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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리 Jun 27. 2017

내 마음속 행복은 짓밟을 수 없다

재건축을 저지하기 위해 벽화를 그리기로 했다.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이야기하자고 했다. 하지만 냉정한 현실은 기다렸다는 듯 나의 소망을 짓밟기 시작했다.


조합 무효소송의 선고가 내려지고 재건축을 반대하는 우리는 패소했다. 조합은 법적으로 인정을 받은 셈이 되었고, '조합 측 승소'라는 플래카드를 마을 입구에 걸어 우리를 조롱했다. '수익률이 낮아 어떤 기업도 재건축 사업에 참여하지 않을 거다'라는 게 우리의 가장 현실적인 희망사항이었다. 그러나 롯데는 입찰에 참여했고, 사업자로 선정되었다. 우리의 실낱 같은 희망을 비웃는 듯 재건축은 더욱더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렇게 마음이 지쳐가던 어느 날, 롯데건설 직원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주민들을 설득하기 위한 작전임이 뻔했다. 부드러운 듯 능글맞은 웃음을 띈 그녀를 향해 재건축에 동의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그리고 이 구역에서 추진되고 있는 재건축 사업의 문제점을 몇 가지 지적했다. 내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서 건설사는 "저희가 다 해결할 겁니다."라는 동일한 답만 반복했다. 무슨 방법으로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건지 설명은 없었다. 그저 '저희만 믿어주세요.'라고 반복하는 앵무새 한 마리와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이런 게 대기업의 힘인가. 그래 구청에서 사업시행을 인가하고 말게 뻔하다. 나는 자본의 힘 앞에서 다시 한번 좌절하고 말았다. 


또 하나 기운 빠지는 일이 생겼다. 벽화 그리기를 도와줄 사람들을 수소문하면서 도시재생사업에 잔뼈가 굵다는 한 아티스트와 전화통화를 하게 되었다. 그녀는 나의 소망은 덧없는 것이라고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이 지역은 강남이고 수익성이 있으니 결국 시행되고 말 것이라며. 


"그래서, 어린이날에 가면 뭐 하고 계시는 거예요? 머리에 띠 두르고 구호 외치시는 건가요?"

"아뇨, 그건 아니고요. 벽화를 그리면서 저항을 하려고요. 질 가능성이 높은 싸움일지라도 우리 목소리를 내고 싶었어요. 그리고 우울하지 않게 즐겁게 하고 싶었어요." 

"아, 네. 동네 주민들하고 떡 돌려먹고 하시면 되겠네요."


그녀의 대답은 나를 가장 슬프게 만들었다.


우리에겐 삶의 터전이 달린 문제고 가족의 추억이 사라지는 아픔이다. 무엇보다 주거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가 아닌가? 어찌 이 나라는 헌법에서 정한 권리가 이토록 쉽게 침해당한단 말인가. 우리 삶의 터전이 누군가의 수익을 올리는 일에 이용당하는 현실이 즐거울 리가 없고 내 집을, 내 터전을 지키고 싶은 마음은 지푸라기 잡듯 간절했다. 떡 돌리듯 기뻐할 일이 아닌데 그녀는 왜 그렇게 표현했을까. 혼란스럽고 참담했다. 

이 싸움에서 우리는 질 수밖에 없는 소수의 약자이지만 한편 그 조차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봤자 강남인데, 크게 손해 보는 거 없잖아 라는 듯한 시선. 


"아티스트 초대는 집어치우자. 우리끼리 해."


그렇게 우리끼리 벽화를 그리자고 결심했다. 그리고 2017년의 어린이날은 왔다. 


친구들과 우리 가족은 그림을 그리고 각자 준비해 온 음식을 나눠먹으며 기뻐했다. 벽화를 그리는 아이들의 표정은 행복에 넘쳤고 지켜보는 어른들도 행복했다. 문득 그림 그리기가 상처를 치유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 순간 내 안의 화는 사라지고 없었다. 붓을 들고 벽에 색을 칠하는 순간 마음은 평온 그 자체가 되었다. 다음날에도 못다 한 그림을 마무리하며 그렇게 며칠 동안 벽화를 그리는데 시간을 보냈다. 그 사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벽화 그리기를 도와주는 사람들도 생겼고, 그분들은 우리에게 감사와 감동을 남겨놓고 떠났다. 


그 날 이후로 남편과 나는 매일 저녁 테라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들 그림 좀 봐. 마고의 나비. 알마의 꽃과 무지개. 훈이의 자동차. 우경이네 나무들. 아델라 부부와 시카고에서 온 클로이 커플의 개성 강한 그림들. 그리고 보니 우리 어린이날 너무 행복하지 않았어? 저 양귀비 꽃과 고래는 어떻고! 지금 이렇게 평화와 행복이 가득 그려져 있네. 기쁨, 개성, 평화, 행복, 사랑, 희망. 우리가 원하는 것이 다 여기 있잖아. 멋지다." 

"그러게. 우리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있잖아...  요즘 재건축 때문에 며칠 우울했어. 그런데 덕분에 벽화도 그리고. 그래서 너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 집이 사라지고 아파트가 들어서고 나면 재건축을 찬성했던 사람들 마음속에는 뭐가 남을까? 돈은 벌겠지만 절대 우리보다 행복하지 않을 거야. 우린 이 집을 떠나더라도 이렇게 계속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어디서 살던지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계속 찾을 테니까. 그렇지?"


나의 말이 끝나자 남편은 아주 멋진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이렇게 계속 웃자"라고 말했다.


이 잔인한 현실과의 싸움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상식을 벗어나 돈만 좇으며 사는 사람들과 그들이 매몰되어 가고 있는 시스템에서 한 발 물러서서, 이에 동요되지 않는 단단한 마음을 만드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세상은 비록 내 마음 같지 않지만 그렇다고 크게 슬퍼할 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세상과의 싸움에 최선을 다하되 슬픔 감정에 빠져 지낼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과 반대로 가기에 늘 지는 게임을 하는 듯 하지만 결국 행복한 사람들은 우리다. 때문에 이 게임에서 우리는 영원한 승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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