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 다르다
언제부턴가 고등학교 친구들과 만나면 나중에 아이들을 맡기고 서울여행을 하자고 이야기했었다. 말할 때마다 도대체 언제 갈까 싶었는데 드디어 일정이 맞아 진짜 서울에 다녀왔다. 시간이 귀중한 엄마들은 신나서 알차게도 돌아다녔다. 밤이 되자 아쉬운 마음에 주변 술집을 검색했고, 인근에 있는 이자까야에 갔다.
카운터 앞에 있는 큰 테이블에는 젊은 남녀가 8명 정도 앉아 있었다. 외투를 옷걸이에 걸고 자리에 앉는데 친구들이 갑자기 들뜬 표정이 되었다. 알고 보니 옆 테이블에 연예인이 있다고 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구나 싶었다. 역시 서울은 다르다 생각했다. 두근두근.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연예인과 한 공간에 있다는 걸 마음껏 느끼며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그런데 맞은편에 있는 (친구 1)과 (친구 2)가 갑자기(친구 3)과 (나)를 보고 깔깔 웃었다. 왜 웃냐고 물어보니 이렇게 말했다. (아래 그림참고)
"너희 둘이 진짜 웃기다. (친구 3)은 눈이 계속 움직이는데 (나)는 절대 저쪽으로 안 쳐다보네. 연예인에 관심 없다고 하더니 진짜 관심 없는가 보다. 둘이 맞은편에서 보는데 비교돼서 너무 웃기다"
친구 3은 웃고 나는 말했다.
"쳐다보는 게 실례일까 봐...."
아이들은 나의 소심한 대답에 빵 터져서 한참을 웃었다. 알고 보니 (친구 3)과 (나)는 서로 생각이 달랐다. 친구 3은 '연예인이 신기하고 궁금하기도 했고 만약 내가 연예인이라면 알아봐 주고 응원해 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 친구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도 춤추러 나오라고 하면 춤도 잘 춘다. 감탄할 정도로 춤을 잘 추는 친구다. 그 반면 나는 '모르는 척하는 것이 연예인에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향인인 나는 사석에서 누군가 알아본다면 불편할 거로 생각한 거다. 누가 맞다, 틀렸다는 없지만 중요한 건 서로가 받고 싶은 대로 상대를 배려했다는 사실이다.
실제 연예인들의 마음은 정말로 알 수 없다. 티브이에 나오는 연예인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떤 순간에는 누군가가 나를 알아봐 줬으면 할 때가 있고, 어떤 순간은 아무도 알아보지 않았으면 하는 순간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 연예인의 마음은 알 수 없지만 '생각의 다름'을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좋은 건 다 좋을 것 같아도 다 다르다.
'좋은 사람'에 대한 기준이 모두 비슷할 것 같지만 좋은 사람에 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면 각자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은 조금씩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침묵이 깊은 위로가 되지만, 누군가에게는 복장 터지는 일이 되기도 한다. 침묵의 미덕을 모르는 사람 앞에서 침묵은 ‘답답함’ 그 잡채로만 여겨지기 때문이다. 또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애정으로 한 말이 누군가에게는 간섭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정도의 차이인데 사람마다 원하는 정도가 다 다르다는 걸 느낀다. 또 하나 느낀 것은 대부분의 사람은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사람'의 모습으로 다른 사람을 배려한다. 나만 해도 그렇다. 나에게 '좋은 사람'은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내가 정의한 공감을 잘하는 사람은 시야가 넓은 사람이다. 공감을 잘해주는 태도보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조망 수용 능력'이 잘 발달한 사람이 좋다. 그러니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은 공감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기보다, 공감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조금 덜 친절하더라도 ‘넓은 시야로 상대 입장을 생각해 주는 사람’을 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대화할 때면 내가 경험해보지 않은 부분이라도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 그런 세계가 있구나라는 호기심 있는 태도로 귀를 기울인다. 그래야 상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친절하게 말하는 것을 '좋은 사람'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기도 한다. 누가 맞고, 틀렸고는 없다. 그 입장이 되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우리는 한순간이라도 상대의 기질이 되어볼 수 없고, 상대의 어린 시절부터의 경험을 모두 공유할 수없고, 상대의 입장이 되어볼 수 없다. 그래서 누군가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에 의해 힘들었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친절하지 않은 누군가 때문에 마음 곪아본 일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각자의 경험에 따라 ‘좋은 사람’의 정의가 달라진다는 걸 느낀다. 누군가에게는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거리를 두는 사람이 곁을 주지 않는 사람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솔로에서 '영호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기는 의도로 평가되길 원하지만, 항상 타인은 행동으로 평가한다' 이 말이 정말 공감되었다. 현실이고 사실이기 때문이다. 영호의 말에 깊은 공감이 되면서도 문득 '가끔은 상대의 의도를 봐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사람들의 선한 의도를 보면 생각보다 세상이 따뜻해진다. 결국 아주 나쁜 사람은 잘 없다 걸 알기 때문이다. (물론 나와 맞지 않는 나쁜 사람도 많다) 이 것은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선한 의도를 보았을 때 상대는 선한 면을 나에게 보여준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의도를 알아봐 주어서인 듯하다.
의도를 보려는 이유
의도를 보려는 이유는 의도를 보면 내 마음이 편안하다. 내 안에서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많을 때는 불편한 것도 많았다. ‘왜 저렇게 말할까?’ , ‘왜 저렇게 행동할까?’. 이 꼴도 보기 싫고, 저 꼴도 보기 싫었다. 나를
돌아보며 깨달은 건 ‘이해 안 돼’라는 말을 자주 쓰는 사람은 ’ 내가 맞아 ‘라는 말을 쓰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그랬듯이. 하지만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은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나도 이대로 괜찮고, 상대도 이대로 괜찮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을 하기 위해 몇 년간 상대를 이해하려 노력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는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무리 상대를 이해해 보려고 뇌과학책도 읽고 강의를 들어도 이해가 안 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와 다른 사람들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를 이해하면서부터다. 나를 이해하면 상대도 나를 이해한 것처럼 이해하게 된다. 깊은 이해라기보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여전히 사람공부를 하고 있다. 이해하려는 노력은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만약 끝까지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놓아둔다. '응 당신 나랑 안 맞아'라고 생각한다. 이제 맞지 않는 관계에 미련이 없다. 충분히 생각해 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 예전에는 나와 맞지 않는 사람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한번 맞춰가보자고… 끝은 늘 서로 상처뿐인 결말이었다.
우리는 다르다.
다르다는 걸 진심으로 인정하면 삶이 풍성해진다. 그리고 적이 사라진다. 저런 삶이 있구나. 저런 방법이 있다고 받아들이는 일이 많아진다. 그리고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감지하는 능력은 명확해진다. 벌써 4년쯤 되었다. 아는 언니가 나에게 사람을 보는 눈을 길러야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모든 사람을 좋게 보는 시선은 좋지만, 너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태도라고 말했다. 그 언니의 말이 지난 4년 동안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리고 언니의 말대로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감지하자 일상이 편안해졌다.
이제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을 건드리고, 자극하지 않는다. 잘 지내보고자 하거나 오해를 풀려 하지 않는다. 그냥 거리를 둔다.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다니 하고 새삼 깨닫는다. (이전보다 나아졌다) 이전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된다는 건 꽤 기분이 좋은 일이다.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건 멋진 일이기도 하다. 스스로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이 되면 나를 사랑하게 된다.
오늘의 숙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