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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영 Aug 15. 2021

몰의 유혹

쇼핑 욕구 극복 일지 : 25일 차

그곳은 특별한 장소가 아니었다. 약속 시간에 여유가 생기거나 한 시간 간격으로 있는 버스 시간이 애매할 때 그저 쉽게 불쑥 들려서 아무 생각 없이 한 바퀴 쓱 돌아보는 곳이었다. 그러다 간혹 꼭 필요했는데 마침 세일 중인 옷이나 신발을 하나씩 '득템' 해 오는 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장소였다. 

미팅 약속을 붐비는 서울 한복판에서 비교적 주차가 쉬운 롯데월드타워 몰에 있는 카페로 잡을 때만 해도 나는 아주 평온했다. 말했듯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살 수 있는, 언제라도 단박에 고민을 해결해주는 쾌적하고 안전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나는, 나는, 아아 나는 옷을 사지 않기로 그러니까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기로 쇼핑 욕구에서 해방되기로 마음먹은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인간이었다. 나와 같은 인간에게 몰은 더 이상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들어서는 순간부터 느껴지는 소비를 부추기는 달콤한 향기. 오른쪽 뷰티 매장에서 연신 뿜어 내고 있는 향수의 향을 맡자 파블로프의 개라도 된 듯 침 아니 엔도르핀이 마구 돌면서 이거 오늘 일 내겠다 싶었다. 


뷰티 매장을 빠르게 지나 몰의 메인 스트릿으로 빨려 들어가며 생각했다. 나는 옷만 사지 않겠다고 한 건데? 목걸이랑 반지는 사도 되는 거 아닌가? 아니야, 패션잡화는 다 금지인 건가? 그럼 신발은? 아, 그것도 당분간 자제하기로 했지. 아니 그럼 말이야, 어? 자라홈 매장이잖아? 집안 살림은 괜찮은 거지? 그렇지? 야, 말해봐! 말해보라고! 

애꿎은 과거의 어떤 결심을 했던 나를 괴롭히며 홀린 듯 매장으로 들어섰다. 집에 사놓고 쓰지 않는 테이블 보와 비슷한 질감과 컬러의 테이블 보들을 들춰보고, 러그도 한 번 다 쓸어 보고, 쿠션도 만져봤다. 아니야 아니야 이런 것들을 소비하는 건 옳지 않아. 이건 옷을 사지 못하게 하는 것에 대한 보상심리일 뿐이야. 진정해, 여기서 나가. 어서 나가라고... 하고 돌아서는 순간 매장 중간 옷걸이에 아름답게 걸려 있는 상당히 괜찮은 소재의 라운지웨어들을 보게 됐다. 전부 크림빛이 도는 화이트 톤의 의상들이었다. 시원하고 우아하고 잘하면 귀엽게도 보일 수 있는, 스페인 남부 부잣집 사모님이 아침저녁으로 입고 커피 마실 것 같은 디자인의 옷들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아, 저 옷 입고 자고 싶다... 한 번 보기만 할까? 하다가 그런 식으로 사놓은 나의 파자마들을 떠올렸다. 반팔, 긴팔, 칠부, 반바지, 긴바지, 칠부바지, 한겨울용 수면바지, 리넨, 면, 레이온, 폴라폴리스 소재도 다양한 로브들. 수납할 곳이 없어 문에 걸어둔 옷걸이에 차 곡차 곡이라고 표현하지만 주렁주렁 걸려 있는 그 잠옷들. 막상 잘 때는 오천 원 주고 산 다 떨어진 애착 티셔츠에 만 번은 빨아 세상에서 제일 편안한 면 반바지를 입으면서, 뜬금없이 캘리포니아 저택에 사는 할리우드 배우나 히노키 탕에서 막 나온 도쿄 상류층 아줌마를 따라 하려고 산 그 잠옷들. 주렁주렁 걸린 그들의 이미지가 떠오르면서 나는 서둘러 자라홈을 나왔다. 


나와서 빨리 미팅을 하러 갔으면 딱 좋았을 텐데 하필 너무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어디라도 다시 들어가야 했다. 언제 결심이 무너질지 두려웠다. 안전한 곳으로 가자, 안전한 곳. 돌아보니 예전부터 예쁜 쓰레기를 파는 것 같다고 생각했던 플라잉 타이거가 보였다. 그곳이라면 아무것도 사지 않고 나올 자신이 있었다. 그 매장에서 제일 쓸모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알록달록하고 저렴한 페이퍼 냅킨인데, 그건 이미 차고 넘치게 사놓은 터였다. 여기라면 시간도 보내고 구경도 하고 아무 유혹 없이 나올 수 있겠지... 어? 뭐? 세일? 어머 나 처음 봐, 여기 세일하는 거! 그랬다. 그 매장은 정말 세일 중이었다. 30%에서 50%까지. 아무것도 살 게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 세일하니까 분명 살 게 있을 거야. 나는 사, 안돼, 사, 안돼를 반복하다 지금 당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걸 사기로 했다. 강아지 장난감이었다. 물론 집에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게 있지만 하나 정도 더 있으면 좋지 않겠나, 하는 넉넉한 마음이 생겨났다. 매장을 천천히 돌면서 하마터면 페이퍼 냅킨을 고르다 정신을 차리고, 세일 중인 작고 귀엽지만 쓸 데라곤 없는 그냥 예쁜 것들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결국 강아지 장난감이고 뭐고 안 되겠다 싶어서 황급히 매장을 빠져나왔다. 


어서 미팅 장소로 가자! 어서! 미리 카페에 자리 잡고 앉아 차를 마시자!라는 생각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지만 그곳엔 사랑해 마지않는 브랜드들이 줄줄이 있었고. 잘 있는 거야? 더 일마? 이번 시즌에 어떤 특이하고 아름다운 디자인을 내놓았니? 어머, 옆에 코스도 있네? 나 속옷이랑 더 살 게 있는데...라고 외치는 나 자신의 멱살을 잡아끌다시피 하고 약속 장소에 간신히 도착했다. 


어떤 소비도 하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서울에 나간 길에 뭐라도 사야 한다는 이상한 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본마망 타르트 다섯 박스와 사클라 페스토소스(우리 동네에서 안 판다)를 이고 지고 돌아왔다. 아무리 소비를 안 해도 먹고는 살아야지, 라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터무니없는 핑계가 장바구니에 함께 들어 있었다. 


몰의 유혹을 이겨내며 깨달은 것은 환경이 소비에 비치는 영향이 정말 대단하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내가 도시에 살고 있었다면 지금 이렇게 25일 차까지 올 수 있었을까? 아니 애당초 이 프로젝트를 할 엄두를 낼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인구만 명의 헐거운 시골에서는 패션 관련 애플리케이션을 지우고 쇼핑 사이트에 들어가지 않는 것만으로 그럭저럭 견딜 수 있다. 이 얘기는 반대로 산적해 있는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전 지구적 환경이 그러니까 소비 위주로 세팅된 환경이 바뀌지 않고는 불가능한 게 아닌가 싶다. 뭐 그건 내가 지금 당장 어쩌지 못하는 문제이니, 일단 나는 나의 앞가림을 먼저 해야겠다. 오늘로 25일 차, 계속 지켜 나아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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