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거품처럼 툭 하고 사라졌으면

방황, 도피. 그 후.

by 이제 봄

집에 돌아왔다.

극강의 스트레스 무대였던 병원에서 내려오니

일단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집에 돌아온 나는

며칠 동안 잠만 잤다.


한숨을 돌린 후

적당한 곳에 취업을 했다.

내 영혼을 담보로 취득한 자격증은

그래도 상당히 쓸모가 있었다.

큰 스트레스 없이 반복작업이 다인 검진 센터에

단기계약을 맺었다.

앞으로 어떤 계획이나 목표의식이 있었다기보다는

아침마다 나갈 어떤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때때로

그냥 이대로 늙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런 보람도 의미도 없었지만 굶지 않을 정도의 돈은 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검진센터는 언제 닫을지 모르는 곳이었고 대체인은 얼마든지 많았기 때문에

오래 할 일은 아니었다.


의사 일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아예 의사와 상관없는 일을 하자니 막막하기도 했지만

그런 일이 굳이 나를 선택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그렇기에 의사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으면서 환자를 보지 않은 일을 찾아봐야 했는데

사법고시를 또 패스하여 의학전문 변호사가 된다면 모를까

이미 의대를 졸업한 상태에서 병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경제활동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제한된 일로 보였다.

그렇다고 병원으로 돌아가는 일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퇴직 후 어머니가 쏟아내는 폭언에 노예가 된 아버지와

하늘 끝까지 기세등등해진 어머니가

나와 같은 집에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가끔 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오셔서

슬그머니 침대에 앉아

책상에 앉아있는 나를 바라보고 말을 걸었다.

흡사 대화를 구걸하는 듯해 보였다.

불편했다.

한때는 가까웠던 오래된 지인이

옛 기억을 잊지 못하고 나에게 연락을 취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불편한 내 마음에 죄책감이 느껴졌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눈길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무심한 대답으로 밀어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퇴직하자 이때다 싶은듯

집에 들어앉아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쓸데없는 남자라며

아버지를 타박했다.

그것은 내가 어렸을 적

집에 있으면서 다림질 하나 안 해놨냐고 어머니를 타박했던

아버지의 모습과 언뜻 닮은 것 같기도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어릴 때 어머니는 성난 황소가 씩씩거리며 복수의 이를 가는 것 같았고

이때의 아버지는 물에 젖은 신문지가 일어날 힘도 없이 바닥에 붙어, 버려질 때를 기다리는 것 같았단 것이었다.

이런 반복 되는 가해와 피해를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본능적으로 나는 다시 탈출을 꿈꿨다.

나에게는 여태 쓸시간이 없어 모여졌던 돈이 있었다.

3개월짜리 캐나다 어학연수 코스를 등록했다.

영어를 잘해보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이곳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고 싶었고 살기 위해서는 소속이 필요했고

어학연수라는 명목이 그럴싸했기 때문이었다.

계획 따위는 없었다.

다만 떠나고 싶었다.


나는 그곳에서 각국에서 날아온 방황하는 영혼들을 만났다.

어학연수 학원은 각자의 나라에서 자리 잡지 못하고 떠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했다.

그들은 제2의 인생을 꿈꿨고, 의사라는 정체성을 안 그들은 나를 그저 즐기러 온 사람으로 대했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내 현실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눈이 선하고 구레나룻이 멋졌던 스페인 친구와 낮술을 마시러 수업을 빼먹기도 했고

터키 남자의 능청스러운 수작을 받아보기도 했다.

배려심은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느껴진다는 것을,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살아있다면 이런 모습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일본 언니도 만났다.

햇살이 좋은 날 카페에서 햇볕을 쪼이며 음악도 들어보기도 했으며

홈스테이 하는 가족들과 먹을 것을 싸들고 피크닉을 가보기도 했다.

어떤 날은 집 앞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푸드덕 거리며 날아오르는 새를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다.

나는 진지하게 그저 캐나다에 눌러앉을까도 고민했다.


한국에서의 나를 잊을 수 있다면

그래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이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머니에게, 그저 여기 계속 지낼까 했더니

그래라 뭐 하러 한국 들어오냐 거기서 살 수 있으면 살아라.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것은 지지인지 방관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나자

잊었던 한국에서의 나는 어디 가지 않고

그대로 복사되어 캐나다에서의 내가 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 마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은

지구 어디에도 없었다.

떠나서 발을 디딘 여기가 다시 한국의 일상처럼 되었고

떠나와 선 그 자리에서 또 떠나고 싶어졌다.

그래서 미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곳에서

이 여행이 내 인생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든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는

먼지 같이 떠다니기만 하는

캐나다든 미국이든 한국이든

여행지가 나를 도피하는 의미 외에는 특별한 감흥이 없다면

배경화면을 한국으로 바꾸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히려 한국에 가면 모국어를 쓸 수 있고 김치찌개를 아무 때나 먹을 수도 있었다.

내 영혼을 팔아 얻은 것이긴 했지만 어쨌든 의사 자격증도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끝으로 나는 돌아가기로 했다.

어딜 가서든 내가 복사된다면 배경화면을 바꾼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니었다.

어딜 가든 나는 그대로일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잠시 도피했다가

다시 내가 있었던 척박한 곳으로 돌아왔다.

어떤 작심을 한 것은 아니었다.

떠다니던 내 마음이 잠시 캐나다로 미국으로 흘러갔다가

그나마 한국에서 흘러내리는 게 낫겠다싶어

방향으로 틀어서

다시 한국으로 흘러내린 것뿐이었다.


돌아와 보니

어머니의 패악질은 더 심해져 있었고

아버지는 눈에 띄게 시들어가고 있었다.


혹시 모르니 전공의 시험을 보기로 했다.

동생이 결혼준비 하느라 비워놓고 주인을 찾고 있었던

동생이 결혼전 잠시 살았던 신림동 어느 원룸에서

혼자서 두부와 김치로 끼니를 때우며 시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편이 집에서 매일 따뜻한 밥을 먹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그렇지만 공부를 시작하니 다시 머리를 뜯기 시작했다.

시험은 합격이었다.

합격 통지서를 받은 날 내 머리에는

여전히 큰 구멍이 여러개 뚫려 있었다.


합격은 했지만 어떤 병원에서도 나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그저 다시 1년을 어떻게 흘러 다닐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친구가 일하던 병원에서 나를 환영한다고 들어오라고 했다.

한참을 망설였지만

그렇게 또 전공의 수련을 받기로 했다.

문이 열리니 이리로 흘러가야 하나보다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다.



여전히

누르면 나 자신이 사라지는 버튼 같은 것이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중학교 적 어느 날에 썼던 일기에서 처럼

늘 거품처럼 툭 하고 소리도 없이 사라지고 싶었고.

그렇게 나는 서른이 훌쩍 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