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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 Dec 25. 2024

변명과 설득을 멈추기

결백의 물동이

나는 결백의 물동이를 꽉꽉 채우고 다녔다. 누군가 내가 틀렸다고 말하면 나도 모르게 반박할 말들을 마음속으로 정리했다. 직접 내 생각을 전달한 건 반 밖에 안되지만 유독 오해받는 것을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요즘 의식에 대한 책을 읽으며 내가 얼마나 좋지 않은 에너지를 마음에 품고 살았는지를 깨닫는다. 나는 이걸 결백의 물동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결백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 오해를 풀고 싶은 마음, 변명하고 싶은 마음, 설득하고 싶은 마음들이 모두 결백의 물동이에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백의 물동이를 비워버리기로 했다. 나 스스로 결백하다면 그것을 스스로 믿어주기로 했다.


실수를 방어하면 그것은 흐름을 거슬러 노를 젓는 꼴이며,
펜듈럼에게 에너지를 내주는 것이 된다.
어떤 형태든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욕망은
내적 중요성이 높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라.
자기에게 실수를 할 권리를 선사하고, 실수를 허용하라.
실수를 방어하지 말라.
오히려 그것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라.
그 즉시 삶은 훨씬 더 쉽게 흘러갈 것이다.

바딤젤란드 《리얼리티트랜서핑 3》


'이해'라는 키워드는 나에게 중요한 단어다. 어릴 때부터 감정의 눈금이 mm부터 발달한 사람 같다는 생각을 했다. 또래 아이들의 감정의 눈금이 cm밖에 발달하지 않은 시기에도, 나는 감정의 눈금이 mm부터 발달되어 있었다. (섬세하거나, 예민하거나) 그런데 내면에 발달한 감정의 눈금에 비해, 표현의 눈금이 cm도 발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나를 잘 모르니 남들에게 나를 설명할 수도 없었다. 어릴 때의 우리는 이건 착한 것, 이건 나쁜 것이라고 이분법으로 구분하며 살았다. 인생을 살고, 다양한 경험을 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cm 사이에 mm를 만들어 나간다. 그러면서 사람을 이해한다. 입체적으로 사람을 보기 시작한다. 무조건 착하기만 한 사람은 없고 무조건 나쁘기만 한 사람은 없다는 걸 경험을 통해 조금씩 배워간다.

하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스스로 정의할 수 없는 mm를 가지고 있었다. 올바른 mm가 아니라 다른 mm였다. 어떤 사람의 맥락을 보지 않고 욕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어서 '아닌 것 같은데...'라고 속으로 생각하거나, 가까운 친구의 의견을 따랐다. 섬세한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그걸 표현할 수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 내 마음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마음, 그 생각들을 표현할 수 없어서 답답하게 살아왔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 마음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마치 언어가 발달하지 않은 아이가 자신의 답답함을 울음과 떼로 표현한 것처럼, 조금은 답답함을 머금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성향일수록 독서를 했어야 했는데, 어릴 때는 독서를 많이 하지 않았다. 내가 나를 설명할 수 없기에 다른 사람들도 나를 잘 몰랐다.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 속에서 산 세월 때문에 '이해'는 나에게 중요한 키워드다.


20대가 되어 독서에 재미를 붙이고, 스터디에 참석하고, 마음을 배우고, 의식에 대한 책을 읽으며 어릴 때 스스로를 이해받지 못한 감정. 그 감정을 끌어안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을 넘기지 못하고 그렇게 반추하며 혼잣말로 설명하는 것을 반복했다. (예를 들면 샤워할 때 ㅎㅎ) 하지만 이제 그만두기로 했다. 마음을 먹었으니 깨달음이 일상이 되기까지는 또 시간이 걸릴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


나 자신을 알면 다른 사람을 탓할 수가 없다. 나도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타인에게 완전한 이해를 요구할 수 없다. 나도 누군가를 속단한다. 나도 이건 = 나쁜 거야, 이건 = 좋은 거 야라는 공식을 가지고 산다. 그러면 사실 모든 게 또이또이다. 변명할 필요가 없다. 오해에도 총량이 있다. 오해받는 만큼 나도 오해하고 산다. (아는데 왜 그럴까?)


가끔 육아를 하다 보면 참견하는 '말'들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엄마들을 만난다. 이렇게 말하면 나도 아주 쿨한 것 같지만 나도 처음엔 반사적으로 변명을 했다. 그런데 변명하면서 깨달은 건 참견하는 사람들은 변명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보이는 대로 보고, 하고 싶은 말을 한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아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가보다'라고 생각하고, 들을 건 듣고 말건 만다. 겉으로 "아~"라고 대답하지만 머릿속에서는 필터링을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한다. 필요한 조언에는 감사하다고 표현한다. 모든 말에서 배울지, 열을 낼지는 내 선택이다. 도움이 되는 말은 실천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 말에는 반응하지 않는 것을 배운다. 어떤 엄마들은 지나가는 할머니가 참견해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시선에서 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힘들어지는 건 그들의 시선을 순간 나에게 가져왔기 때문이다. 아이가 더워서 양말을 벗겼는데 양말을 안 신겨서 입을 댄다면 그것은 상대의 마음이지 나와 아이의 마음이 아니다. 그러면 그냥 흘려보낸다. 나도 내 기준에서 세상을 본다는 걸 알면, 저 사람도 그렇구나 하면 된다. 그럴 때 이렇게 생각해 보면 도움이 된다.


너무 복잡하게 산다.
내 주변엔 저런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야.
난 행복해!


변명을 멈추면 배움이 온다. 만약  참견하는 사람이 가까운 주변에 있다면 '저 사람이 내 무시하기 스킬을 알려주러 왔구나'라고 생각해야 한다. 만약 가족에게 그런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부모라면 '포기하는 스킬, 흘려보내는 스킬'을 알려주러 왔구나라고 생각해야 한다. 만약 남편이 그런 사람이라면 '대화의 스킬, 존중의 스킬, 이해의 스킬'을 알려주러 왔구나라고 생각해야 한다. 만약 아이가 나를 힘들게 한다면 내가 아직 미성숙하구나...'성숙함'을 알려주러 왔구나 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갈등이 배움이 된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배운다. 배울게 천지다. 아주.

그런데 너무 진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짜증이 날 때마다 드라마에 나오는 긍정적인 아줌마들을 떠올린다. 주변 사람들이 공격해도 그러려니 하는 아줌마들에 잠시 빙의해 본다. 그러면 이내 웃음이 난다. (예를 들면 그들이 사는 세상에 현빈엄마 나문희가 남편을 대하는 자세같이...) 배움은 고리타분한 것, 진지한 것, 무거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배울 수 없지 않을까? 어쩌면 진짜 삶에서 배우는 사람들은 가벼운 사람들이다. 누군가와 대립하는 걸 멈추고 가볍게 생각해야 그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 나는 가벼워졌을 때 갈등을 밟고 다음 단계로 훨훨 날아갈 수 있었다. 무거우면 배울 수 없다.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서 다른 사람의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기 때문이다.  


결백의 물동이


오늘의 글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결백의 물동이를 비우고 자유롭게 살자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도 다시 한번 전하는 말이다. 나는 가끔 호감 가는 사람들에게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온다. 그럴 때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다. 결백의 물동이를 채우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내 인생의 심판으로 타인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이 지옥이 되는 순간은 타인의 시선에 중요성을 두었을 때만 그렇다. 우리는 누구나 이해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대부분의 갈등이 이해받지 못해서, 인정받지 못해서 일어난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의 갈등, 다른 사람과의 갈등 모두) 하지만 나를 신뢰하면 다른 사람의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된다. 어른이 되면, 누구나 누군가를 쉽게 이해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각자의 입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럴 때 진리처럼 등장하는 말이 있다.


 '남들은 나에게 큰 관심이 없다'


타인이 나를 이해하지 않고 ,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큰 관심이 없는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그런 것처럼 말이다. 사람의 인생을 영화라고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의 인생영화에 조금 나쁜 조연으로 등장한다고 해서 속상해할 필요가 없다. A의 인생에 내가 나쁜 조연으로 등장했다면 A의 세상에서 이런 조연의 역할이 필요한 것뿐이다. 그럴 때일수록 나는 내 인생의 영화에 집중해야 한다.


나 또한, 이 글을 쓰면서 한번 더 마음을 정리해 본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고. 결백의 물동이는 비워두고 나를 신뢰하면서 살아가보련다. 이렇게 살아갈 때 육아 또한 아이와 나에게 집중하며 잘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소중하다. 계속해서 나에게 집중하자. 변명을 멈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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