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나는 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을까.

나는 일곱 살에 이미 감정 노동자였다.

by 이제 봄

치료를 받으면서 보게 된 진실은

내가 참 말도 안 되는 일을 견뎠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얼마나 꼼꼼하지 못하고 절약정신이 없으며 거짓말을 많이 하는지 아느냐면서

일곱 살도 안된 나를 앞에 놓고 며느리 흉을 봤다.

어머니는

할머니가 얼마나 융통성이 없고 구두쇠 인지, 어떻게 며느리 위에 군림하며 자신을 괴롭히는지 토로했다.


나는 뭐라 대꾸할 말도 모르겠을 뿐더러 누가 맞는 말을 하는 지도 혼란스러웠다.

어머니에게 다가가자니 할머니 눈치가 보였고 할머니 곁에 있으면 그것대로 불편했다.

훗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할머니는 답답해서 너에게 엄마흉을 좀 봤는데 조그만 애가 말을 옮기지 않더라고 기특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나는, 그래 내가 어렸지만 상황 판단 능력이 있었구나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저 언어폭력에 시달리던 힘없는 유아였을 뿐이다.

나는 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어른들의 감정에 무자비하게 노출되고 있었고 이미 감정 노동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나는 기댈 곳이 없었다.


7살 유치원 때였다.

유치원에서 파자마파티를 열었다.

오전에 유치원 일과를 마치고 오후 레크리에이션, 저녁 식사를 한 다음 유치원에서 하루 자는 일정이었다.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아이들과 커다란 공을 굴리는 게임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데, 배에서 신호가 왔다.

화장실을 가야 했다.

게임을 하는 그 자리에서 손을 들고 변의를 느낀다고 말하지 못했다.

모든 유치원생이 다 모여 있어 그랬는지, 왜인지는 모르겠다.

참다가 참다가 옷에 그대로 고스란히 대변을 보았다.

그러고도 선생님께 말하지 못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공을 굴렸다.

선생님은 어디선가 나는 냄새를 추적한 끝에

나를 조용히 아래층 화장실로 데려가 엉덩이를 깨끗하게 씻어주셨다.

빨간대야에 물을 받고 쭈그려 앉아 엉덩이를 씻어주시던,

걱정하지 마라고, 잠옷도 예쁜 거 가져왔던데 그거 입으면 되겠다고,

괜찮다고 해주셨던 그 장면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저녁에 입려고 가져온 파자마를 가방에서 꺼내 선생님이 직접 입혀주셨고

아이들은 내가 똥을 쌌다면서 놀리려 했지만

선생님은 잠옷이 너무 예뻐서 일찍 입힌 거라고 하며 나를 감싸주셨다.

어차피 아이들은 어느정도 눈치 챘겠지만 나는 그래도 그럭저럭 다음 활동에 참여했던 것 같다.


이 장면에서 어떤 문제점도 느끼지 못했는데

선생님께서

"선생님 아이라면 어떻게 했을 거 같아요?"

하시자 머리가 쿵 하고 울렸다.

내 아이는 배에서 신호가 왔다면 선생님께 쪼르르 달려가

화장실 가야 한다고 말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아이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그렇지 않는다면 꽤 걱정스럽게 생각했을것 같았다.

당시 유치원생이었던 내 아이는 색연필이 부러졌어도, 추워도, 다른 친구가 자신의 것을 빼앗았어도

선생님께 이야기해서 필요한 것을 채우거나 중재를 요청 할 줄 알았다.

나는 색연필이 부러지면 그 색깔을 포기하고, 춥다고 하는 대신 몸을 떨었다.

나는 그때 이미 곤경에 처했을 때 어른에게 말하면 될것이라는,

누군가 도움을 청할수 있다는 개념이 없었다.

이것은 훗날 조금 더 자라서

어떤 어려움이 있을때에도 곁에 있는 사람에게 말해볼 생각을 해보지도 않고

혼자서 조용히 일을 마무리 하는 특성으로 이어졌다.

성인이 되어서도 나는 마지막까지 버티다 정말 어쩔수 없을때

어렵게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순전히 수줍음이 많던 내 성격 탓이라고 생각해왔다.


사람은 어차피 각자도생이야.

가족도 서로 무엇을 나누며 함께할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요구하지 말고 혼자서 독립적으로 살아야 해.

이것을 독립심이라고 생각하며 우월감을 느꼈던

사춘기 때의 내 확고한 신념은

그때부터 이미 뿌리가 시작되어 있었던 것 같다.


말해서 뭐 하나.

어차피 사람은 혼자다.

이 단단한 신념을 깨는 데는 아주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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