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 삼일 미세먼지가 최악을 달린다.
아이들을 만나기 전에는 어서 집에 들어와서 씻겨야겠다 다짐하면서
현관문을 나선다.
하지만,
태권도 차량에서 내리자마자 두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놀겠다고 뿔뿔이 흩어진다.
엄마인 나는 [미세먼지] 까만 표시를 보여주긴 했지만, 본능에 충실한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놀고 싶다고 우는 아이를 달래 들어가는 엄마도 있다. 어쩌면 그게 현명하다.
[최악]인 미세먼지 경고가 며칠째인 것에 더해, 놀이터 여기저기 송홧가루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놀이터 싸움은 아이들의 승리다.
차량에서 내려 뿔뿔이 흩어지기 전,
해맑게 나를 보고 웃고 내 품에 안기는 몇 초 안 되는 그 시간에 홀려
놀이터로 뛰어가는 아이들을 붙잡지 못했다.
미세먼지의 무서운 경고보다 아이들의 신나는 마음에 함께하고 싶었던 것도 같다.
세상 모든 엄마들은 안다.
등원버스 안에서 인사할 때만큼, 하교할 때 아이들을 다시 만나는 기쁨도 크다는 것을.
그리고 아이들이 안기는 순간, 따뜻함에 늘 마음이 홀린다는 것도.
"앞으로 20분만 더 노는 거야~"
더 놀겠다는 아이들과 시간 타협을 했다. 알람을 맞추고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지켜본다.
놀다 보니 우리 아이들보다 더 작은 아이들의 눈에 띈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이들과
이제 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함께 미끄럼틀을 타고 그물 사다리에서 놀았다.
그 작은 아이들에 비해 7세, 9세 두 아이는 이미 큰 아이들이었다.
'이 놀이터에서 저렇게 작은 손과 발로 미끄럼틀을 아슬아슬 탔었는데... '
두 아이의 어린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는..
누워서 분유병만 두 손으로 잡고 먹어도 감격하고 ,
걸음마할 땐 한걸음을 내딛는 도전에 환호했다.
배변을 볼 때,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많아진 것에 기뻐했고,
처음 기관에 갔을 때 어느새 이렇게 컸는지에 새삼 감동했다.
더 어릴 땐 그럴 수 있었는데, 커가면서 왜 변할까.
반성이 됐다.
어제의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학습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학교에 지각한 딸에게 시간을 맞춰 등교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며 언성을 높였다.
골고루 먹지 않는 아들에게 골고루 먹는 건 중요하다고 잔소리하고,
영상을 고집하는 모습에, 두 아이에게 날카롭게 말했다..
마음과 같지 않게, 아이들에게 무섭게 언성이 높아지는 날이 많은 요즘이었다.
요 며칠의 공기처럼, 내 마음도 탁해지고 답답한 느낌이었다.
시간이 지나, 다시 미세먼지가 좋은 날이 오는 것처럼.
나의 마음도 아이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시간이 점점 많아지겠지?
스스로에게 내일부터는 좀 더 아이들에게 친절해보자고 다짐한다.
더 많은 날이, 아이들에게 홀리는 엄마로 살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어제 저장해 둔 글을 오늘에서야 발행을 했네요.
오늘은 날씨가 맑고 미세먼지가 좋네요!
시간이 지나 최악이었던 공기가,
좋은 날이 온 것처럼
육아의 순간도
엄마의 마음도
그렇게 좋은 날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