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가는 사라지는 우리동네
당신의 유치원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25년 중 20년을 알고 지낸 동네 친구가 있다. 다섯 살 때부터 지금까지 둘 다 단지 밖을 벗어나 살아보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이 동네의 토박이인 셈이다. 그런 친구와 옛날이야기를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유치원 때 이야기까지 하게 된다. 즉흥적으로 한 번 가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지금 계신 선생님들께 인사도 하고, 여기 다녔다고 하면서 내부도 좀 구경해보자. 그렇게 정확히 18년 만에 다시 가 본 그 곳은 더 이상 유치원이 아니었다. 입구 앞에 있던 어항은 텅 비어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그곳을 쓰고 있었다.
“유치원은 문 닫았어요. 꽤 됐는데?”
밖에서 보는 외관도, 2층까지 이어진 벽화도 그대로라 둘 다 예상하지 못했다. 몇 해 전까지만해도 원생모집이라는 현수막을 봤는데, 마들 유치원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상계주공1단지
어린 아이에게 자신이 자라는 동네는 세상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쭉 살아온 이 동네는 어릴 때 내 세상의 전부였다. 시간이 지나 익숙해진 거리를 뒤로 하며 내 세상은 우리 동네에서 노원구로, 서울 전체로 커졌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항상 우리 동네가 자리 잡고 있었고, 언제든 다시 와도 이 동네는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큰 착각이었다.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우리 동네가 정말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지나간 것들의 흔적이 다 사라지기 전에 우리 동네의 모습을 기록하기로 했다. 당신의 유치원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창일문구
동네엔 같은 종류의 가게들이 한 가게 건너 하나씩 있었다. 그 중 문방구는 가장 치열한 분야였다. 유치원 상가에 하나, 가 상가에만 한 때는 세 개의 문방구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창일문구는 다른 문방구가 없어지고 나서도 꽤 오랜 시간동안 그 자리를 지킨 문방구였다. 이 작은 문방구는 미술시간 준비물을 잊어먹고 등교하다 아침에 반드시 들리는 곳이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쫀득이나 오징어다리를 사먹는 곳이었다. 주말이면 친구 생일 선물을 고르는 최고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 문방구를 아직도 기억하는 것은 동갑내기 친구 어머니가 했던 문방구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동네엔 유독 내 또래 아이들이 있는 가게들이 많았다. 분식집, 문방구, 꽃집 등등 지금 생각하면 신기할 정도이다.
문화마당
가 상가에 있던 이 작은 대여점은 내 단골 가게였다. 초등학교 때는 한 달 용돈을 이 가게에 다바친 적도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주인아저씨, 아주머니 모두 나를 잘 알았다. 단골답게 때로는 연체료도 면제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만화책보다 더 좋았던 건 주인 아저씨, 아주머니와 주고받는 안부였다. 그래서 그런지 동네의 다른 책방보다 가격이 백 원 정도 비싸도 꾸준히 이용했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잘 찾지 않았고 스무 살 무렵 문화마당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단골가게를 잃어버린 것보다 안부를 주고받던 사람들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것이 더 아쉬웠다. 그렇게 문화마당이 없어지고 동네에 있던 만화책방, 비디오대여점도 모두 사라졌고, 지금은 잘 찾아볼 수 없는 종류의 가게가 되었다.
삼호슈퍼
우리 동네에는 슈퍼도 참 많았다. 동네의 경쟁 상품은 아이스크림이었다. 슈퍼들은 돌아가면서 폭탄 세일을 했고, 난 하루에 아이스크림을 세 개씩 사먹다 배탈이 나곤 했다. 삼호슈퍼는 구멍가게 수준의 작은 슈퍼였다. 어떻게 그 가격으로 아이스크림을 팔았을까 놀랄 정도로 작은 가게였다. 동네에서 가장 큰 마트 옆에서 장사를 해오면서도 작은 슈퍼로는 동네 상가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곳이었다. 슈퍼 옆에는 게임기가 있었는데 동네 남자애들이 다 이리로 몰렸다. 집에 오빠가 없으면 항상 여기서 게임을 하고 있다고 알고 있을 정도였다. 이 게임기 덕분에 슈퍼 옆은 언제나 왁자지껄했다. 사실 슈퍼보다는 그 옆의 게임기가 더 인기였다.
삼호슈퍼는 몇 년 전 편의점으로 바뀌었다.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이십오시 편의점으로. 주인이 바뀌었는지, 이제는 사람이 많이 오는지는 잘 모른다. 가끔씩 삼각 김밥을 사러 간다.
추억 뒤엔 항상 쓸쓸함만 남을까
동네의 모습을 남기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나서 알게 된 건, 가게들은 바뀌었을지 몰라도 그 동네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대로라는 것이었다.
가령, 초등학교에는 예전보다 아이들이 줄었지만, 여전히 점심시간이 되면 아이들이 뛰어나온다. 지금도 날이 좋으면 집 앞 놀이터엔 아이들이 북적댄다. 쓸쓸하기만 할 거라고 생각한 우리 동네는, 지금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에게는 인생 최고로 즐거운 곳이었다.
호롱이 분식
마을에서 가장 새롭게 생긴 축이었던 호롱이 분식은 어느새 이 동네 상가에서 가장 오래된 분식집이 되었다. 호롱이 분식집은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생겼고, 중학교 하굣길에 매일 가는 곳이었다. 다른 분식집에서 찾기 어려운 떡꼬치와 알꼬치를 아직도 팔고 있어서 가끔 떡꼬치가 생각날 때 들른다. 지금도 하교시간만 되면 아이들로 북적대는데, 손에 들린 핸드폰이 스마트 폰으로 바뀐 것 말고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상천 초등학교
이 초등학교는 나와 비슷한 나이라고 했다. 내가 태어날 무렵에 학생을 받기 시작했고, 아이들이 점점 줄어드는 요즘엔 한 학년에 세 반, 한 반에 열여섯 정도의 학생이 있다고 한다. 언제인가 이 학교가 곧 폐교될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가슴이 철렁한 적이 있다. 졸업할 때가 되면 모든 반의 아이들을 알게 될 정도로 작은 학교였기 때문에 그 이야기는 무시할 수 없는 소문이었고, 난 서둘러 학교를 찾아갔다. 학생은 줄었지만, 학교는 여전했다. 방과 후 학습을 하느라 해가 질 무렵까지 불이 꺼지지 않은 교실들, 학교 앞 작은 화단들, 골대 앞이나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도 그대로였다.
놀이터
동네에서 가장 많이 변한 것을 물어본다면 놀이터라고 대답할 것 같다. 어릴 때는 동마다 놀이터가 있었다. 초등학생들이 노는 놀이터가 중심부에 있고, 사이사이로 더 어린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작은 놀이터들이 있었다. 작은 동네 안에 놀이터만 여섯 개가 넘었다. 그리고 그 모든 놀이터에서 놀아봤던 나는 탈출을 기가 막히게 잘하던 애였다. 그래서 길게 하나로 이어져있던 집 앞 놀이터는 내가 가장 좋아하던 곳이었다. 사건 사고가 가장 많았던 곳도 놀이터였다. 소리도 못 낼 정도로 아프게 떨어진 적도 있고, 얼굴이 다 까져서 엄마가 동네 약국으로 들쳐 엎고 간 적도 있다.
그렇게 많았던 놀이터들은 하나 둘 주차장으로 바뀌었다. 105동 아파트 놀이터도 그렇게 사라졌다.
지금은 주차장인 그곳이 예전에 모두 놀이터였다고 하면 못 믿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남은 놀이터들도 시간이 지나며 모두 다시 지어졌다. 그 와중에 철로 지어졌던 놀이터들은 모두 플라스틱 재질로 바뀌었다. 트렌드가 바뀌어버린 놀이터는 더 이상 내가 기억하는 모습은 아니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재미있게 논다. 날이 따뜻해지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논다.
글을 마치며
동네를 돌아다니며 떠올린 옛 추억들은 어디서 솟아나는 건지 샘물처럼 퐁퐁 잘도 나왔다. 어디서 놀았는지, 어디서 머리가 찢어졌는지, 심지어 유치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며 했던 말까지 생각났다. 이런 자잘한 기억들까지 떠올리게 될 줄이야. 노원에서 살다보면 일 년에도 수많은 것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광경을 본다. 내가 기록한 것은 이십 년 정도의 짧은 기간인데, 그새 얼마나 많은 것들이 바뀌었는지 모른다. 마을의 이야기는 사진으로 남아있기도 하지만 내 기억 속에 가장 많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걸 써내려간다는 건 마을의 역사를 써본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 글처럼 각자의 동네 이야기들을 하나 둘 써내려 가보는 건 어떨까.
글 김희란
사진 김희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