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사회복지 VS  문화복지

    지난 10월 서울시의회에서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유경희부위원장 주관으로 서울시와 자치구 문화재단의 협력을 통한 문화재정 확충방안 토론회가 있었다. 어쩌다 서울시 자치구문화재단연합회 회장까지 되어 기초문화재단 입장에서 문화재정 확충방안을 발표하게 되었는데 자료를 준비하면서 알게 된 새로운 사실과 생각을 공유해본다.    

      

 분야별 서울시 예산의 비중을 살펴보니 유의미한 추이가 발견되었다. 

사회복지와 문화관광분야예산이 서울시 전체 예산에 차지하고 있는 비중의 변화이다. 

2006년엔 사회복지분야의 예산이 전체 예산의 14.7%를 차지하고, 문화관광 분야가 전체 분야의 2.7%를 차지했다. 둘 사이의 차이는 12%였다.

그런데 2022년 예산표를 비교해 보니 사회복지 분야 예산은 14조원대로 전체 예산의 36.3%를 차지하고 있다. 반면 문화관광 예산은 7,700억원 수준으로 전체 예산의 2%에 머물고 있다. 16년 만에 사회복지 서비스와 문화관광복지 서비스 예산 차이가 무려 32.3%나 벌어진 것이다.


문화관광 예산의 비중은 16년이 지나도록 오히려 2.7%에서 2%로 줄어들었고 

총액도 1조원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그나마 문화관광 예산 중 관광, 체육진흥 분야 예산 등을 빼면 실제로 문화예술 예산은 3,242억원 정도로 1% 남짓도 되지 않는다.          

부끄럽고 암담하다. 도대체 그동안 문화예술 정책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16년 동안 무엇을 한 것이고 그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다들 예산 철이면 부지런히 움직이곤 하는데 저마다 자기가 속해있는 단체나 해당 기관의 예산만 더 따오려고 애를 썼지 전체 시장이나 생태계의 성장을 위해서 한 일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돌아보게 한다.

관련법만 살펴보아도 사회복지 관련법은 사회복지분야부터 사회복지 사업까지 폭넓고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는 반면, 문화예술 관련법은 취약하다. 직업군 또한 사회복지사는 지위와 함께 사회복지시설의 의무배치 등이 법률로 정해져 있는 반면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그런 내용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K컬처의 약진을 보면 문화예술분야가 존중받고 경쟁력있는 K콘텐츠로서 지원받을 수 있는 체계가 당장에라도 갖춰질 것 같지만 현실을 살펴보면 창작 단계 지원는 여전히 열악하고 오히려 해외 진출 및 콘텐츠 가공 분야 예산은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한편, 정책서비스의 최소기준과 적정기준에 대한 논의도 사회복지분야에서는 90년대 후반부터 일어나 이미 최소기준을 넘어선 사회복지의 적정기준을 확보한 데 비해서 

문화서비스 영역은 최소기준과 적정기준에 대한 논의조차 활발하지 않은 수준이다.

물론 사회복지가 문화복지보다 우선순위이고 절대적인 부분이 있다.  


그러나 영국의 경제학자 리처드 레이어드는 ‘행복에 관한 새로운 과학’이라는 저서에서 국민소득이 2만달러가 넘으면 소득과 행복의 상관관계는 크지 않다고 ‘행복의 함정’을 주장하였다. 실제로 미국의 국민들을 대상으로 행복한지? 를 묻는 질문에 행복하다고 대답했던 비율이 50년대 70%에서 60년대까지는 90% 대로 올라가다가 2000년대에 와서는 60%대로 떨어졌다고 한다.

이에 ‘미국의 역설’이라는 책을 쓴 데이비드 마이어스 교수는 소득이 증가함에도 행복도가 떨어지는 시기의 악화된 사회지표로 이혼율 2배, 10대의 자살률 3배, 폭력범죄가 4배나 늘었다고 제시한다.     

비슷한 관점으로  ‘한국은 왜 불평등한 복지국가가 되었을까?’ 라는 화두를 던지는 ‘이상한 성공’이라는 책에서 윤홍식 저자는 우리나라 경우, 국가를 신뢰하지 못하니 이웃과도 연대하지 못하고 각자도생을 선택했다고 지적한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성공의 덫’이기도 한데 이제 그 ‘성공의 덫’이라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성공의 덫’이라는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것은 곧 상위의 사회복지로 공감 감수성과 소통 감수성, 다양성 감수성 등을 키워주는 문화예술서비스를 제공하는 문화 복지야말로 그 대안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환경운동가이자 해양생물학자였던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봄’이라는 책에서 인간은 천성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나는 질병에만 신경을 쓰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적은 눈에 띄지 않는 슬그머니 나타나는 병이다‘ 라고 했듯이 우리의 복지서비스 또한 눈앞에 명확하게 드러나는 사회복지 서비스를 우선하고 있지만 이제는 눈에 띄지 않지만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로 슬그머니 나타나는 저마다의 고유한 문화가 중요한 시점이다. 

 심지어 나는 10.29 참사를 목격하면서도 안전제도를 넘어서 안전을 예측하고, 안전하지 못한 상황을 걱정하고, 안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안전 감수성을 위한 상상력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안전 감각과 타인 아픔에 대한 감수성을  촉진시키는 문화예술 서비스, 문화복지가 절실함을 실감한다.                          


그러니 문화관련 예산을 키우는 역량이 부족하다면

사회복지 예산 14조 2,287억원(36.3%)중 

저소득 3조 4,700억원, 어르신 3조 4,339억원 , 여성·보육 2조 9,192억원, 장애인 1조 3,144억원이나 되는 사회복지 분야 안에서 문화예술의 역할을 강화하여 사회복지의 문화예술화, 문화예술복지의 사회화를 실천해 볼 일이다. 예술지원예산이나 예술인복지 예산 확충을 위해 노력하는 자기 중심형을 넘어 

예술의 역할과 기능으로 사회와 개인의 성장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 

   

사회복지분야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에겐 이런 선언문이 있다고 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인간 존엄성과 사회정의의 신념을 바탕으로

개인 · 가족 · 집단 · 조직 · 지역사회 전체 사회와 함께 한다.

나는 언제나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저들의 인권과 권익을 지키며,

사회의 불의와 부정을 거부하고,

개인이익보다 공공이익을 앞세운다.

나는 사회복지사 윤리강령을 준수함으로써,

도덕성과 책임성을 갖춘 사회복지사로 헌신한다.

나는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명예를 걸고 이를 엄숙하게 선서합니다.          

왜 문화예술교육사에게는 선언서가 없을까?


예술인 증명을 받은 예술가들에게 예술인 선언이 있는가?

다양한 지원을 받고 있는 예술가들은 어떤 미션과 비전을 가지고 작업을 하고 있을까?

예술가들은 흔히 예술이 도구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예술의 역할이 우리 사회에서 공감 받고 그 효능감을 경험케 하기 위해선 

우리 사회의 다양한 기제로서 작동하는 사례가 데이터로 검증되어야 

문화 복지 예산이 조금이라도 늘어날 수 있다. 바야흐로, 최고의 사회복지가 

문화복지인 시대에 이미 우리는 와있다. 


* 위 글은 월간 춤지 오진이의 문화광장에도 실린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응원'이 필요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