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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영 Aug 21. 2021

마지막으로 산 거라니까

쇼핑 욕구 극복 일지 : 31일 차

동생과 오랜만에 단 둘이 식사를 했다. 시골에서 혼자 일하는 프리랜서인 나에게 도시 소식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물어다 주는 동생과의 시간. 언니 그거 알아?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단해. 4단계라고 해도 못하는 게 없어. 지난주에는 중요한 미팅을 하는데 식당을 오후 3시에 예약했어. 일찍 마시고 6시 전에 끝내겠다는 얘기지. 같은, 이런저런 재미난 바깥 이야기를 듣다가 나도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시답잖은 우리 동네 남의 의 집 사정 얘기를 하다가 문득 생각나 선언하듯 말했다. 

"맞다! 나 이제 옷 안 살 거야. 너 옷 버릴 거면 나한테 버려."

동생은 얼굴의 한쪽면만을 구기면서 상당히 매우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또, 또, 또 이런다며 혀를 찼다.

"진짜야. 나 벌써 한 달이나 됐어. 브런치에 쇼핑 욕구 극복 일지도 쓰고 있어."

그러나 스물네 해를 한집에서 살면서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는 동생은 구겨진 얼굴 한쪽 면을 계속 펴지 않은 채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지금 입은 티셔츠 처음 보는 건데?"

와이씨, 귀신같은. 

맞다, 그렇다, 처음 꺼내 입은 티셔츠였다. 나는 몹시 당황해 살짝 말을 더듬었다.

"아니 어, 맞는데. 이거 딱 마지막으로 산 거고. 그다음에 결심을 했고, 암튼 안 산 지 한 달 됐어."

그제야 동생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거봐, 그러면서 뭘 안 사. 아 됐어. 됐어."

"이게 진짜. 이번엔 진짜라니까. 더 이상 기후 위기를 두고 볼 수 없고 나도 행동하기로 마음먹었어. 그러니까 너 옷 버릴 거 있음 나 줘."

동생은 자기가 버릴 옷이 어디 있냐며, 자기야 말로 몇 년씩 같은 옷을 입는다고 자랑하듯 말했다. 게다가 요즘은 골프에 빠져 골프복을 사느라 다른 건 구입도 안 한다면서 하는 말.

"언니 브런치에 글을 쓰려면 이런 걸 써. 결국 나는 티셔츠를 사고 말았다. 사람들이 그래야 읽어. 결국은 성공하지 못하는 지점에 환호한다고. 매번 결심을 실천하는 건 흥미가 떨어져."

잠시 흔들렸다.

아, 그건가? 다신 사랑하지 않을 테야 하고 매번 사랑에 빠지는 순정만화 여주인공의 서사. 그런 서사가 필요한 건가? 사랑하지 않겠어, 하고 어떤 상대가 와도 꿋꿋하게 외면하는 주인공은 인기가 없는 건가?

사야 하나? 역시... 왜인지 어제 내 눈에 들어온 블랙이 한 방울 정도 들어간 것 같은 바삭거리는 소재의 진한 보랏빛 가벼운 맥시 원피스를 장바구니에 담아야 하나? 그렇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지 못하는 어느 아줌마의 처절한 도전기로 방향을 잡을까? 

잠시 정말 잠시 고민했지만 얼른 정신을 차렸다.


이번엔 진짜 해볼 거야. 벌써 한 달을 성공했다고. 쭉 계속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1년은 해보고, 그 이후로는 정말 필요한 소비를 할 수 있는 그런 정신력을 길러보겠어. 


그래, 그렇다면 한번 해봐.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동생에게 마지막 진짜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했다. 다음에 만나면 꼭 해야지. 


"11월쯤 캐시미어 니트 나한테 버리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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