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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 Dec 11. 2024

응. 너 꺼. 막말 그거 너 꺼.

방어력의 물동이

방어력의 물동이라고 적으면서 웃음이 나왔다. 물동이와 연결시키고 싶은데 어떤 물동이가 좋을까? 생각하다가 엄마가 되면 꼭 장착해야 할 방어력의 물동이로 하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책 '미움' -조원희작가님-


'조원희 그림책작가님'을 좋아한다. 살면서 느꼈을 감정, 생각을 그림으로 유쾌하게 풀어가시는데 그 속에 깊이가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은 《미움》이다. 개성 있는 그림체가 보는 재미를 더해준다.이 책은 지인에게 가장 많이 선물 한 그림책이기도 하다. 《미움》은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순간을 그린 책이다. 미움이 커지고 커져서 내 마음을 삼켜버리는 과정이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그 미움에서 빠져나오는 현명함까지 위트 있게 보여준다. 나는 이 그림책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마음을 배운 마음성장학교에서 '그림책 읽는 어른'의 첫 번째 시리즈로 책을 준비하고 있다. 그때 10명의 작가님들이 각자 3권의 그림책을 골랐는데 나는 《미움》을 골랐다. 내 마음속 BEST 3 안에는 늘 그림책 《미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림책은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는 누군가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심플하게 담고 있다. 나는 이 과정을 깨닫는데 오래 걸렸는데 이 소녀는 정말 빨리 깨달았구나~하는 생각에 어른도 번뜩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준다.


조원희 작가님은 《미움》 외에도 《중요한 문제》, 《근육아저씨와 뚱보 아줌마: 숲》, 《근육아저씨와 뚱보아줌마 : 호수》, 《이빨 사냥꾼》, 《들개》 등 다양한 그림책을 만드셨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  


살다 보면 필연적으로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난다. 내가 마음을 많이 줘서 혹은 기대하는 바가 있어서 '맞지 않은 관계'가 섭섭함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를 알면 된다.


이전에 나는,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면, 상대에게 맞춰왔다. 이건 에너지가 꽤 드는 일이다. 그래서 나에게 집중할 시간이 없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이런 생각이 들지만, 그때는 타인중심으로 살았다는 자각도 없었다) 20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마음에 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때는 ‘관계’라는 키워드에 관심이 많았다. [사람관계], [인간관계] 시간이 지나니 '관계'에 대한 책을 읽기 이전에 '나'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먼저였다는 걸 알았다. '나'를 제대로 모르면 오히려 '나 중심'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갈등이 생긴다. 내가 삶의 중심이 되는 것과 '나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다르다. '나 중심'의 시선으로 보면 모든 것이 상대 탓이 된다. 이 방법은 스스로에게는 심플하다. 순간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살다 보면 오히려 삶이 복잡해진다. 적이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 '나 중심'의 생각은 힘이 되어야 할 아주 가까운 사람들도 적으로 만든다. 내가 20대 때 많이 느꼈던 감정 중 하나는 억울함이었다. 억울함이라는 감정은 나를 미성숙하게 머물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억울함은 내가 나를 이해해주지 않아서 느꼈던 감정이었다. 속 시원하게 "네가 속상한 게 맞지!! 저 사람이 완전 이상해!"라고 생각해 버리면 나는 덜 억울하다. 내가 나를 보호해 주고 이해해 주면 억울함은 줄어든다. 그런데 내가 계속 타인의 말에 동의하고 있으니 내 안의 내가 억울할 수밖에...


그림자


칼 구스타프 융의 '그림자'라는 개념을 만나고 내 것과 상대의 것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심리학 스터디를 하면서 내 그림자에게 말 걸기 (로버트 A존슨, 제리 롤)를 읽었다. 그때 다양한 분들과 함께 '나'에 대해 이야기해 보면서 ‘정신분석’에 흥미를 느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정신분석 대학원에 가겠다고 면접까지 본건 안 비밀...) 이 스터디가 끝나고 '칼 구스타프 융'이라는 분이 더 궁금해졌다. 그래서 융학회에 나오신 박사님께 수업을 수료했는데 알고 보니 이 과정은 현직에 계신 분들이 듣는 듯했다. 일반인이 참석해서 질문을 해도 모두 웃으며 들어주시고 웃으며 답변해 주셔서 편안했던 기억이 있다. 그 뒤로도 김부영 님이 쓰신 '그림자'를 읽으면서 나름대로 내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가장 마음에 와닿는 말은 '그림자는 투사된다'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타인의 거슬리는 행동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타인의 행동이’ 왜 거슬리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나를 만나가는 과정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가벼운 부분을 예로 들자면 이런 거다. 오래된 친한 친구 모임에서 자꾸 큰 소리로 말하는 친구가 거슬렸다. 목소리 자체가 큰 게 아니라 자꾸 크게 말하는 거다. 그 친구가 왜 거슬리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쟤가 왜 거슬릴까?' 생각해 보니 나도 모임에서 주목받고 싶어 하는 면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내향적 I 지만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는 웃기고 싶은 욕구가 높다. 그래서 내가 말할 기회를 잡으려고 하는데 그 친구가 분위기를 주도하자 불편했던 것이다. 지금이야 웃겨주는 사람이 있다면 너무 좋지만 그때는 내가 가장 웃기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도 높았다. 그것을 깨닫자 그 자리가 아주 편안했다. '아 네가 지금 웃기고 싶어서 이 상황이 불편하구나? 그러나 타이밍은 많아. 저 친구가 좀 잠잠해지면 그때를 노려보자' 하고 말이다. 마음은 생각보다 유치하다. 유치한 나를 인정해 주면 편하다. 여기에 쓸 수 없는 조금 더 찌질한 나를 만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불편한 그림자를 만나고 나중에 든 감정은 '후련하다'라는 감정이었다. 우리가 비밀을 가지고 있을 때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불편해진다. 하지만 그 비밀을 먼저 공개하고 나면 자유로워진다. 나만 아는 것인데도 자유를 느낄 수 있던 것이 '그림자를 만나는 과정'이었다.


나의 욕구를 알면...


나의 경우, 내 욕구와 감정을 알게 되니 다른 사람의 것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뒤죽박죽 섞여버린 불편한 감정에서 내 감정을 빼니 상대의 감정이 보일 때도 있었다. 예를 들면 하나의 바구니에 콩과 좁쌀이 섞여 있을 때는 어떤 것이 더 많은지 구분하기 어렵다. 그럴 때 콩과 좁쌀을 분리하면 누가 더 많은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이것을 분리할 때 채에 걸러내는 방법도 있고 콩만 골라내는 방법도 있다. 둘 다 콩을 먼저 거르는 방식이다. 크고 선명한 콩을 먼저 건져내야 한다. 콩은 '나의 감정'이고 좁쌀은 '상대의 감정'이다.


예전에는 '불편한 상황'이 생기면 우선 내 탓부터 했다. 정확히 말하면 '내 탓, 니 탓'을 번갈아가며 했다. '내가 이 관계를 더 좋게 하기 위해 이런 것들을 했어야 했어'라고 생각하며 자책하다가도 상대가 미워졌다. 하지만 내 감정을 알고 나니 오히려 당당해졌다. '선을 넘었고만?' 하고 말이다. 그때 바로 상대에게 신호를 줄 수 있다. 그러면 생각지도 못하게 선을 넘은 상대도 얼른 알아차리고 관계를 조율하게 된다. 대부분은 이런 방식으로 관계를 잘 조율한다. 그러나 가끔 신호를 줘도 못 알아차리는 사람이 있다. 그럴 때는 차단한다. '나한테 맞는 사람은 아니네...' 하고 말이다. 나는 이럴 때 '나도 안 맞겠지만 상대도 내가 안 맞겠지' 생각해 버린다. 그럴 때 상대의 무례를 받지 않게 된다.


방어력의 물동이


요즘은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판단한다. '아, 이 사람은 사람을 이렇게 대하는구나'라고 말이다. 하지만 스스로의  판단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피곤한 에너지를 전달하고 싶지 않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내 부정적인 에너지에 반응하는 상대의 에너지를 받고 싶지 않다. 그 사람이 나를 무시하도록 둔다. 그것이 내 나름대로의 복수다. (나만 아는 복수닷!!) 무례한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예민함을 다루지 못해 상대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가시를 다루지 못해서 상대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상처받았던 지난 세월을 지나 이제는 '다루지 못한 상대의 마음'들이 보인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그들이 더 힘들어 보인다. 다루지 못한 예민함은 스스로를 피곤하게 한다. 보듬어 지지 못한 가시는 주변 사람을 밀어내고 쓸쓸한 삶을 살게 한다. 다루고 보듬는 건 결국 나의 몫이다.


사회생활을 할 때 방어력은 중요하다. 올바른 방어력은 나도 상대도 지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 덕분에 방어력을 키울 수 있었다. 아이와 나에게 무례한 사람을 한번 손절해 보는 것은 내 인생에서 큰 이벤트였다. 그러자 용기가 생겼다. '나를 지킬 용기'말이다. 아이들도 알게 모르게 엄마의 방어력을 배운다. 나를 지키는 방어력은 아이가 자존감을 키워가는데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면 나를 공격하는 것들로부터 나를 지켜줄 수 있다. 나를 사랑하면 나를 함부로 대하는 말, 태도, 행동, 사람을 수용하지 않게 된다. 나를 사랑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응, 그거 너 꺼. 막말 너 꺼. 반사. 네가 없어도 나는 괜찮아"


조금씩 야금야금 참다 보면 나는 야금야금 사라진다. 내가 공유하고 싶은 태도는 소통불능의 태도와는 다르다. 스스로를 지키는 선에서 상대의 무례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상대를 무시하는 태도’와 ‘나를 지키는 방어의 차단’은 방향부터가 다르다. 많은 엄마들이 ‘나도 지키고 상대도 지키는 방어력’을 키워갔으면 좋겠다. 나도 현명한 엄마들을 보고 계속 배우며  현명한 방어력을 마구마구 키워가고 싶다. '현명한 방어'가 가능할 때 더 따뜻한 사회가 된다고 믿는다. 나만 생각하면 절대 할 수 없는 것이 '나도 지키고 상대도 지키는 방어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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