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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뜰날 Sep 02. 2022

남편학개론_6

6. 처자식이 있습니다.

퇴근 한 남편의 얼굴이 뭔가 어둡다. 저녁을 차리다 내가 물었다.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남편이 말했다.


"이직해야 될 것 같아.

지금 이 연봉으로는 이제 우리 곧 세 식구 되는데 아무래도 너무 힘들 것 같아. "


이제 곧 태어날 우리의 첫 아이와 '가족' 생각하는 가장의 묵직한 말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할 수없었다.




나의 연애기간 4년 중 2년 동안 남편은 공기업을 준비하는 늦깎이 취업준비생이었다. 가족의 권유가 있기도 했고, 나를 만난 후 미래를 그리며 된다는 보장이 없지만 안정적인 직업에 처음으로 마음이 간다고 했다.


2년을 준비하고 아까운 점수로 필기시험에 떨어지면서 세 번은 봐야겠다며 정말 딱 세 번까지 보고 불합격 후, 남편은 공기업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정도 해서 떨어졌으면 자기는 공기업에  합격할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자기가 살면서 고 3 때도 이렇게까지 공부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는데 그런데도 불합격이면 이 길은 아닌 거라고, 열심히 한만큼 미련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의견은 달랐다. 열심히 한만큼 공들인 시간과 시험 결과에 미련이 남으신 모양이었다. 시험 준비를 하지 않을 거면 경제적 지원을 당장 끊을 것이니 서울 생활을 접으라는 통보를 하셨다.


막상 내가 여자 친구로서는 당장 이번 달 자취방 월세부터 걱정이었는데 남자 친구는 태평했다. 그리고 3일 후, 집 근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뭐라 하건 내려가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두 달 후, 남편은 그 회사에 정규직 직원을 권유받았다. 그렇게 닫혔던 사회생활의 커리어를 만들어 가고 정규직이 된 지 1년여쯤, 우리는 결혼을 했다.


안정된 직업은 아니었다. 전문직종도 아니었다. 사회생활의 시작이 늦었던 남편은 작은 기업에서 그 당시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할 수 있는 일로 커리어를 쌓아 나갔다.


그러다 큰 아이 출산 3개월 전에 지금의 회사로 이직했다. 임신 전까지 커리어 컨설턴트로 일을 하고 있던 나는 남편이 경력을 모두 인정받지 못할 그 회사로 이직을 준비하는 것에 별로 탐탁지 않아했다. 인정 못 받을 커리어라고 하기엔 지금 회사에서의 노력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은 마음을 돌릴 생각이 없다고 했다. 앞으로 세 식구가 되어 살림을 꾸려 나가기에는 자신의 연봉이 너무 형편없다고 했다. 커리어보다 우리의 생활이 안정되는 게 먼저라고 했다. 


처음으로 자신이 왜 이렇게 늦게 일을 시작했으며 이렇다 할 전문성 하나 없이 살았는지 후회스럽다고 했다.

이것저것 찔러만 봤지, 결과적으로 이뤄낸 게 뭐하나 없다고 자신의 과거를 들춰내며 속상해했다.


남편은 가장으로서 아빠로서 준비되어 있지 않는 자신을 자책했다. 맞벌이를 하던 내가 임신하며 일을 관둔 것도 타격이 컸으리라.


반대했던 나의 마음을 접고 내가 알고 있는 것들로 남편의 이직을 도왔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경력기술서를 정리하고, 모의 면접을 하며 이직을 위한 답변을 같이 연습했다.


무조건 합격해야만 했다. 그래야 내가 알 수 없는 가장의 무게를 조금은 덜어 내고 남편의 축 처진 어깨에 다시 힘 실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3차 면접이 끝난 날, 지하철 역 앞에서 남편을 기다려 같이 밥을 먹었다. 결과가 어찌 됐건 거의 한 달을 신경 쓰고 긴장했던 것들이 끝난 상황을 격려해주고 싶었다.


밥을 먹으며 남편은 그동안의 면접의 히스토리를 나에게 하나씩 이야기 했다. 그러다 면접 때 지원동기를 물어봤을 때 남편이 그에 대한 대답으로, 모의 면접 때의 내용은 기억이 나질 않아서 솔직히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내년 1월에 태어날 아이가 있고, 처자식이 있기에 지금의 연봉보다 높은 연봉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커리어 컨설턴트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저 높은 연봉이라면 회사 말고 다른 회사도 많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대답으로 지원동기로는 적합한 답변은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입에 바른 형식적인 지원동기가 아닌 현실적인 돌직구 대답이 사람을 더 바로 보게 할 수 있는 법. 처자식을 위해  어떤 일이든 감당할 사람으로 비칠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찌 됐건, 판단은 면접관의 몫이다.


남편의 그동안의 면접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내용이 처절한 가장의 모습밖에 없었다. 이런 마음으로 면접을 다녔었구나. 남편의 마음이 느껴져 나의 마음이 조금 아려왔다.


그날 저녁. 남편은 급체를 하고 몸살이 났다. 살면서 처음 해보는 3차 면접까지 몇 주 동안 긴장과 애타는 게 얼마나 많았을까. 급체할 정도로 온 힘을 다해 면접을 본 덕분인지 남편의 돌직구 답변이 통해서인지 모르지만 남편은 결국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기업도 아니었고, 입사해도 남편이 기존 커리어와 부합하는 원하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그 일을 하는 게 괜찮겠느냐고 물어본 나에게 남편은 대답했다.


내가 어떤 일을 하느냐는 사실 지금 중요하지 않아.

일을 왜 하느냐가 중요하지.

내가 일을 하는 이유는 분명.

내 가족을 위해니까.


홀로 살던 남편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32살 하반기에 첫 번째 아이를 맞이 할 준비를 하며 지금껏 살면서 가장 심각하게 고민하는 시기를 가졌다고 한다. 처자식을 생각하며 먹고사는 방법에 대해 참 많이도 혼자 고민하며 출퇴근을 했다고 했다. 나와 다르게 머리를 대자마자 코를 골며 자던 남편이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았다고 했다.


담담하게 말했지만 지금까지의 남편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진지하고 결의에 찬 것 같은 눈빛에 내 마음이 조금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이 시대의 가장 대열에 들어서는 남편의 중압감이 자유로웠던 남편을 이렇게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가장이라는 말도 못 할 책임감과 스트레스를  갖고 있으면서도 매일 경기도에서 서울 강남으로 3시간을 도로에서 또는 전철에서 보내면서 남편은 출퇴근을 하고 있다.


입사 7년 차 대리로 팀장이 된 지금의 남편은 3년 차, 5년 차쯤 회사생활에 대한 권태감과 심한 매너리즘이 왔었다. 불안정한 미래가 답답하고, 언제 잘릴지 모르는 세상이라고 자주 이야기했다.


사실 그때 이직을 준비했던 적도 있는데, 외국계 기업의 영어 면접과 다른 기업들의 마지막 연봉협상에서 고배를 마시고 난 후, 다시 지금의 자리에서 성실해진 느낌이 없지 않아 있긴 해도 그 위기를 잘 극복하고 회사생활을 하고 있는 게 나로서는 고맙다.


7년 전, 이직 당시에 일을 하는 분명한 이유가 가족이라는 남편의 말은 지금 생각해도 따뜻하고 감동적인 말이다.


그건 그렇긴 해도, 지금은 회사생활의 동기부여가 되는 것은 가족과 더불 대출이자도 한몫하고 있는 듯하다.


가끔 주말에 캠핑으로 그리고 운동으로 옥죄여 오는 가장의 압박에서 그나마 벗어 나는 시간이 많아 지길 바란다. 그리고 켜켜이 쌓아져 온 그 가장의 무게가 어느 날은 과도한 책임감으로 어느 날은 무력감으로 남편을 너무 지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여보. 당신의 노고로 오늘도 '우리 가족'이 이렇게 잘 먹고 잘 살고 있어요. 오늘도 힘내세요!

은행당신의 건강한 회사생활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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