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어머니를 바로 보는 대신 내 마음을 팔아넘겼다.

이해를 바라는 그 노곤한 그리움에 대하여

by 이제 봄

어머니에게 이해받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


아이는 저녁을 먹고 누워있으면 으레 엄마를 찾았다.

"엄마, 같이 놀자, 피곤해하지 말라고! 일어나!" 하면서.

그 목소리는 당연하고 당당하다.

아이는 마치 엄마에게, 놀 시간을 맡겨놓기라도 한 것 같다.


같이 그림자놀이나 보드 게임을 하면서

아이는 발음이 어수룩해 여러 번 발음하면서도

끝내 엄마를 이해시키고야 마는 열정을 보였다.


내 생각과 마음을 엄마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저 욕망은

본능에 가까운 것이로구나, 싶었다.


아이는 엄마가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를 끝끝내 몸동작을 통해서라도 표현해 냈다.

예를 들어 목요일은 자기 목을 가리키며 '목' 요일이라고 한다든지

'인사'이드 아웃은 인사를 하면서 '인사' 발음을 설명했다.

그 열정과 기발한 아이디어 덕에 우리는 같이 한번 더 크게 웃을 수 있었지만

그때마다 가슴 한쪽이 저려왔다.


애초에 내게는 없던 개념이었다.

아이의 이러한 행동이 가능하려면 여러 단계의 확신이 필요하다.


-나는 엄마가 내 말을 이해해 주기를 원한다.

-내가 엄마를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원하면 엄마는 끝까지 내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엄마가 나를 이해하면 나는 기분이 좋다.


나는 이 모든 단계 단계가 비어있었다.


도대체 이해받는 게 뭐 대수라고.

중년이 되도록 머릿속에 깊게 깔린 명제였다.

게다가 이해받지 못하면 속상한 내 마음은 수치심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해받는 게 뭐 대수라고 그깟 거에 속상해 하나. 나는 참 찌질하다.'


이 모든 것은, 아이의 마음을 이해할 줄 모르는 어머니를 바로 보지 않기 위해

화살을 나 자신에게 돌린 결과였다.

그것은 이해할 줄 모르는 어머니를 정상으로 보는 데 성공했지만

내 나머지의 삶을 비틀어버렸다.


나는 이해받고 싶은 마음을 마주할 때마다, 부끄러웠다.


나는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본능을 거스르는 삶을 살아왔다.

엄마는 나를 이해할 마음이 없다고 인정하려면

나는 엄마에게 기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므로 욕구 자체를 이상한 것으로 해두는 것이

어린아이로서는 최선이었다.

그렇지만 그 비틀림은 나에게 이해를 바라며 다가오는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 밀어내버리는 데에 쓰였다.

그렇게 나를 고립시키는 벽의 일부를 완성했다.


아이와 공을 주고받다가

창밖에 눈이 오는 것을 발견했다.

눈 온다고 알려주자 아이는 창에 붙어서 하염없이 밖을 보았다.

와! 하는 탄성과 함께.


아이 옆에 가만히 앉아

같이 그 눈을 보니

선생님이 떠올랐다.


좋아하는 눈을 같이 봐주는 엄마가 있는

내 아이의 인생이란 어떤 차원에 있는 걸까.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음. 하고 내 말에 반응해 주는 그 목소리.

어떤 말을 해도 "음...."어떤 때는 그랬군요. 어떤 때는 맞아요. 또 어떤 때는 그럴 수 있지요. 알고 있어요."

이기도 한.

각각 높낮이가 다른 "음.."



누군가 보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어머니도, 선생님도 아닌

나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해 줄

어떤 존재에 대한 그리움 같았다.

다른 사람은 아마 그것이 어머니나 아버지일 것인,

나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아마 그 목소리가

평생 동안 노곤해지도록 바라왔던 어떤 것 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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