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 생활
어쨌든 나는 인턴 수련을 하러 병원에 들어갔다.
별 대안이 없어서 들어간 병원이었다.
집에서 나오고 싶었고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고
나는 의사면허증이 있었고
오라는 병원이 있었다.
일단 면허증을 따고 생각해 보자는 결심이
일단 수련을 받으면서 생각해 보자로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것은 없었다.
절대적인 수면이 부족한 시간이 이어졌고
딱히 의사라는 직업에 뜻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그 생활은 의미 없는 고행일 뿐이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의사라는 직업이 썩 하고 싶은 일이 아니긴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정말이지 정말로 싫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애초에 내가 원하던 길도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어머니를 위한 길 같아서였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아버지만 아니었으면, 어머니 아버지가 나에게 지지적이었으면 나는 이런 하고 싶지도 않은 고생길은 택하지 않았으리라, 원망했다.
나는 어머니가 바라는 흰 가운에 대한 로망 때문에 인생을 병원 바닥에 버리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놈의 멋있어 보이고 싶은 욕망이나, 골프장 같은 것은
나한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동시에 나 자신도 원망했다.
나는 왜 원하지도 않으면서 적극적으로 그것을 거부하지 못했는가.
나는 왜 기왕 하기로 한 일을 집중하지도 그만두지도 못하는가.
어머니 아버지를 원망할 정신으로 지금에서라도 다른 길을 찾으면 될 일을
왜 그런 결단력도 없는가.
나 자신이 바보 천치 같았다.
그리고 힘들지만 마음을 다해 열심히 일을 배워나가는 동료 친구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의과대학은 폐쇄적이었고 병원은 더욱더 폐쇄적이었다. 그래서 그럭저럭 평범한 과에 들어가서 자유를 누리면서 많은 경험을 하고 있어 보이는 다른 친구들도 부러웠다. 그리고 그 친구들은 다채로운 경험 뒤에 이름 있는 회사에서 일하며 더 멋있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나를 부러워했고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그러고 보면 나는 나를 제외한 나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을 부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남의 인생을 살듯이 그저 숨만 쉬었다.
한때는 밝고 총명한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그런 나는 이제 모르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사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내가 진짜 나인지도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호기심이 많았고 배움에 빨랐고 집중력이 대단했고 사교성이 좋은 밝은 아이였던 것 같은데
정말로 나뭇잎이 그저 굴러가기만 해도 까르르 웃었던
하늘 위에 떠가는 구름을 보면서도 어쩜 물방울이 모인 것이 저리 푹신해 보일까 신기해하던
감성이 충만한 아이였는데
책을 읽으며 상상하고 떠오르는 생각을 글로 쓰며 마음을 다듬을 줄 알았고
음악을 들으며 저릿할 줄도 알던 그런 나는
이제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어머니는 네가 하고 있는 일이 남들은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일이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그 말은 언뜻 나의 능력을 추켜 세우는 말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말을 따라 사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더 솔직해지자면, 나도 의사라는 전문직을 버릴 만큼 뭘 하고 싶은지 알지 못했다. 하고 싶은 것이 아주 없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것이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인지 자신이 없었고 그것을 실패했을 때, 어머니, 아버지의 핀잔과 한탄, 책망을 견뎌낼 자신 또한 없었다. 더 나아가 나 자신도 의사라도 할걸 그랬나라는 사회적 지위에 대한 후회에 자유로울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삶을 사는 것이란 결국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알아가고 표현하는 것 그것이 다가 아닐까 싶다. 그 안에서 발견한 나를 관계에 쓰면서, 자기 효능감과 친밀감을 느끼는 것이 다 아니던가. 그런 것들을 가르쳐 주는 어른이 나에게는 없었다.
사실 제대로 보자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지지받아본 기억이 없다.
애초에 좋아하는 것을 탐색할 기회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어렵게 찾아냈다 해도 어머니는 그것을 지지해주지 않았고 아버지는 무심했다.
그것은 꼭 중차대한 일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습관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짜장면을 한 그릇이냐 반그릇이냐를 선택하고 말할 기회.
막대사탕이냐 알사탕이냐 를 고를 기회.
머리카락을 언제, 어느 길이만큼 자를 것이냐 결정할 기회.
그런 사소한 기회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인정받는 경험들이 나는 전무했다.
내 두뇌의 기능을 발휘할 에너지는 원망, 후회, 나에 대한 자괴감, 타인에 대한 부러움, 자기 소외 같은 주제로 죄다 쏟아 흘려보내느라 별로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한마디로 심각한 누수 상태였다. 나는 매일 그만두는 상상을 하며 하루하루를 견뎌내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견디지 않고는 살 수 있는 방법을 모르게 되었다.
글자가 머리에서 튕겨져 나오므로, 공부가 아니라 일을 하면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느낌이 좀 없어지려나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어떤 기능을 수행할 때 순간순간 이가 빠졌다 돌아왔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별로 남지 않는 에너지를 최대한 쥐어 짜냈다. 오히려 공부는 틀려도 내 점수만 내려가지만 병원 일을 실수하면 타인에게 해가 될 것이었다. 그것은 학생 때 재시험을 걸리냐 유급을 하느냐 하는 문제보다 더 심각했다. 학생 때 느꼈던 스트레스는 이제 우스워졌다.
나는 여러 번 친구와 동료들에게 고통을 호소했다.
다 힘들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것 또한 맞는 말이었다. 여태 견뎠던 시간이 아깝지 않냐고들 했다. 다 지나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한김에 같이 이 과정을 마쳐보자고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힘듦과 내가 말하는 힘듦은 밀도와 차원이 아예 다른 수준의 말이었다.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들처럼 나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수면권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자존심은 접어가며 일하고 있었다.
나를 잘 아는 친한 친구는 그렇게 고통스럽다면 그만두는 것도 맞을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어 보였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냥 다녀도 어려운 의대를, 인턴 수련을,
그렇게 바닥으로 에너지를 다 쏟아내 버리면서 버텼다.
기어이 나는
매일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되는 기분이 되는 이 생활을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고
1년이 지나 마치고 나서야
그만둘 수 있었다.
그만뒀다기보다는
마쳐졌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동료들은 치열하게 경쟁하고 고민하여 과를 고르고
지원하고 고군분투하여 합격하는
인생의 도전을 하고 있을 때,
나는 그저 마쳐지기만을 바랐고
드디어 1년 과정이 끝났을 때
전공의 지원을 하지 않은 선택을 했다.
과감한 결정이라기보다는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병원에서 나오자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우울 #부모 #퇴사 #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