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쉽다? 믿음이 어렵지?

사랑의 물동이가 채워지면 믿음의 물동이도 채워진다

by 말로이

몇 주전에 현빈과 송혜교가 주인공인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 》을 보았다. 13화까지 보았었는데 사람들이 왜 이 드라마를 인생 드라마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실제로 직장 생활을 하며 보았던 인물들이 드라마에서 재현되었다. 그리고 미성숙한 사회 초년생이 사회를 배워가는 모습이 내 어린 시절 같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음에 오래 남는 장면을 보았다. 드라마 속에서 윤영(배종옥)이 민철(김갑수)에게 질문하는 장면이 나온다."자긴 사랑이 먼저라고 생각해? 믿음이 먼저라고 생각해?"오랜 시간 윤영을 사랑한 민철은 ‘사랑’이라고 답했다. (민철은 윤영에게 반해 부인도, 자식도 버리고 떠났다) 그리고 그 오래전 민철과 여행을 떠나기로 하고 만나기로 한 공항에 나타나지 않았던 윤영은 ‘믿음’이라고 말했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부분이었다. 사랑이 먼저일까? 믿음이 먼저일까?라는 질문 말이다. 나는 과연 어떤 걸 더 중요하게 생각할까? 이 질문은 꽤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그리고 며칠 내로 믿음이 먼저라는 결론이 났다.


나를 걱정해 주는 대부분의 사람은 나를 사랑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가끔은 사랑해 주는 사람보다 믿어주는 사람이 필요해질 때가 있다.


사랑과 믿음


사랑은 참 쉽다. 내 마음을 그대로 내어주면 사랑이 된다. 사랑은 걱정을 삼키지 않고 그대로 내놓으면서 '내가 사랑해서 그래'라고 말한다. 자신의 불안을 통제하지 못해도 '이건 내가 너무 사랑해서 그래'라고 말한다.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상대에게 쏟아내어도 사랑이라고 말한다. 상대를 먼저 고려하는 사랑도 있지만 미숙한 사랑도 사랑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러나 믿음은 그저 상대를 믿어주는 것이다. 상대가 아직 보여주지 않은 것까지 봐주는 것이 믿음이다.


믿을 수 없다면 무관심하기


요즘 나에게는 단순한 애정보다 사려 깊은 무관심이 필요하다. 따뜻하고 애틋한 마음에 던진 걱정이 내 마음에 옮겨붙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잠시 나에게 엉겨 붙은 걱정들을 덜어내는 작업을 한다.


"나는 나름의 속도로 잘하고 있다. 변명하지 않아도 된다' 하고 말이다.

그러고 나면 조금은 괜찮아진다.


그래서 가끔은 애정보다 무관심이 더 고마울 때도 있다. 그렇다고 그 애정, 그 따뜻함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그 마음은 이해가 되니 '따뜻한 걱정'이 엉겨 붙으면 그저 조용히 떼어낼 뿐이다. 하지만 머리는 늘 마음같지 않다. 마음을 달래도 엉겨 붙은 걱정이 떨어지지 않으면 남편에게 이야기한다. 징징거릴 남편이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충분히 징징거리고 나면 엉겨 붙은 걱정도 어느새 떼어져 있다. 부부는 가끔 극한 직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 따뜻한 극한직업이다. 살면서 엉겨 붙은 것들을 서로 떼어주는 일을 한다.


가족에 대한 믿음


그래서 나는 가족에게 믿어주는 엄마이자 아내가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사람은 자신이 받고 싶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존재 같다. 나는 말없이 믿어주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마음을 가족들에게 투사한다. 그래서 가족들을 믿어준다. 어떤 때는 믿어주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그동안 날 가만히 놓아두는 사람. 눈빛에 마음을 담고 침묵으로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가족을 믿어주는 아내와 엄마가 되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각자의 장애물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 장애물은 불안이 될 수도 있고,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될 수도 있고 습관이나 신념일 수도 있다. 내 안에 장애물이 있으면 나도, 상대도 믿어줄 수 없다. 극복하지 못한 부모의 장애물은 고스란히 아이에게 전달되기도 하고, 극복하지 못한 나의 장애물은 남편과의 관계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나에 대한 믿음


그럼 타인이 나에게 주는 사랑이나 믿음이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는 어떨까?


지난 몇 년간 자신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왔다. 나를 믿어준다는 건 뭘까? 나를 믿는 느낌은 무엇일까? 하고 말이다. 나의 단점과 결핍에 몰입되어 있던 나는 그 방법이도무지 무엇인지 몰랐다. 분명 세상에는 자신을 믿고 도전하는 이들이 많은데, 나는 그 사람들의 마음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가까운 지인들에게 물어보면 '나도 그래'라며 걱정을 함께 하거나, 타고나길 자신을 믿는 사람들뿐이었다. 주변에는 자신을 믿지 못하다가 나처럼 '나를 믿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요즘엔 조금은 알 것 같다. 아이를 사랑하니까 아이를 믿는 힘이 생긴 것처럼 나를 사랑하면 나를 믿고 싶어진다는 것을. 믿음의 시작이 사랑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둘 중에 더 깊은 것을 고르라면 '믿음'이다. 하지만 믿음은 사랑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자기 믿음으로 가는 길도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같은 마음의 단계가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엔 나의 모든 면을 바라보고, 품어주고 이해면서 믿음도 시작되었다. '나 조금 괜찮은 사람인데?'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할 때도 온전히 자신을 믿지 못했지만, 조금씩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이야 라는 마음을 품고있다보니, 이제는 자신을 조금은 믿을 수 있게 되었다. 형언하기는 어렵지만 그런 느낌이다 그래서 결국 믿는다는 건 사랑해야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드라마 속 윤영의 말에 대답을 해보자면 '믿음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먼저 일어나야 믿음도 일어나겠지만 그러기에 둘 중에 고르자면 ‘믿음’이라는 가치가 더 중요한 셈이다. 그 장면과 그 대사가 왜 한동안 마음에 남았는지 모를 일이다. 아직 드라마 정주행은 끝나지 않았지만, 윤영의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은 끝이 났다. 난 왜 이 물음이 마음에 남았을까? 엄마의 과제를 하고 있는 중이라 그렇다 생각해본다. 이제서야 조금 더 나를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어떤 형태의 사랑을 원했는지 알았으니까.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랑을 줄지 결정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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