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박깜박. 주유등에 불이 번쩍인다. 다행히 1km 거리에 주유소가 보인다. 내 차는 왼쪽에 주유구가 있는 차라 주유기를 가운데 두고 오른쪽 맨 앞쪽에 주차를 했다. 내 옆엔 먼저 도착한 빨간 차가 주유 중이었다. 평소대로 유종과 금액을 입력하고 신용카드를 꽂으려던 찰나, 주유소 사장님으로 보이는 분이 다가왔다.
“왜 하필 여기에 주차하셨어요?”
당최 영문을 알 수 없던 나는 대답 대신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 바라봤다. 그는 대단한 이야기라도 전하는 것 마냥 한껏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저 차가 얼만지 알아요? 무려 2억 9천이에요. 박기라도 하면 보험료 엄청 올라가요! 알겠어요? “
이번에도 나는 대답 대신 혹시라도 옆차와 너무 가깝게 주차를 한 것은 아닌지 살펴봤다. 다시 봐도 출고가 2억 9천만 원짜리 빨간 포르셰와 현시점 중고가 1천6백만 원짜리 소렌토가 함께 주유를 하는 상황에 별다른 위험성은 없어 보였다.
때는 2004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나는 몇 주 전 시작된 썸남과 야경을 보러 가기 위해 그의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그 자리에서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프라이드 한대가 멈춰 섰다. (실제로 그 차는 얼마 후 폐차했다.) 창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나를 향해 소리쳤다.
“야, 타!”
차례로 내 눈에 들어온 건 그의 얼굴 그리고 뒷 좌석에 깔려있는 신문지였다.
“저건 왜 깔아 뒀어?”
“아, 얼마 전까지 가족들이 애견 사업을 했는데 저기 개들을 태우고 다니느라 오염됐어.”
이윽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채 생각하기도 전에 다급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 이 핸들 좀 같이 잡아줘. 파워 핸들이 아니라서 이 오르막길을 잘 못 올라가네!”
헐. 뭐지? 썸 타면서 처음 해보는 이 신선한 경험은?
그 뒤로 어떻게 됐냐고? 그 신선한 남자와 나는 8년을 연애했고 결혼했고 여태 잘 살고 있다.
결혼한 후에 그에게 물었다. 그때 창피하지 않았냐고.
그는 대답했다.
“널 아무리 좋아해도 그게 지금의 나인 걸 어떡해. 그 모습이 싫어서 네가 떠난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그때도 너에게 보여줄 나의 미래는 다를 거라는 자신감은 있었어. 그래서 괜찮았어.”
별 생각이 없었는데 집에 와서야 주유소 사장님께 이렇게 말하지 못한 게 후회된다.
“사장님! 내가 누군지 알아요? 낼모레 퍼질 경차를 끌고 와서도 당당한, 내면이 꽉 찬 남자를 알아보고 쟁취한 여자라고요! 그게 무슨 얘기냐고요? 배려랍시고 하신 앞선 오지랖의 번지수가 단단히 잘못됐단 얘기예요. 아시겠어요?”
아, 시원하다. 이제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