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나는 늘 칼끝에 위태하게 서 있는 사람 같았다

대학생활

by 이제 봄

고등학교 때 2년을 달고 살았던 가슴 통증은 20대가 되면서 끝이 났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나에게는 발모벽, 자살사고, 기억력 저하, 사고력 장애, 끝도 없는 우울감, 그런 것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 성정과 의과대학 생활의 깊은 이해 없이

딸의 피부를 치료받기 위해 방문한 병원의 의사가 멋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골프 치러 갔더니 온통 의사더라 라는 논리로

나를 의대에 밀어 넣었다.

논의과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원하던 것을 선택하고 주장하고 밀어붙이는 일련의 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작게는 내 머리칼을 언제 얼마나 자를지부터 크게는 학교의 선택이 그러했다.

원하지 않은 공부를 해야 하는 현실은 생각보다 지독했다.

하지만 그것을 하지 않을 방법을 나는 몰랐다.


나는 끝도 없이 고독했고, 지구라는 행성에 떨어진 이물질 같았다.

어머니는 세상에 쉬운 게 어디 있냐 호강에 초치고 있다는 말로 나를 무색하게 했다.

나는 집에서 입을 닫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격이었다.

나는 망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나를 망가뜨림으로써 보여주고 싶었다.

나를 자랑하지 못하게 만드리라.

어느 날은 어머니의 친구분이 멍하게 앉아있는 나를 보더니

너희 엄마가 뭐가 걱정이겠나 딸이 참 걱정이겠다고 했다고 어머니가 나에게 전했다. 가벼운 표정이었다.



얇고 투명하지만 절대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유리벽에 같여있었던 것 같은 시간들이었다.

뭘 해도 흥미가 없었고 왜 사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죽을 에너지나 용기는 없고

그저 숨은 자동으로 쉬어지니까 해야 할 일들을 했다.

호흡근과 심장근이 불수의근이 아니었다면 미련 없이 작동을 멈출 텐데, 그만 살겠다는 버튼 같은 게 있다면 누르는데 망설임이 있었을까.


집으로 가는 길 고가도로 커브길에서 커브를 돌지 않고 직진하면 어떨까, 지나칠 때마다 상상했지만

내 손은 착실하게 커브를 따라 차를 운전했다.

그러니 이것은 죽은 상태도 살아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그렇게 혹시 죽어지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밥벌이는 해야겠으므로 학교도 다니고 시험도 봤다.

그 정신이니 당연히 학업 성취도는 낮았고 그 자체가 또 내 정신을 갉아먹었다.

하루 종일 여기가 아니라면 더 괜찮게 살았을까 의미도 없는 가정을 했고 끝없는 공상으로 현실에서 도피했다.

자극적인 드라마도 줄거리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고 좋아하던 책도 읽어지지 않았다.

화면과 글자들이 머리에서 통합되어 이해되고, 그것이 재미로 이어지는 단계 단계가 모두 손상된 거 같았다.

나는 그저 부유하는 먼지 같았다.


불안할 때마다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턱의 흉터에서 자라기 시작한 털이 거슬렸다. 그래서 그것을 만지작 거리다 뽑았다.

깨끗해지니 괜찮게 느껴졌다.

그러다 어쩐지 이마를 만지기 시작했다. 이마에 머리카락이 만져졌고 만지다가 뽑았다. 제대로 뽑히지 않고 잘린 머리카락이 뾰족하게 솟아 나왔다, 그것이 또 걸리적거렸다. 뽑아 없애야 할 것 같았다. 뽑았는데 그 짧은 머리카락만 뽑기 어려워서 옆의 긴 머리카락이 같이 뽑혔다. 그 긴 머리카락이 잘려 짧게 솟아올랐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뽑고... 반복하다 보니 머리에 구멍이 생겼다.

나는 어느 순간 강박적으로 머리를 뽑고 있었다. 그리고 구멍이 났다. 구멍이 나자 그것이 부끄러웠다. 옆의 긴 머리로 보이지 않게 감췄다. 그 구멍은 날로 커졌다.

어느 날 학교에서 발모벽이라는 진단명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알게 된다고 해서 멈춰지지는 않았다. 시험 준비를 하게 되면 구멍은 커졌다가 방학이 되어 시험을 보지 않으면 그 구멍은 메워졌다.

머리를 뜯는 나는 다른 사람 같았다. 통제할 수 없었다.


어떻게 졸업을 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뭘 외우고 있는지 모르지만 외웠고

의대에서 배우는 방대한 분량의 지식들을 쑤셔 넣는데

글자들이 모두 이마에 반사되어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시험날짜가 다가오면 나는 반사되는 글자들마저도 읽을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었고 그 박동수가 머릿속에서 세어졌다. 끝도 없이 불안했고 학교 강의실 벽에 나붙은 내 점수에 내 자존심은 다시 한번 무너졌다.

친구들에게 말하면 나도 어려워 나도 불안해 다 그래. 했다.

내 언어를 알아듣는 사람은 내 곁에 아무도 없었다.

사실 나도 내 상태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만 나는 늘 칼끝에 위태하게 서 있는 사람 같았다.

떨어지기에는 위험한 낭떠러지라 두려웠고 그대로 서있기엔 칼끝이 아팠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 칼이 없어 보였다.



나는 탈출을 해야 했다.

어쨌든 숨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있는다고 해서 거두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숨을 멈출 버튼이 현실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어디서 뛰어내릴 만큼 적극적으로 죽음을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사실 이생을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은 것은 아닌가

누군가 나를 죽여줄 수 없다면 그리고 죽을 수 없다면 적어도 이 집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탈출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쨌든 졸업을 했다.

죽지 못한다면 이 집에서 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죽지 못하고 졸업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