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제주살이 능력고사 필기시험’ 중심으로
오래전, 외모를 보지 않고 남편을 선택했다. 미녀와 야수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만나는 이들마다 ‘하필이면 왜 그였냐?’는 질문을 종종 받았다. 나는 그때마다 ‘재밌어서, 혹은 웃겨서’ 라는 말을 하곤 했다. 당시엔 과연 그럴까? 의아해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요즘은 시대가 변하여 배우자의 선택기준으로 ‘유머러스한 남자, 혹은 여자’가 등장하곤 한다.
뿐 만 아니라 예전엔 의미를 강조하고 진지한 태도를 미덕으로 삼는 경향이 있었다면 요즘은 의미보다는 재미, 진지함보다는 경쾌함을 선호한다. 사람 뿐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내는 콘텐츠 역시 다르지 않다.
영화도 재밌지 않으면 흥행하기 어렵다. 지난 부산영화제에서 ‘수리남’에 출연한 배우 하정우는 ‘상업영화의 미덕은 재미’라고 강조하며 ‘재미가 없으면 존재 가치 자체가 없다’고 말 할 정도였다. 또 대중매체의 최전선에 있는 광고 메시지 또한 유머코드가 있어야 구전되고 히트 치기 마련이다. 요즘 뜨고 있는 라이브 커머스 방송 또한 예능감 넘치는 진행이 매출과 비례한다고 할 정도이다.
심지어 정책도 그런 세상이 되었다.
정책목표가 전 인류적이고, 전 지구적이고 아무리 고매하다고 한들 정책 이해당사자에게 접근할 때는 어려운 정책 용어나 일방적인 훈육이 아니라 쉽고, 재밌고, 쌍방향적인 교류와 참여 속에서 작동될 때 그 생명을 얻는다.
그 좋은 사례로 지난 11월 수학능력시험 즈음에 앞서 11월11일 제주시에서 치러진 ‘제1회 제주살이 능력고사 필기시험’을 꼽을 수 있다.
제주시소통협력센터가 주최하고 제주에 있는 콘텐츠 디자인 회사인 ‘랄라고고’에서 기획, 주관한 흥미로운 시험이다. 제주에 살러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재이주비율이 다섯 명 중 한 명꼴이라는 보고서 결과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왕이면 제주살이에 대한 꿀팁을 전달하기 위해서 능력고사를 기획하고, 예상문제집까지 펴내게 됐다고 한다.
제주살이 능력고사 예상 문제집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외피를 그대로 따라 국어, 수학, 영어, 한국사, 탐구, 제2외국어 영역처럼 ‘사회·생활·문화’ 영역부터 ‘자연·환경·활동’ 영역, ‘언어’ 영역, ‘산업·경제’ 영역, 그리고 ‘역사·신화·지리’ 영역까지 다섯 분야로 총 150문항을 수록하고 있다.
반면,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출제위원의 엄중함과는 전혀 달리 출제의도를 쓴 출제위원장 페르난도의 설정부터 재미나다.
페르난도는 120년 전 멕시코에서 해류를 타고 파도에 쓸려 제주에 닿은 선인장인데 제주도에 자생하고 있는 선인장의 조상이자 최초의 이주민이라고 설정했다고 한다.
여기서 페르난도는 월령리에서 백년초를 키우며 시간이 나면 서핑도 하고 쓰레기 걱정도 하며 사는 제주도민으로 설명한다.
실제로 문제집을 주문하여 나도 풀어보았다. 그 정보양이 방대했다. 역시나 문제를 내고 해설지를 준비하면서 관련한 구술 채록, 논문, 통계 자료 등등까지 들여다봤다고 하더니 제대로 엮었다. 그럼, 제주살이 능력고사 문제집을 톺아보자
먼저, 제일 큰 특징은 문제에 네 명의 가상 인물이 등장한다.
네 사람은 픽제주의 마음챙김 워크숍에서 만난 사이라고 하는데 20대 여성 두 명과 남성 한 명, 30대 남성 한 명으로 제주 토박이 2인과 이주민 2인으로 구성돼 문제출제 상황 등이 역할놀이를 할 법한 상황으로 몰입감을 높이는데 성공한다.
예를 들면 이런 문제들이다.
1. 제주로 돌아온 수영이는 독립을 위해 집을 알아보고 있었다. 마침 000 직전이라 집을 구하기 쉬웠고 000세일도 많이 해서 가구와 가전제품도 싸게 구입할 수 있었다
000에 들어갈 단어는 ?
1. 구구간 2. 구교환 3. 신구간 4. 신구
답지에 들어간 구교환 과 신구 배우 이름에 빵 터진다. 000의 정답은 신구간이다.
글자 그대로 낡은 것과 새것이 교체되는 기간이다. 제주에서는 1년 동안 지상의 세상사를 관장하던 구관이 임무를 끝내고 옥황상제에게 돌아가 신관과 임무교대를 하는 기간을 신구간이라고 칭하는데 이 기간 동안은 신들이 없는 상태라 무얼 해도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때문에 이사, 집수리 등등을 많이 한다고.
그 기간 중엔 나온 집들도 많고 전기제품 등도 많아서 이사를 하거나 전자제품 등을 구입하기엔 아주 좋은 기간이라는 것이다. 날짜로는 대한 이후 5일부터 입춘 절기 3일 전까지 일주일간이다.
21. 기석이의 왕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보통 3일장을 지내는데 1일차에는 가까운 친인척만 방문하고 2일차에는 외부 손님들이 조문하고 3일차에는 장지로 떠난다. 수영이는 은채와 민우에게 ‘00는 내일이니, 내일 와’ 라고 알려 주었다. 장례식에서 손님을 받는 날을 부르는 말은?
1. 목포 2. 일포 3 여포 4 쥐포
여기선 쥐포에 또 웃음이. 정답은 일포로 제주에서는 장례를 ‘영장’이라고 하는데
보통 1일차에는 성복, 2일차에는 일포, 3일차는 발인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38. 민우는 수영이가 술집에서 소주를 시킬 때마다 독특한 주문에 의아해했다. 많은 제주 사람들이 선호하는 이 주문은 과연 어떤 주문이었을까?
1. 노지꺼줍서 - 냉장고 말고 밖에 보관한 소주 주세요
2. 중탕해 줍서 - 소주를 중탕해서 주세요
3. 하영줍서 - 소주를 일단 대여섯병 주세요
4. 글라스에 줍서 - 소주를 콜라잔에 채워 주세요
여기 정답은 노지꺼줍서. 육지사람들은 차가운 소주를 좋아하지만 제주에는 상온의 소주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다음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역사/신화/지리 관련 문제들이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신화를 알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요즘같이 세계관이 중요한 시기에 신화가 근본이 될 터인데도 대부분의 도시나 타 지역에서 신화를 꺼내는 것에 낯설어하는 반면, 제주는 설문대할망이 만들었다는 신화가 너무나 친숙한 만큼 이물감이 없다.
14. 제주 바람의 신으로 음력2월 초하룻날 제주로 와서 보름동안 제주를 돌아다니며 해산물 씨앗을 뿌리고 가는 신의 이름은?
1.설문대할망 2. 영등할망 3. 울할망 4. 삼승할망
정답은 영등할망이다. 꽃샘추위 바람신인 영등할망은 산구경, 물구경하러 한림읍 귀덕리 복덕개 포구로 들어와 한라산에 올라가서 500장군에게 인사를 하고 어승생, 산천단, 산방굴을 경유해 교래까지 돌면서 꽃구경을 한단다. 동시에 일도 한다. 농경지에는 12곡의 씨앗을, 바다에는 해초의 씨앗을 뿌려준다나!
중요한 건 영등할망에게 구경이 먼저였다. 씨 뿌리는 건 나중.
씨를 뿌리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산구경, 물구경을 그리 즐겁게 할 수 없지 않았을까?어쩌면 의미란 재미에서 출발해 그 재미의 경지가 완성될 때 어느새 자리하지 않나 싶다.
능력고사를 치루는 현장에서 ‘7년차 제주 며느리’가 정답을 불러줄 때마다 온라인 채팅 창에선 탄식이 오갔다고 한다. 점수가 뭐 대수라고?
한편 80점 이상 참가자에게는 모바일 합격증이 전송되었는데 페르난도 시험관리위원장 명의의 붉은색 스탬프가 찍혀있다. 아울러 제주살이 능력고사 실전편은 제주관광공사 주최로 제주 구좌읍 세화리 한주살이도 병행되었는데 여기서 시상된 ‘가베또롱상’(가벼운)을 비롯해 지꺼진상(즐거운), 아꼬운상(귀엽다), 보롬상(바람), 자파시리상(장난) 엄부랑상(엄청난), 돌코롬상(달콤한) 등 제주말의 말맛을 살린 상 기획도 재미나다.
온라인편이나 실전편으로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문제집으로나마 접한 제주는 높은 물가로 매력 떨어진 제주에 대해 다시 가보고 싶은 맘을 들게 만들었다.
내가 일하고 있는 금천구나 살고 있는 고양시나 태어난 서울시나 돌아갈 대전시도 이런 컨셉으로 접근해 보면 그 도시가 훨씬 재미나고 친근하게 다가서지 않을까?
검정 토끼해 23년엔 의미와 재미가 균형 잡힌, 혹은 재미가 의미를 압도하는 콘텐츠를 느릿느릿 만들어보자고 실실 웃어본다.
과학이나 예술이나 모든 동기부여의 첫 시작은 의미나 책임감이 아니라 호기심과 재미를 찾는 일이라는 게 미덥고 다행스럽다.
*조선일보/아무튼 주말/ ‘느그 아부지 뭐 하시노’를 제주 말로 통역하면?(2022.11.19.박근희기자)참조
이로운넷 /제주의 깊은 맛? 랄라고고가 보여줄게! (2022.11.11. 박초롱기자)참조
제주살이 능력고사 예상문제집 / 랄라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