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리 명희 Dec 12. 2022

마리, 연대 강박이야?

연대강박과 마중나가는 마음

     세상이 아름답다. 하지만, 다 그런 건 아니다. 살아있는 동안, 세상이 조금이라도 좋아지기 위해서 바뀌어야 할 부분이 만져진다면, 바꾸고 싶다. 세상은 소중하니까. 그러나 그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같은 생각이 있는 사람과 음으로 양으로 뭉쳐, 세상 살아가는 변화를 만들어 내고 싶다. 그러려면 연대하고 협력하는 기능 탑재가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연대하고, 협력하기는 매순간 어렵다.  한 번 제대로 길이 들면 잘 열리는 지퍼처럼, 좋은 연대와 협력의 사례를 내 안에 체화하는 한 두번의 과정이면 그 후로는 쭉 탁월하게 연대하고 협력하는 사람이 될 줄알았다. 일상에서 사람을 만나고 먼저 손내미는데 인색하지 말자, 할 수 있으면 내가 조금 더 하자한다. 그러나 지금도 연대는 어렵고, 협력은 질린다. 누군가와 무엇을 같이 하는 것은 세상 비효율인 것 같다. 여전히 그렇다. 혼자가 자유롭다. 불안과 외로움이 있지만, 내 의지만으로도 방향을 바꾸고, 스피드를 조절하고 그 결과를 내가 책임지는 것은 예측가능하며, 다른 잡생각을 만들지 않는다. 내가 유별난가. 세상을 더 좋게 바꾸고 싶다는 소셜섹터에서 이렇게 오랜시간 일해도, 이렇게 연대와 협력이 습에 붙지 않으니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맞다. 세상 비효율. 힘들고, 지치다가, 좋을 때가 잠깐 있고, 또 힘들고 지치는 것. 그게 연대와 협력이란 것. 연대와 협력은 좋을 때의 좋음 한 번의 크기와 파장이 엄청 크다. #미투운동 이나 #박근혜퇴진촛불시위 를 보라. 그래서 연대와 협력을 버리지 못하겠다. 하지만 연대와 협력에 드는 에너지 대비 긍적적 성과를 비교해 보면, 나타난 성과(+)와 든 에너지(-)는 간신히 손익분기점 아닐까. 아니, 오히려 마이너스 일지도. 사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얼마나 될까?  만약 한 사람이 쓸 수  있는 에너지가 100이라면 거의 80은 자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가족 또는 가족 같은 몇몇에 다 들지 않을까? 그러고 나면, 친한 친구나 동료, 친척, 이웃등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먼저 에너지를 쓴다. 그 나머지가 연대와 협력에 쓰일 수 있는 에너지 같다. 대략 쓰는 에너지의 크기를 고려해 숫자를 넣고, 백분율로 따져보니 마지막에 쓸 수 있는 에너지는 최대 10%가 안된다.


     솔직하게, 내가 하루 쓰는 시간, 그리고 매일은 아니더라도 주기적으로 하는 활동들을 체크하기 위해 한 달에 쓰는 시간을 적어봤다. 나의 자아성취와 먹고살기 등을 위해 일하는 시간과 생존과 쉼을 위해 드는 시간을 제하고(평일과 주말공휴일 하루에 각 18h,12h), 가족들과 가족같은 친구 몇몇과 함께 공유하는 시간을 쓰고(각 5.5h, 7h), 친한 친구나 지인과 소통하고 소중한 마음을 나누는 에너지를 헤아려봤다(각 0.5h, 3h). 그러고 나서야, 나와 직접 관련이 없는 사회이슈와 존재에 대한 쓸 시간을 생각하게 되었다. 하루 24시간에서 위의 먼저 안배하고 사용하는 시간들을 제했더니, 남은시간은 한달에 20시간 가량이다.


나의 실제 에너지 사용 분포 (1일 24시간 / 월 평일 20일, 주말 등 휴일 10일 기준)


         문득 2년전 쯤 워크보트 처음 시작했을 때, 내가 이런 식의 비율 계산을 한 생각이 났다. 나란 사람의 사고방식이란 한숨이 난다. 아무리 아이낳고 변했네, 인내와 배려가 많아 졌네해도 한결같다. 그 글에서 난 하루에 30분 2.08%을 세상이 더 나아지는데 힘을 보태기 위해 쓸 수 있다고 적었다. 공교롭게도 지금 적은 2.8%와 비슷하다.


연대_2.08%의 진심 by 워크보트 마리 (2021.5.17)

                                   

    지금 생각해도 과연 그것 밖에 안되겠다.  다른 사람들도  정도   있겠다 싶고, 오히려  거보다  적을 수도 있겠다 싶다.  2.8% 쓴다면 한달에 20시간. 나의 , 나의 자아, 나의 욕심을 뒤로 하고, 현재 힘들게 세상을 살고 있는 존재를 위해서 연대와 협력 하는데 쓰는 시간이다. 그것도 생산적인 시간으로 이틀이 넘는 근무시간에 해달하는 시간을 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버겁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내맘같지 않게 연대와 협력에 에너지를 못들인 다고 서운해 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내가 2.8%라고   시간만이라도, 앞으로 세상을  다른 존재를 위해서 세상이 조금더 나아지도록 하는  쓰면 어떨까? 다른 일과 섞어서 후순위가 아닌, 밥벌이 하는 일과 같은 우선순위를 두고 말이다. 그리고 거기서 부터 연대를 꿈꿔야 맞는  같다. 세상에는 불평등해소, 빈곤 지원, 인권 보호, 생태보전, 아니면 사랑이나 공동체  내가 바라는 세상을 바라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있다. 목표는 같지만 방식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사람이 요청하는 방식으로  에너지를 몰아줘 봐도 좋겠다. , 자기 용량을 정해두자.  권고안은 23.33% 넘지 않는 것이다. 30 기준 일주일의 비율인데, 잠자고 밥먹는 시간을 제하게 되면  비율은 작아질 것이다.  자기자신이 자신으로 살아가는  자기가 필요한 용량을 아껴, 다른 존재에 자기 에너지를 퍼내면 내가 고갈 된다. 고갈되면 뭐라도 내가 그동안 세상에 그렇게 퍼냈는데, 누군가  손잡아주겠지 기대가 생기게 되지 않겠는가? 세상 서운하고, 얄미운 마음이 다른 사람에 대한 내용량을 줄인다.


      여기까지 초고를 쓰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왠지 우울했다. 나는 2년 넘게 연대와 협력고민한다고 했으면서, 이렇게 안변했네 싶었다. 책 많이 읽고, 이야기 하면 뭐하나, 액션도 별로 하지 않았으면서, 나 아닌 남에게 쓸 수 있는 용량만 이렇게 쪼잔하게 계산하고 있네.라는 생각이 들어서, 왠지 초라했다. 워크보트 멤버들에게 이 글을 보이기 싫었다. 2년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쓰는 에너지가 0.72%가 상승한 것 그리고, 꼭 대의를 위한 무엇이 아니어도 된다는 생각, 연대의 에너지 사용처에 인색하지 않은 정도이다. 글을 멀리 치워 두었다.


     합평하기로 했던 멤버의 자리가 빵구가 나서, 화면 밖으로 치워둔 글을 다시 꺼내 그냥 읽어내려갔다. “마리, 연대에 강박이 있는거 아냐? 다 되는 만큼만 하는거지, 하기 싫으면 안하고.” 글 합평하는데, 물비늘이 그랬다. 생각해 보니, 과연 그런 것 같다. 소셜섹터에서 일한는 사람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은데 기여하고 싶고, 세상을 바꾸는 것은 혼자로 안되니 뭐라도 같이해야 한다는 강박. 같이 한다고 무조건 뭐가 잘되고, 더 나아지는 것도 아닌데, 세상에 나의 의미를 위해 찾은 논리가 연대와 협력아니었을까? 모든 연대와 협력이 다 세상에 도움이되는 것도 아닌데, 매순간 함께여야 맞다는 게 내 강박이 있었나보다.  알게되어서 정말 다행이다.


      연대와 협력을 위해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그에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생각보다 훨씬 적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부터인 것 같다. 그런데 그거라도 사심없이 모으게 된다면 엄정난 크기의 에너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기에 상당히 효율적으로 효과적으로 쓰면 좋겠다. 매사에 각자 일하듯이만 하면 될 것 같다. 그정도 중요도를 두고, 그 정도 열심히, 성실하게 자기가 정해놓은 시간을 공동의 사회적 목표를 위해 함께 활동하는 에너지로 쓰려는 다짐이면 충분하겠다.






마중나가는 마음


     얼마 전 아이학교에서 마라톤대회 하는 것을 응원하러 간 적이 있다. 독립운동기녑탐 동산 위에서 시작해서, 평지를 걸어 다른 쪽 해변 끝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코스다. 중간지점을 넘어 돌아올때 아래쪽 해변에서 다시 올라와야 하는 코스가 반환점이어서 그때 포기가 많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들은 대단하게도 끝까지 돌아와 독립운동기념탑 언덕을 다시 올라왔다. 결승점에 도착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진짜 대단하다 생각했다. 하나 같이 결승점에 올라와 헉헉 하며 메달을 받고 잔디 밭에 앉았다.  저렇게 힘들게 뛰었으니, 이제 아무것도 못하겠네 싶었다. 아직 못 도착한 아이들도 있었다. 종착점 언덕위에서 보면 다 보였다. 저 멀리 평지를 가로 질러 오는 아이들이 보였고, 느릿느릿 걸어오는 아이들 중  몇명은 낙오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게 뭐 어떤가. 화창한 가을날을 충분히 즐겼으면 되었지 싶었다. 그런데, 늦게 뛰어오는 아이들이 가시거리에 들어오자, 언덕에 앉은 아이들이 응원을 시작했다.


      “조금만 더 뛰어. 거의 다왔어!!”


종착점 언덕가까이 오자, 그렇게 응원하던 아이들과 선생님이 갑자기 일어섰다.


      “우리 마중가자!”

아직 달리고 있는 아이들을 응원하는 신지초등학교 아이들


     그렇게 힘들게 뛰어 올라온 언덕을 다시내려가, 늦게 오는 친구들을 맞았고, 다시 같이 언덕으로 뛰어 올라와 결승점을 넘었다. 그날 마라톤을 뛴 학생 중 결승점에 도달하지 못한 아이는 없었다. 마중간 친구가 힘들게 뛰는 친구의 마지막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나라면 분명 도움이 되었을 거다. '자기 다 뛰었다고... 잘난척인가?' 라는 생각은 안들었을 것 같다. 말로만 '뛰어뛰어'하는 것이 아니라, 힘든 다리를 끌고 아래까지 도로 내려와서 같이 달려줬으니. 자기의 정한 몫을 다하고 난 다음 나를 위해 내려와 준 사람들이니, '나때문에 완주도 못하고...'같은 죄책감 없이 순수하게 고마워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마중간 마음은 무엇이었을 까. 본인도 숨이 턱까지 차 간신히 왔고, 다시는 내려가고 싶지 않은 그 길을 도로 내려가 마중 하는 마음. 아마 알지 않았을까? 저 때가 제일 힘들다는 것. 누군가 옆에서 뛰어 주면 완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 해봤으니까 아는 마음일 수도 있겠다. 그저 헤아리는 마음일 수도 있겠다. 그 마음이 사랑인 것 같다.


      매번 연대는 힘들다. 마치 내 마라톤 간신히 완주하고 났는데, 다른사람 마중가는 길 처럼 힘든 상황에서 한 걸음 더 내딛는 것 같다. 우리는 우리인생을 책임지느라 이미 많은 쓰고 있으므로, 에너지가 남긴했지만 이미 숨은 턱에 찼다. 그러니, 얼마 안되는 에너지를 나누기도 정말 힘들다. 그러나 연대의 손을 내민다면, 그 조금의 에너지가 다른 존재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될 수 있는 지 우리는 이미 아는지도 모르겠다. 그 마지막 구간은 특히 힘든 구간이니까. 나와 내주변을 살피고도 기운이 남아, 다른 존재를 살피는 일은 어렵다. 그러니 쉬어야 하는 사람은 쉬자. 그리고 한 발짝 떼보고 싶은 사람은 일어서 가자. 저 너머 마중나가는 마음으로. 이미 숨이 차 망설여 지지만 따지고 보면 얼마 안되는 에너지로 누군가의 완주를 도울 수도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회복지 VS  문화복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