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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守) 그리고 파(破)를 넘어,
리(離)의 세계로

2021년 다짐했건만 여전히 수(守)와 파(破)사이를 오가고 있다. .

                                               

 어느 책에서 봤는지 출처가 떠오르지 않지만 새해를 앞두고 유일하게 기억나면서 오래 머물고 있는 석 자의 어휘가 있다. 그것은 ‘수파리’, 쉬파리가 아니라 ‘수파리’(守破離)이다.
사전을 찾아보니 불교 용어로 검도에서 수련의 단계를 뜻하는 개념으로 쓰이고 있단다. 수(守)는 가르침을 지킨다는 의미로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어 원칙과 기본을 충실하게 익히는 단계를 뜻하고, 파(破)는 원칙과 기본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 틀을 깨고 개성과 능력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해 가는 단계이다. 그리고 마지막 리(離)는 파(破)의 연속선상이지만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고 그 수행이 무의식적이면서도 자연스런 단계로 성장해 질적 비약을 이룬 단계를 이르는 말이다.


 이 석 자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오갔다. 21년 6월 정년퇴임을 한 나로서는 이제 수(守)와 파(破)의 단계를 지나 인생의 리(離)의 시간을 가져야 할 때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내 삶 속에서도 어떤 분야는 수에 여전히 머물러 있고, 또 다른 영역은 파를 시도했다가 멈춤 상태인 것 같기도 해 언감생심, 리의 단계까지는 접근조차 어려운 게 아닌가 싶었다.
사실, 우리 사회를 살펴보면 공동체 안의 약속인 수(守)의 단계마저도 지구의 환경 보호를 위해 사람이라면 지켜야 할 수(守), 코로나19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셀프 방역차원에서 지켜야 할 수칙 등 마땅히 지켜야 함에도 지키지 않는 것들이 허다하다. 그런 와중에 고정관념이나 사회 편견을 깨고 다양성과 공정성을 획득하는 파(破)의 단계는 요원해 보인다. 이런 현실에 원칙과 기본을 뛰어넘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리(離)의 단계는 아득하기만 하지 않은가?
한편,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예술지원사업들이 비대면 상황으로 바뀌면서 사업 결과에 대한 평가 방법마저도 크게 달라졌다. 대부분 사업 내용을 영상으로 담아 제출한다든가, 제출 요건에 맞춰 정리, 보고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평가 기준 또한 면대면일 때와는 다르게 비대면용으로 신속하게 적용하여 바꾸긴 했으나 상황 변화에 따라 급조하다 보니 평가 기준의 적절성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처해진 팬데믹 상황이라면 이왕 어려운 시기에 작업을 한 것만으로 의미가 있는 만큼 지원 계획서 안의 내용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를 따지는 것보다 현장에서 어떤 것이 필요한지 현황과 수요를 조사하고 반영하는 차원의 격려와 응원프로그램으로 진화했으면 좋았으련만 공적 재원의 책임감은 자유롭지 못한 현실이다.

 여기에서 지난해 출간돼 인기를 얻었던 「규칙없음」이란 책을 떠올려 본다.
「규칙없음(No Rule)」이란 책은 1998년 VHS비디오와 DVD온라인 대여업으로 시작해 20년 만에 190개국에서 애용하는 스트리밍 서비스 혁신기업으로 성장한 넷플릭스의 리드 헤이스팅스 CEO와 에린마이어 인시아드 경영대교수가 대담한 책으로 넷플릭스 고유의 기업문화를 담고 있다.
요점은 이렇다. 절차보다는 사람이 중요하고, 역량이 뛰어난 직원을 채용하는 인재 밀도가 높은 환경 속에서 직원의 양심과 자유를 기업이 믿어줄 때 직원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소속된 회사의 이득을 올려주는 행동을 자발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넷플릭스의 문화는 ‘규칙이 없는 것이 규칙’이라는 리드 헤이스팅스 CEO의 말이 얄밉도록 부럽다. 특히 넷플릭스 안에는 ‘선샤이닝’ 과정이 있어서 업무를 하다가 실수를 한 경우 실수를 고백하고 실수를 통해서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시간을 마련한다고 한다. 이런 것이 모여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실패해도 솔직할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되는데 구성원 간의 솔직함을 높이면서 통제를 없애는 기업문화야말로 업무수행능력을 키우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한다. 특히나 ‘피드백 디너’라는 것이 있어서 팀원들이 1년에 한 번 모여 같이 저녁식사를 하면서 한 명씩 순서를 정해 전원이 피드백을 제공하고 개선할 부분을 전달하는 자리를 갖는다.
물론 모든 기업이나 모든 조직, 공공기관 등 어디서나 ‘규칙없음’을 적용하기는 어렵다. 저마다 특성과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적절하게 지켜야 할 규칙과 규범 등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재밀도 높은 네플릭스 직원들처럼 적게는 수십 대 일, 많게는 수백 대 일이라는 높은 경쟁을 거쳐 지원사업에 선정된 예술가들에게는 자유롭게 창작할 기회를 주고 그 결과에 전폭적으로 신뢰를 보내는 ‘평가의 실험’이 시도되어 봄 직하지 않을까?

예술지원사업을 넷플릭스 문화에 대입해보자.
지원사업 평가 또한 절차보다는 예술가의 창작활동이 중요하다. 역량이 뛰어난 예술가가 선정되는 창의인재 밀도가 높은 창작환경 속에서 예술가의 양심과 자유를 지원기관에서 믿어줄 때 예술가들 또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세상에 없던 멋진 작업으로 함께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감동과 공감을 경험케 하고 지원한 지자체의 이미지도 이롭게 만들 수 있다. 이런 전제에 동의한다면 평가 시스템의 변화를 시도해봐야 하지 않을까?
심지어 넷플릭스에는 휴가, 비용, 출장 등과 관련해 지침이 없다고 한다. 직원 본인들마다 알맞은 형식으로 쓰고 기업은 직원을 신뢰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물론 17조 원이 넘는 매출의 기업과 공적 재원으로 마련된 기금지원사업의 용처와 방법이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고 밀레니얼 세대의 가치관 또한 크게 달라지고 있다. 팬데믹으로 전 세계 어디에서나 화상통신으로 소통하고 교류하고 있다. 서로가 경계를 지우고 서로의 필요에 의해 협력하는 것이 대세이다. 상호 신뢰와 환대라는 동기부여가 없이는 창작활동이든 뭐든 작동되기가 어려운 시대이다.
그에 반해 예술지원사업모델과 평가모델은 어떤가? 세상은 파(破)를 넘어 리(離)로 치닫고 있는데 아직도 견고한 예술지원규정을 붙들고 있는 건 아닌지? 언제까지 예술가들의 창의적인 역량을 공공성이라는 명분과 지원사업 행정으로 누르고 있을지? 자문해본다.

더불어 예술현장의 피드백 디너 혹은 피드백 파티를 상상해본다. 매달 혹은 매주? 레지던시 공간이나 지역 내 공공공간에서 장르를 넘나드는 예술가들과 그 작업에 관심있는 다른 영역의 사람들이 모여서 작업과정을 공유하며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는다. 작업을 통해 사업 아이디어의 인사이트를 얻어가는 이도 있고, 작업과정을 출판 기획자가 보다가 책을 엮자고 제안도 하고, 영상 다큐를 자연스레 찍기도 한다. 더러 토론하다가 몸싸움까지 벌어질 정도의 격한 피드백도 환영한다.
장르를 넘어, 남성과 여성을 넘어, 작업과 작업이 만나고, 개념과 개념이 만나고, 아티스트와 아티스트, 아티스트와 행정가, 아티스트와 마케터, 아티스트와 철학자, 사회학자, 운동가, 노동자. 셰프 등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동안 고정관념이 부숴지고 서로 알아가게 되면서 그 만큼 넓어진 관계를 통해 새로운 리(離)의 세계가 열렸다가 닫혔다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다. 부디 2021년엔 (이라고 바랬건만 2023년을 맞이한 오늘 별로 달라진 바가 없다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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