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갸, 우리 커피 원두 다 떨어졌어. 새로 사야 할 것 같아."
이른 아침, 마지막 커피 원두를 그라인더에 담으면서 남편을 향해 말했다. 남편은 나를 돌아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면서 대답했다.
"문제는...? 경제다!!!"
가정경제 상황이 좋지 않으니 아껴 쓰라는 말인가 싶지만 사실 남편은 패러디를 하고 있었다. 대통령 선거 패러디. 난 단번에 웃음이 터져서 킥킥 거리기 시작했다. 지난 대선 이후로 남편은 대통령 선거 포스터를 패러디하는데 재미가 들렸다.
지난 4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집 앞에도 선거용 포스터가 붙었다. 남편은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자기야. 포스터 봐. 프랑스에는 이런 거 없어. 길거리 유세도 하지 않아. 한국은 신기해. 이 사람은 오른쪽이지? 이 사람은 새누리당? 여기 없어지지 않았어? 그런데 곰돌이 봐. 뭔가 불쌍하게 생겼다. 이 사람은 통일이 답 이래. 그리고 이 사람은 군인인가 봐. 진짜 보수? 이거 진짜 conservative 란 뜻이야? 와.. 프랑스에서는 이렇게 보수라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 절대 없어. 보수인 거 다 알지만 절대 보수라고 말하지 않아. 신기하다 신기해."
남편은 각 후보들에 대한 질문과 의견들을 쏟아대더니, 포스터에 적힌 한국말들을 외웠다. 그리고는 틈만 나면 써먹기 시작했다.
"자기야, 이거 여기 거는 게 낫지 않아?"
"아니 난 여기가 좋아. 자기 센스 없어."
"아니, 아니라니까. 진짜 우리 생각 너무 달라."
액자 거는 위치를 가지고 옥신각신 하다가 남편이 내뱉는 한마디.
".... 문제는... 통일이다!!!"
빵 터진 나는 웃다가 마음대로 하라고 내버려두고 말게 된다.
하루는 저녁 약속이 생겨서 딸아이와 혼자 있을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에 저녁식사와 이유식을 준비하고 집안 청소를 해두었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이 말했다.
"이거 다 나를 위해 준비한 거야? 자기 정말... 진짜 보수야!!!"
"헐... ㅋㅋㅋㅋㅋ"
남편을 위해 밥상을 준비한 부인에게 정말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에 젖어있는 보수적인 여자라고 비난도 아니고 그렇다고 보수라 하니 칭찬도 아닌 것 같은 결론을 지어버렸다. 아무튼 난 또 빵 터졌다.
게다가 고리타분한 한국식 표현은 어디서 배워오는지, 아니 대체 어떤 한국 사람들이 알려주는지.
"난 바깥양반이니까 바깥을 청소할 거야. 자기는 안사람이니까 안에서 설거지 해. 알았지~?"
"어휴 이 프랑스 양반 보소. 자기도 진짜 보수야~~~"
한국말 잘하는 프랑스 남자와 살다 보면 재미있는 일이 종종 생기는데 지난 대선은 두고두고 웃음을 줄 것 같다. 어쨌든 내 남편은 가정을 가정답게! 든든한 서방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