왔고 나는 이것이 참 반가웠다. 다행스러운 우리 세대의 개인주의로 이들은 서로의 일상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굳이 안부를 묻지 않고, 반대로 내 소식을 전할 필요도 없는 사이. 어떻게 보면 삭막한 각 호수 별 분리된 무관심의 삶이 이럴 때는 편하다.
이제 큰 소리 날 일 없는, 기껏해야 뽀로로 노랫소리와 아이 웃음만 들리는 반짝이는 네모 안에서 동네를 바라본다. 이 늦은 시간에도 반딧불이처럼 듬성듬성 빛을 내는 다른 이들의 집을 바라보다가 오늘의 막을 내리듯 이내 불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