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올 때 나를 힘들게 했던, 그 놈의 운전
말 그대로입니다. 운전해야 제주도 생활이 가능합니다. 자동차로만 등교가 가능한 거리에 집을 구했거든요. 남편 없이 운전해 본 적이 없는 20년 장롱면허라, 제주도에 오기 전 마음의 압박이 심했습니다. 집을 구할 때만 해도 내심 도보로 등원할 수 있는 집과 계약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때는 제주도 감성보다 등교가 중요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학교와 가까운 매물이 갑작스런 이슈로 거래불발이 되고, 학교와 멀리 떨어진 집을 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동산 계약을 할 때부터 운전을 결심했습니다. 제주도에 집을 구하고 부산으로 돌아간 뒤에도 한동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해버리면 그만인 것인데, 생각이 무겁게 마음을 짓누를 때가 있습니다. 저에겐 운전이 그랬습니다.
제주도로 이사를 하고 이틀은 주말이었고, 이틀은 둘째가 유치원에 가지 않는 날이었습니다. 주문한 가구들이 집으로 도착하고, 조립해야 할 물건들이 한가득이라 4일 동안은 운전연습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둘째가 유치원에 가자마자 운전을 시작했습니다. 그냥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겁난다'라는 감정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첫날에는 아이들을 태우지 않았고요. 둘째 날부터 아이들을 태웠습니다. 운전하지 않으면 남편이 부산에 갔을 때 등하교를 못 한다는 사실이 겁쟁이를 운전하게 했습니다. 제주도에 온 이유 중 하나가 운전을 마스터하고 싶다는 생각이었으니까요. 다짐과 다르게 도전하기 전까지 겁이 났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운전 연습을 시작하자 저를 짓누르던 무거운 마음들이 해소되었습니다. 확실히 제주도는 운전하기 편했습니다.
제주도에서 운전을 시작하기 쉬운 이유는 3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제가 있는 동네를 진입하면 대부분 속도제한 구간입니다. 그래서 자동차들의 평균 속도가 30입니다. 속도가 빠르지 않으니 끼어들기와 회전교차로 진입과 주차만 연습하면 주행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두 번째로 저와 같은 운전 실력자가 부산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시골이라 나이가 많으신 분들도 대부분 운전하십니다. 초보자로서, 양보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 여유롭게 그들을 기다리며 용기도 얻습니다. 세 번째로 차들이 많지 않습니다. 진입이 어려울 때 밀려드는 차들이 없으니, 최적의 타이밍을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덧붙여보자면, 부산보다 운전자들이 여유롭습니다. 조금 느리거나, 실수를 해도 아무도 크락션을 누르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운전이 익숙해지는 것이 목표였으니, 이 상태로 매일 운전대를 잡는 것이 저의 도전 과제입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또 하나의 도전 과제를 완수했습니다. 바로 남편 없이 운전하기입니다. 도전을 한 날은 토요일이었고, 긴 연휴 나들이로 모두 지친 상태라, 가족이 모두 집에 있기로 한 날입니다. 남편은 자동차를 씻고 잔디를 깎는 등 할 일이 많은 날이었습니다. 평소에 운전까지 남편의 몫이었지만, 이 날은 혼자서 분리배출을 하러 나가보기로 합니다.
스레드에서 많은 분들의 응원을 받으며 첫 혼자 운전에 도전했습니다. 첫 혼자 운전은 예상하지 못한 일로 가득했습니다. 제주도는 정해진 곳에서만 분리배출이 가능합니다. 클린 하우스라는 앱을 깔아서 오늘 배출 가능한 재활용품을 볼 수도 있고, 재활용 도움 센터에서 모든 종류의 재활용을 한 번에 분리배출을 할 수도 있습니다. 제주도로 이사 와서 우리 가족이 자주 가는 재활용 도움 센터는 평소에 한산해서 초보도 마음 편히 주차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날도 편안한 마음으로 재활용 도움센터로 진입하였습니다. 그런데 입구 일방통행 길에서 역주행하는 차를 두 대나 만났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초보가 가장 잘하는 멈춰서 기다리기로 하며 그 위기를 모두 넘겼습니다. 두 번의 위기 끝에 재활용 도움센터에 진입했고, 그 후 처음 보는 풍경에 입이 벌어졌습니다. 자동차가 빈틈없이 꽉 들어차 있었습니다. 넓은 재활용 도움 센터 주차장이 자동차로 가득 차 있었고 (정말로 가득이요) 제가 주차할 수 있는 장소가 없어 나가려던 찰나에 차가 한 대 나가면서 유일한 한 자리가 생겼습니다.
얼른 후진을 넣고 차를 대려 하자 재활용 도움 센터 관리하시는 분이 여기는 차를 대면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창문을 열어 제 모습을 보여주니 "아 쓰레기 버리러 오셨어요?" 하십니다. 알고 보니 제가 혼자 운전을 한날 주변에서 결혼식이 있다고 합니다. 다들 차려입은 가운데 트레이닝 복을 입고 집게 핀으로 머리를 올리고 창문을 내리니, 재활용 도움센터장님(?)은 단번에 제가 분리배출을 하러 온 사람이라는 걸 눈치채십니다. 다행히 주차하고 음식물 쓰레기와 플라스틱, 비닐, 종이류 등을 배출합니다.
분리배출은 끝났지만, 저에게는 미션이 하나 더 남아있었습니다. 바로 종량제봉투 50l를 3장 사 가는 것입니다. 편의점에 차를 댈 자신이 없어 일단 후다닥 뛰어서 재활용 도움 센터 입구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요. 편의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또다시 후다닥 뛰어 차에 탔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편의점을 검색했습니다. 가까운 편의점으로 도착지점을 찍고는 '여기서 나가자'는 생각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처음 든 생각은 '못 사면 그냥 가지 뭐. 큰일 안 나'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든 생각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라는 생각입니다. 무라도 썰기 위해 편의점이 보이자, 편의점 앞에 비스듬히 차를 댔습니다. 나가는 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요. 차를 대자 앞쪽에 주차하셨던 트럭 아저씨가 제 차를 힐끔 쳐다봅니다. 아주머니도 힐끔 쳐다보시더라고요. 괜히 내려서 트럭 아저씨께 "저 이렇게 차 대어도 돼요? 초보라서요"라며 불필요한 말을 건네봅니다. 허락받을 필요도 없는데 혼자 찔립니다.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아 잠시 대는데 괜찮죠"라고 합니다. 조금은 편안해진 마음으로 편의점으로 들어가서는, 헐레벌떡 종량제 봉투를 사서 차에 시동을 걸었습니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는데 죄를 지은 듯 다급해집니다. 비스듬하게 차를 대놓아서 크게 돌려는 찰나, 차를 돌아야 하는 입구에 어떤 할머니가 삼발이 오토바이를 대십니다. 창문을 내려서 "혹시 얼마나 걸리시나요?"라고 여쭤보니 "금방 가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브레이크에 발을 올리고 주차 모드로 변경한 후 할머니를 기다립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할머니가 나름의 다급한 발걸음으로 생수 12통을 들고 나오십니다. 그렇게 서두르실 필요도 없는데 말이지요. 할머니가 가시자 또다시 제 도전의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일단 사거리에 차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혼자서 회전목마가 돌듯 천천히 크게 돌아 무사히 내비게이 위에 그려진 길로 정확히 차를 올려놓았습니다. 시골이라 가능했다며 방금 전의 느린 회전을 냉정하게 평가해 봅니다.
내비게이션은 편의점을 벗어나 인적 드문 골목으로 길을 안내했습니다. 이전에 남편과 가본 적 있는 길이라 주변을 살피는 시늉을 하며 여유롭게 운전을 해봅니다. 시속 10km로 가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골목인데 현무암으로 쌓은 돌담과 짙은 갈색의 흙, 파릇한 잎들을 사이를 운전하니, 혼자 베스트 드라이버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집니다. '풍경을 보면서 운전을 한다는 것이 이런 걸까?' 하고 잠시 생각해 봅니다. 다시 돌이켜봐도 멋진 순간이었습니다. 이내 한가한 골목을 지나고 큰 골목을 또 만났습니다. 비보호 도로지만 4차선이라, 왼쪽을 먼저 살피고 오른쪽을 살핀 후 빠르게 액셀을 밟아 비보호의 강물을 건너봅니다. 안전한 구간에 진입하자 그제야 긴장이 풀립니다. 왕복 10분~15분 거리를 35분 정도 걸려 다녀왔지만 왜인지 뿌듯합니다. 집으로 진입하는 순간 위풍당당한 BGM이 머릿속에 깔립니다. 잔디 깎던 남편은 저의 등장에 양팔을 벌려 환영해 줍니다. 그리고 운전을 위임할 수 있다는 기쁨 때문인지, 주차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자동차 앞에서 파닥거리며 제 주차를 방해했습니다. 덕분에 마지막 주차는 멋있지 못했지만 나름 뿌듯한 도전이었습니다.
이제 남편이 부산으로 출장 가도 아이들은 태워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조금은 안도감이 듭니다. 제주도에 잘 적응 순항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