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치 치료의 시작
여전히 나는 가까운 이들과 갈등이 생기거나 해결하기 힘들게 느껴지는 일을 마주하게 되면
그저 끝내고 싶다는 기분에 사로 잡히곤 했다.
문 선생님과의 치료 이전과 이후가 다른 점이 있다면
전에는
그런 기분이 내 존재와 구별되지 않아
끝도 없이 안으로 가라앉았다면
지금은
그것을 하나의 증상으로 인식하고 곧장 약을 먹는다는 점에 있었다.
2년여의 선생님과의 치료를 진행하던 중에
어느 날 선생님께서 약을 처방해 주셨다.
그 약은 한마디로 신세계였다
아니 세상에, 약으로 이런 기분이 가능하다니 너무나도 신기했다.
왜 이제야 주시나 원망까지 들 정도였다.
직접 여쭈어보지는 않았지만 그간의 상담 내용을 미루어 짐작해 보건데
선생님은 약에 무작정 기대면 진짜 나를 대면할 기회를 놓친다고 생각하시는것 같았다.
모든 자극이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막이 내렸으면 하는
내 숨을 닫는 버튼이 있었으면 하는
그런 강렬하지도 희미하지도 않은
무력하고 축축하고 눅눅한 정신세계에
따스한 햇볕이 쪼여지는 기분이었다.
이런들 저런들 어떤가 오늘은 오늘의 태양이 뜨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또 뜨지 않겠어
여유가 넘치고 힘이 생겼다.
내가 이걸 학생 때 알았으면 시험 볼 때 얼마나 편했을지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그 후로 한참을 그 약을 복용했고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한 1년인가 지났을 때 약을 잊어버려서 안먹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상태가 되자 자연스럽게 중단할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든 그 증상은 내 정신에서 비어져 나올 준비를 하며 고여있는 듯했다.
어떤 스트레스적인 상황이 되면 금새 나는 처연해지며 이 인생이 막이 내렸으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고혈압이나 당뇨처럼 증상으로 여기고 약으로 평생 조절하며 지내야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 나에 대해서 내가 모르는 것이 많았다.
그리고 현재 올라오는 알 수 없는 공황장애 비슷한 증상은
복용했던 약으로 조절되지도 않을 뿐더러
어쩐지 내 안의 진짜 내가
제발 나를 봐달라고, 그래서 고쳐달라고,
내지르는 비명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등장한, 그렇지만 문선생님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어머니의 본질적인 문제.
나를 그리워 했지만 표현할수 없었던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내가 어머니를 지켜내기 위한 애닯픈 노력이었다는것을 알고 나서는
아직도 가야 할길이 많이 남았음을 깨달았다.
몰랐으면 모를까.
문을 한번 연 다음에 그저 닫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고름이 차있는 종기를 우연히 터뜨리고는
짜내지 않고 그대로 밴드만 붙여 덮는 일 같이 여겨졌다.
선생님은 내 의지를 읽으셨는지
카우치를 쓰는 치료를 해보자고 제안하셨다.
누우면 앞에 치료자의 표정이나 제스쳐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혼자서 떠올릴 때와 비슷하게, 더 깊은곳을 건드리게 될것이라고 하셨다.
카우치에 누워서 치료 받는것은 어떤 걸까, 궁금했다.
문선생님 때에는 면담치료로 모두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너무 두려웠다.
내 안에는 너무 많은, 소화되지 않은 상처들이, 압축되어있을 것으로 쉽게 예측 할 수 있었고
의식화 되지 않았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너무 참혹해서 소화하기 힘들다거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더이상 아프고 싶지 않았고
이제는 이전보다 지켜야할 소중한 것이 이전보다 많아졌다.
그것은 나를 변함없이 지켜주고 있는 남편과 귀여운 아이들이었다.
내안에 상처가 응집되어 있을때
나도 모르게 내고 있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입히는 상처들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이해해준다고 해서
내가 낸 상처가 없던 것이 되는 것도 아니었고
상처는 세대를 넘어가며 알수 없는 방향으로 왜곡되고 복잡해지는 현상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 대물림을 내가 끊고 싶었다.
그것은 어떤 사명감이기도 했다.
적어도 내 아이는 나로인해 나같은 삶을 살게 해서는 안되었다.
미래의 존재하게 될지 모를 내아이의 아이도
내아이에게 어떤 보이지 않은 것을 그대로 물여받을 터였다.
이것은 좋은 집을 물려주거나 비싼 학원을 보내기 전에
억만금을 주어서라도 막고 싶은 일이었다.
이제 괜찮은 척 가라앉아
나를 가리고 있는 먼지들을
꼬챙이로 쑤셔 흩트려 봐야 할 때였다.
나는 준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