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답게 살고 나답게 육아한다는 건 뭘까요?

꿋꿋함의 물동이

by 말로이

우리는 멀리 있는 것에는 객관성을 유지하지만 자기 일은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 그래서 자기 일에 대한 해답은 잘 보이지 않는다. 다들 연애 코치는 잘하지만, 자신의 연애는 어려웠던 것처럼. 그럴 때 나를 잡아준 경험, 생각들이 있다.


안전과 방관


몇 달 전 부모 교육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놀 공간과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실제로 공간과 시간이 없기도 하지만 그나마 나가 놀 때는 매번 놀이터에 따라오는 엄마들 때문에 아이끼리 마음껏 놀고, 규칙을 만들고, 도전하는 시간이 줄었다고 말씀하셨다. 엄마가 있으면 "위험해!", "조심해!" "양보해" , "그만해"라는 말을 하느라 아이들이 실컷 놀지 못한다고 했다. 유아교육과에서 '놀이'에 대한 책을 읽고 '따뜻한 방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던 터라 '아이들을 좀 놓아둬야 하나?'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때는 아이가 엄마 없이 다닐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가 준비되면 혼자 놀 시간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빠르고, 아이들은 예상보다 늘 빨리 자란다. 놀이에 대한 교육을 듣고 나서 두 달 뒤, 아이가 학교에 혼자 가보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떨리는 얼굴로, 굳게 결심한 얼굴로 집을 나서더니 점점 편안하게 집을 나서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오던 전화도 자연스럽게 줄어들더니 이제는 전화하지 않는 날도 있다. 그리고 좀 지나자 하원하는 동생을 혼자 데리러 가겠다고 했다. (아파트 앞 하원 차량) "엄마는 오지 마! 나 혼자 갈 거야! “ 아이는 '할 수 있다'는 느낌을 마음껏 느끼며 '혼자'를 즐기는 듯 보였다.


"엄마, 나 오늘은 놀이터에서 좀 놀다가 갈게"

" 놀이터에서? 같이 놀 친구 있어?"

"아니? 없어. 그냥 그네 좀 타고 갈게"


바로 집 앞 놀이터에서 혼자 그네를 타면서 잠시라도 자유를 즐긴다. 겁은 많은데 소심하게 자유를 즐기는 모습이 귀엽다.




그런데 어느 날 옆집 엄마를 만났다. "그거 알아요? 아파트 놀이터에 놀다 보면 욕하는 남자아이들이 있어. 우리 아이는 좀 불편해하더라고. 아이들이 크면서 욕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기는 한데 나는 좀 그래. 이걸 개입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지금 너무 고민이 돼. 저번에 보니까 그 친구들이랑 딸 (첫째)이 같이 놀고 있더라고. 혹시나 해서 말해줘요. 욕을 영원히 모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욕하는 건 안 좋으니까 알려주는 게 낫다 싶어서... 그래서 나는 웬만하면 방관은 안 하려고 노력해. 노는 곳에도 따라 나가려고도 하고. 혹시나 한번 살펴봐요~ "


첫 느낌은 고마움이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해 주는 엄마가 고마웠다. 엄마들이 서로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 편하게 얘기해 주고, 하나의 의견으로서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아이들도 더 안전하고 자유롭게 바깥을 돌아다닐 수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쓴 이유는 옆집 엄마가 한 말 중 나를 생각하게 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방관'이라는 단어에 꽂힌 것이다. 상대가 정확히 어떤 의도로 이 단어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거슬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사실 아이가 혼자 다니겠다고 처음 말했을 때, 나의 첫 감정은 불편함이었다. 아이가 원할 때 믿고 맡기는 것이 쉬운 일 같아 보여도 나 같은 겁쟁이 엄마에게는 또 다른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의 자율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아이가 도전하는 동안 엄마도 걱정을 티 내지 않고 버티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아이가 막 용기를 내서 하고 싶어 하는 처음 몇 달간은 원하는 대로 하게 뒀다. 이것이 내 육아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관'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아!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는 생각을 담는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가 버티고 있다는 것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느껴지는 대로 말했겠지만 요즘 혼자서 아파트를 돌아다니는 딸이 방관으로 보이는 시선도 있는지를 알게 된 순간이었다.


다르다


가끔 내가 아이에게 훈육하는 장면을 보고 '강하게 말한다'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면서 말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허용적이라고 말한다. 내 말에 대해 느끼는 강도나 느낌이 사람에 따라 다르다. 조금 더 솔직하고 편협해져 보자면 외동을 키우는 사람들은 내 말을 강하게 느끼고, 자매 이상을 키우는 사람들은 나의 훈육 강도를 약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이것은 일반화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주 협소한 내 주변 사람들을 보았을 때 그런 것이다. 아이가 한 명과 한 명이 더해지면 두 명 분인 것 같지만 그 이상이다. 각자가 자라는 게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며 지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제가 있는 집은, 집에서부터 '규율'이 필요하다. 남자 둘을 키우는 집에는 명함도 못 내미는 자매 둘을 키우는 엄마지만, 자매 둘도 나름의 강한 훈육이 들어가야지 어느 정도 가정생활이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경험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르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외동이라도 기질에 따라 강한 훈육이 필요한 집도 있고 형제가 많아도 큰 소리 없이 지낼 수 있는 집도 있다. 정해진 것 없지만 집마다 사람도, 규칙도, 분위기도 다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의 환경과 경험에 따라 상대를 본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악기는 해야 한다던데...


나는 아주 예전부터 부모는 부모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친구 같은 부모를 꿈꿔본 적이 없다. 친구는 바깥에 나가서 사귀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게 좋은 육아'를 하고 싶지만, 부모이기에 꼭 가르쳐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육아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언급하는 나의 꿈파트너이자, 육아 멘토인 방세영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 '아이가 엄마의 지도력 안에 들어와야 한다'는 말이다. 아이가 엄마의 말을 진짜 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아이에게 윽박지르거나, 엄하게만 한다고 아이가 부모의 지도력 안에 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적인 믿음과 꾸준한 일관성을 통해 아이와 부모 간의 신뢰가 구축되어야 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 나의 경우에는 엄하게 말하는 것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었다. 아이의 감정을 알아주고, 자율성과 주도성을 존중해 주되 아이가 하기 싫은 것도 조금씩은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부모다. 이 말은 각자의 집에서 적용되면서 강도가 다 달라진다. 아이의 성향과 엄마의 성향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피아노학원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렇다. 우리 집은 아이가 피아노를 배우고 싶지 않아 해서 피아노학원을 보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모든 것에 내적동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피아노를 꼭 시키고 싶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피아노 음악회에 데리고 가거나, 좋은 음악을 들려주는 일이다. 고학년이 되면 음표를 읽으면 좋다고 하니, 음표 읽는 건 내가 방학 때 알려주면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피아노 학원을 보내지 않는 나에게 조언한다. 아이가 하기 싫어해도 보내야 한다고. 피아노학원을 보내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말이 틀렸다는 건 아니다. 너무나 공감되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지만, 내가 정한 육아관에 맞지 않는 의견이다. 그래서 그냥 '그러게요~ 하면 좋은데' 하고 넘긴다. 나도 피아노 보내고 싶다. 적기두뇌라는 책에서 아이가 어릴 때 악기를 배우면 뇌 발달에 좋다는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겠누. 아이의 일인걸. 소신 육아를 한다는 건 가끔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 다하는 환경에 맞서 나를 설득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의 경우


첫째 아이는 새로운 것에 도전할 때 시간이 필요한 친구다. 그러나 충분히 준비할 시간만 제공되면 자신의 속도를 잘 찾아간다. 그래서 첫째는 스스로 통제할 기회를 주는 것이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 아이는 현재 초등학교 1학년으로 돌봄을 하고 있다. 돌봄에서도 기본적으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데 보드게임이 어려운지 처음에 하기 싫어했다. 우선 아이의 의견을 잘 들어주었다.


"보드 게임이 왜 싫어?"

"못해서 계속 져. 그래서 재미없어 “

"그래?? 질 수도 있지. 지면서 배우는 거지 ~ 보드게임이 얼마나 재미있는데"


그리고 다음 주 보드게임을 하는 날, 아이가 집에 빨리 오고 싶다고 했다. 속으로 보드게임이 하기 싫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첫날에는 아이의 말을 들어주었다. "오예!!" 아이는 아주 기뻐하며 집에 와서 엄마를 안아주었다.


그다음 주 월요일에도 집에 빨리 오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보드게임이 하기 싫어?"라고 물어봤다.

아이는 조금 망설이더니 "응"이라고 말했다.

"알았어, 그럼 빨리 와!!"라고 말했다.

아이는 "엄마 고마워!! 너무너무 고마워"라고 말했다.


셋째 주에도 아이는 똑같이 전화가 왔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이번에는 가야 해. 저번에 두 번은 OO이 말을 들어줬으니, 이번에는 갔으면 좋겠어. 하다 보면 재미있을 거야" 그러자 아이는 "에이... 알겠어"라고 말한다.


그 뒤로는 또 잘 간다. 스스로 보드게임에 참석하지 않는 걸 충분히 선택해 봤기 때문이다. 종종 보드게임하는 날 전화가 온다. "엄마~~ 오늘은 제발 빨리 가면 안 돼?" 그러면 나는 말한다. "안돼! 하고 와야 해!" 그러면 아이는 "알겠쏘~~"하고 전화를 끊는다. 정말 하기 싫을 때 엄마에게 설명하면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선택권, 그것은 자신을 조율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나는 강제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해 보았을 때 자기 조절을 잘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자기 말을 수용 받아본 아이는 부모의 말도 잘 수용한다. 단지 아이가 수용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복잡할 뿐이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지름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객관성


사람들은 타인의 일에는 무섭도록 객관성을 유지하지만 자기 일에 있어서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요즘 타인을 평가하라고 하면 초등학생도 전문가다운 평가를 그럭저럭 해낸다. 하지만 실제 삶으로 살아내라고 하면 다들 이렇게 말한다. '도대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거지?'라고 말이다. 남의 연애 조언이 쉽고, 내 연애가 어려운 것처럼. 다른 사람의 관계갈등에서는 답이 보이는데, 내 관계는 어려운 것처럼 삶이 그렇다. 그래서 흔들린다. 객관적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꿋꿋함의 물동이


내가 충분히 고민하고, 아이를 고려해서 결정했다면 꿋꿋함의 물동이를 채워가야 한다. 내가 충분히 고려했다면, 탐나는 육아 조언에도 꿋꿋하게 나의 육아관을 지켜나가야 한다. 그것이 아이와 나를 위한 길이다. 그리고 이전에 스스로 '충분히 고려하고, 공부하는 시간'이 있었다면 저절로 꿋꿋해질 수밖에 없다.


각자의 육아 목표는 다 다르다. 누군가는 잘난 아이를 키우고 싶어 하고, 누군가는 공부 잘하는 아이를 키우고 싶어 한다. 나는 아이들이 삶을 풍성하게 즐기는 사람으로서 독립하길 원한다.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 베이스가 되지 않으면 삶을 풍성하게 즐길 수 없다. 목표는 각자가 다른 거니까. 아이가 커가면 목표는 충분히 수정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어린 지금, 현재의 육아 목표는 ' 자기답게, 자신을 사랑하면서 삶을 풍성하게 즐기며 자라는 아이'로 자라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서 우뇌가 자라는 유아 시기에는 한글을 못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에는 예쁜 그림을 많이 보고, 감각으로 모든 걸 흠뻑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첫째의 제일 친한 친구가 6살 때 우리 집에 놀러 온 적이 있다. 그때 친구가 첫째 아이에게 한글로 책을 읽어주었다. 나도, 우리 딸도 즐겁게 그 친구가 읽어주는 책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가 한글을 못 해도 괜찮은 시기라고 생각하니, 아이도 한글을 못 읽는 부분에 대해 부끄러워하거나 답답해하지 않고 친구를 칭찬해 줬다. 엄마의 마지노선은 7살 겨울방학이었다. 7살 겨울방학에도 글을 못 읽고 못 쓰면 그때 가르쳐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는 딱 7살 겨울방학에 스스로 한글을 떼었다. 그래서 둘째도 한글을 가르치지 않고 있다. 글로 쓰면 평온해 보인다. 하지만 현실에서 7살이 한글을 못 쓰고 못 읽으면 엄마에게 많은 화살이 날아온다. 그럴 때마다 무책임하고 애살 없는 엄마가 되곤 한다. 그러나 아이도 나도 이 시기는 딱 한 번이다. 남들 말 듣다가 우는소리 하지 말고, 남들 잔소리 좀 듣고 지나가면 그만이다. 어차피 내 인생인데. 둘째는 6살인데 아직 이름을 거꾸로 쓴다. 이름을 적어서 보여줄 때마다 "글씨가 너무 예쁘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쓸 수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고 특별하다. 주변에서 이름을 거꾸로 쓴다고 큰일 난 것처럼 굴면 그냥 웃어넘긴다. 6살에 글씨 좀 못쓴다고 큰일 날 건 없다. 나중에 7살 겨울방학 때 울면서 똥줄이 탈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2025년 겨울의 내가 할 일이지 지금의 내가 할 일이 아니다.


누구도 나의 전체 맥락을 알 수 없다. 나도 타인의 전체 맥락을 알 수 없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그런가? 그런가? 매번 멈추어 설 필요가 없다. 육아관이 자신을 설득한다면 꿋꿋하게 아이와 함께 해나가면 된다. 육아할 때 꿋꿋함의 물동이는 꼭 필요하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 본다.


그리고 ,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엄마들에게 건네본다.


당신이 맞아요!!

모든 조건이 다른,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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