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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 Jan 24. 2023

누구에게나 잊고 싶은 순간이 있다.

한동안 그것을 안고 힘들었던 시간이 있었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필사하다가 고독과 외로움에 대해 읽었다. 외로움과 고독은 한 때 독서모임의 주제였는데 우리가 통상적으로 쓰는 고독의 의미보다 철학에서는 고독이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듯하다. 미국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는 “혼자 있는 고통은 외로움이고, 혼자 있는 즐거움은 고독’이라 했다고 한다.


외로움과 고독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페이지에는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라는 황동규 님의 시가 있었다. 아직은 내가 알 수 없는 영역에 다녀온 분의 시를 읽고 아직은 느껴보지 못한 (아직은 느껴보고 싶지 않은) 홀로움을 가늠하며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오래된 개인적인 상처가 떠올랐다. 책의 내용과 관련 없이 뜬금없이 떠오른 ‘사소하지만 불편한’ 상처를 무릎에 앉히고서 계속해서 글을 읽어나갔다.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는 고독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고 고독에 대한 이야기는 개별화로 넘어갔다. 고독을 겪으면 개별화라는 단계로 진입한다고 한다. 개별화란 오히려 개개인의 인간이 그 속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모든 사물의 본질적인 것에 가까이 이르게 되는, 즉 세계와 가까이에 이르게 되는 그런 고독화이다” 그러니까  고독 속에서만 “처음으로” 사물과 세계의 본질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인생의 역사 138p)라고 쓰여있었다. 순간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물도 아닌 그 상처와 처음으로 대면하고 싶어졌다. 그동안 내가 그 상처를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말장난 같지만 누구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그렇게 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방에 상처와 나만 남겨보았다.


먼저 그 상처와 관련된 관계성을 지웠다. 사람을 지웠다. 사람을 향한 미움과 기대, 원망과 탓을 지웠다. 그로 인해 받은 상처와 쓰레기통에 버린 마음 같은 것들도 지웠다. 그 상처를 바라보는 제삼자의 눈들도 지웠다. 어차피 이 상처는 나에게만 확대되어 보이는 개인용 안경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이 상처를 향한 판단도, 죄책감도, 자책도 모두 지워버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끄러움을 지웠다.


결국 남은 건 나였다. 그것을 겪은 내가 남았다. 그 과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마음과 생각과 느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 상처를 부정하는 것은 나를 부정하는 시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나마 상처가 그저 그런 일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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