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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시간 VS 시간의 예술


 십 여 년 전부터 최고의 순간을 일컬는 용어가 달라졌다.

맛이든, 풍경이든, 어떤 상황이든 놀라울 정도의 완성도를 지녔다든가

아름답거나 최상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보고 우린  ‘예술’이라는 감탄사를 뱉는다.

그 이후 가수 싸이는 정점을 찍듯이 2010년에  ‘예술이야’라는 노래를 통해

예술과 친하지 않은 대중들에게도 예술이란 무엇인지 쉽게 전달한다. 가사 속의 예술의 정의는 이렇다.

‘너와 나 둘이 정신없이 가는 곳, 정처 없이 가는 곳 , 정해지지 않은 곳 ’은 마치 사뮤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따로 없다.

또 다른 가사인 ‘거기서 우리 서로를 재워주고 서로를 깨워주고 서로를 채워주고’ 는 예술의 영감이나 예술작업의 협업정신에 다름 아니다.

 ‘지금이 우리에게는 꿈이야 너와 나 둘이서 추는 춤이야 기분은 미친 듯이 예술이야‘

노래하며 예술이란 최상의 몰입이고 자기다움이라고 전한다.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조사한 2018 문화향유실태조사 경우 여가활동 순위로 TV또는 비디오 시청이 31%대인데 반해 문화예술 관람율은 14%대로 특히 연극, 무용, 전시, 음악, 국악분야는 10%대를 밑돌고 있다. 일상에서 예술을 즐기지는 못하는 현실이지만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창작 작업을 해나가고 있는 예술인에 대한 존경과 존중에는 암묵적 합의가 이뤄지고 있는듯하다.

그렇다면 우린 왜 예술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현실에선 감탄사로 남는 ‘예술’이란 용어만 난무하고 삶에는 녹아들지 못하고 있는 걸까?

4차 혁명을 운운하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고 AI가 못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영역은 창의성을 상징하는 예술이라며 지금이 ‘예술의 시대’이고 ‘예술의 시간’이라고 강조하지만, 정작 ‘시간의 예술’, ‘시대의 예술’로는  영글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생각으로 어지러울 때 로베르 르빠쥬의 연극 ‘887’ 을 보았다. ‘887’은 기억을 테마로 한 작품으로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도 외우지 못하는 주인공이 50년 전, 어릴 적 시간을 보낸 집의 주소지인 퀘벡시 머레이가 887번지의 ‘887’을 제목으로 차용했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40주년 기념 시의 밤에 ‘스피크 화이트’(Speak white)란 시의 암송을 의뢰받는데 결코 외워지지 않다가 지난 50여 년간 그가 살았던 퀘벡의 근현대사를 자신의 삶에 소환하면서 자기 자신과 싱크로율이 높아지는 경험을 한 후에야 시를 외우고 끝내 멋진 낭송을 하게 된다

     

     

‘스피크 화이트’란 당시 영어와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들이 섞여 살았던 퀘벡에서 부유층, 사회주류층의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을 무시하며 사용했던 단어이다.

캐나다 시인 미쉘 라롱드는 동시대를 상징하는 ‘스피크 화이트’를 제목으로 시를 지었는데 이 시는 키워드로 한 연극 ‘887’ 은 영어를 쓸 줄은 몰랐으나 말을 할 줄 알았던 아버지,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죽음을  비롯한 가족과 이웃들의 이야기와 퀘벡해방전선(FLQ) 같은  당대 일어난 역사적 , 사회적, 정치적 사건 등을 직조하면서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살아야 하며 역사는 개인의 기억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질문한다.  

기억이란 곧 시간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아무 때나 기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순간 순간마다 개개인의 경험으로 내재화가 될 때 비로서야 시간이 되고 기억이 된다.

     

     

말 뿐인  ‘예술의 시대’, ‘예술의 시간’을 넘어서  ‘시간의 예술’, ‘시대의 예술’ 로 영글기 위해서는  어떤 전환이 필요할까?

김영민 교수의 해묵은 컬럼 ‘설거지의 이론과 실천’에서 인용해 본다.

그는 설거지의 네 가지 이론을 설명한다. 첫째는 과정이 중요한 설거지의 존재론, 둘째는 먹은 이라면 누구나 설거지를 해야 한다는 설거지의 윤리학, 세 번째는 설거지가 적폐가 되지 않도록 밀리지 않는 설거지의 문명론, 그리고 나머지 이론은 사람이란 타성, 나쁜 습관, 부질없는 권력에 대한 집착을 만들어내므로 스스로 잘 씻고 깔끔하게 살아가라는 인간학으로 요약한다. 그러나 이론은 이론에 그칠 뿐, 설거지의 미학은 밥풀과 양념이 묻은 그릇을 깨끗이 뽀드득 소리 나게 설거지를 해야 하는 실천에 있다.

     

     

예술 또한 다르지 않다. 한 달에 한 번 문화의 날이 생기고 예술지원은 청년예술지원까지 확산되고 동네마다 지역마다 예술을 통한 지역재생을 강조하고 있지만 실제로

싸이의 노래처럼 ‘서로를 재워주고 서로를 깨워주고 서로를 채워주는지?’ 서로 협력하고 있는지?  ‘정신없이 가는 곳 정처 없이 가는 곳 정해지지 않은 곳’을 향해 가고 있기는 한 지 ? 충분히 고도가 올 것을 믿고 기다려 주고는 있는지 의문이다.

시간의 예술, 시대의 예술이 영글기 위해선 결과만큼이나 과정이 중요하다. 로베르 르빠쥬가 887번지에 위치한 아파트의 생활 단면과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을 불러내어 소소한 일까지 기억해내 ‘스피크 화이트’ 란 시의 시대적 상황이 내재화되면서 시가 저절로 외워지듯이 예술작업이든 예술을 애호하는 생활이든 개개인의 생각과 경험이 온전히 밀착되는 실천적 과정이 있어야 온전히 자기 것이 될 수 있다.

     

     

오래 전에 발표된 독일의 소설가 미하일 엔데의 ‘모모’를 다시 들춰 읽어보는 것은 요긴하다

시간은 진정으로 자신의 시간일 때만 생명을 갖게 된다. 회색무리들의 제안에 동조하여

시간을 아끼고 효율적으로 결과만 내려는 삶은 내 시간의 주인이 이미 내가 아니다.

‘모모’에서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시간으로 무엇을 할지는 스스로가 결정하고 시간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시간을 알기위해 심장을 갖고 있는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심장은 죽은 심장과 다름없다고 말이다  

     

     

     

주 52 근무제와 3만불 시대로 접어들면서 아직 체감되고 있지는 않지만 시간의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다. 늘어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어떤 기억으로 만들어야 할까?

‘예술의 시간’을 누리기 위해 시간을 소설 속 회색 무리같은 거대자본에게, 내가 아닌 남에게 도둑맞지 않는 지혜, 곧, ‘시간의 예술’ 이 이 절실한 요즘이다.

감탄사로 외마디 뱉어지다 소비되는 예술이 아니라 내 몸 곳곳에 각인되는 예술로의 전환을 위해!



* 위 글은 월간 춤 오진이의 문화광장에 실린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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