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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 Apr 26. 2019

욕망을 잃으면 껍데기여라

오카자키 쿄코 <리버스 에지>

일본 만화를 소년(남성) 만화와 소녀(여성) 만화로 양분해서 본다면, 언제나 소년 만화의 득세였다. 일본 만화 잡지의 빅 3는 '소년 점프', '소년 매거진', '소년 선데이'였다. 이들이 50년대 후반에 창간을 시작할 때, 소녀 만화는 기껏해야 종합 소녀지의 개별 코너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일본 만화는 소년=남성의 욕망에 더 충실한 시장이었다.


물론 소녀 만화 역시 긴 역사를 타고 오며 최대한의 발 돋음을 감행했다. 특히 <에이스를 노려라>의 야마모토 스미카, <베르사유의 장미>와 <오르페우스의 창>을 그린 이케다 리에코, <11인이 있다>의 하기오 모토 등의 작가들이 액션 스포츠, 본격 사극, SF 등의 작품들을 충실히 쌓으며 소녀 만화라는 틀을 점차 넓혀왔다. 하지만 이는 언제나 '소녀 만화의'라는 수식어를 달아야만 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이미 소년 만화에서는 당연히 사용되어 온 범주를 한 발 늦게 소녀 만화의 세계에 설치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 작가들이 일본 만화 내에 끼친 영향력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업적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천재성과 노력으로도 소녀 만화가 소년 만화를 앞지르는 일은 매우 힘에 부쳤다.


이 배경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20세기의 소비 주도가 남성 위주였다는 것이 결정적인 영향이었을 것이다. '남성의 소비 주도'는 당연히 근대의 한계였다. 20세기 이전에는 대부분의 문명사회가 여성에게 경제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서구의 여성 참정권 획득 이래 이제 막 획득하게 된 '여성의 경제권' 만으로는 이 기울어진 경사를 헤쳐 나가기 어려웠다. 시장은 남성의 욕망을 분출하는 것을 매우 당연시 여긴 채 그 몸집을 불려 왔다. 특히, 여성의 소비는 가정 내의 필요조건이라고 막연히 분류하고 있던 당대의 시장이 여성의 취미 활동까지 그 영역을 상정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현재 일본의 젠더관에 비추어 상상하자면, 더욱더 답이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욕망의 대리 분출구가 되어줘야 할 '소녀 만화'는 근원적으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소녀 만화는 다양한 방식의 장르로 분화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표면적 탐미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독립적으로 강한 여성이 등장하였던 그 순간에도 그들은 '더 아름답게'를 부르짖었다. 체력의 한계까지 테니스 라켓을 휘두르는 여성마저 호리호리한 '이상적인 몸매'로 그려졌다. 가슴속에 야심의 불꽃을 품은 여성조차도 꽃과 함께 등장하며, 스스로를 '꽃'의 위치에 배치하였다. 소비자로서의 주체성이 정확히 확립되지 못했던 여성들은 사회가 가지고 있던 젠더적 고정관념을 재사용해야만 했던 것이다. <11인이 있다>의 프롤이 '사랑을 이루기 위해' 여자를 선택한다는 딜레마가, 지금의 시대에선 아름다움보다는 씁쓸함으로 읽힌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럴 순 없었다. 70년대를 거쳐 80년대에 도래한 일본의 성장은 서구사회 전반이 경계해야 할 만큼 놀라운 것이었다. 일본 전역에 꿀처럼 흐르던 자본이 오직 남성의 소비만으로 해소될 리는 없었다. 끝없는 경제 성장은 당연히 여성에게도 소비 주체의 아이덴티티를 일깨우기 시작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문화 전반이 변모를 감행해야 할 시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때 나타난 것이 바로 오카자키 쿄코다.


오카자키 쿄코, 그리고 그를 위시한 '일본 뉴웨이브 여성만화'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소비적 욕망을 완전히 제하고 말할 수는 없다. 뉴웨이브 여성 만화의 특징은 욕망의 직접적 가시화다. 이 만화 안에서 여성들은 매우 직접적으로 소비와 섹스를 말한다. 여전히 탐미적인 작화를 가지고 있지만, 서사는 탐미의 이면에 있는 썩은 내면을 그려 데카당스를 이룬다. 오카자키 쿄코가 만화를 통해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그로 인한 스스로의 파괴다.


공교롭게도 뉴웨이브 여성 만화가 등장한 이래 일본의 버블 경제는 붕괴하기 시작한다. 오카자키 쿄코가 왕성한 활동을 보인 80년대 중후반~90년대 초반은 처참한 경제적 파괴가 이루어진 시기다. 오카자키 쿄코는 정확한 후각으로 파멸의 냄새를 읽었다. 나는 그가 반복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그린 이유를 버블의 붕괴에 있다고 해석한다. 고도성장을 통해 최대한의 욕망을 만들어 온 일본 사회는, 경제 붕괴를 통해 그 욕망을 채울 수 없는 상태에 도달했다. 버블 붕괴 이후의 일본 사회는 끊임없는 허기에 몸부림쳐야 했다. 특히, 이제 막 소비 주체로써의 자아에 눈 뜬 여성들이 느꼈을 공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지 않았을까?


<리버스 에지>가 묘사하는 일본은 정확히 그 사회의 풍광이다. 이 안에는 여럿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들 중 자신의 욕망에 정확히 맞닿는 인물은 단 한 명도 없다. 게이인 야마다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말조차 걸 수 없고, 모델인 요시카와는 넘치는 식욕을 만족스럽게 해결하지 못한다. 간논자키는 하루나를 마음에 두고 있지만 그로부터 냉대만을 받고, 루미는 간논자키를 원하지만 오직 몸만을 섞을 뿐이다. 이들 중 자신의 욕망을 마음 편하게 포기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도리어 비대해져 가는 욕망을 해소하지 못해 대리 분출할 대상을 찾아 헤맨다.


욕망이 삶을 향한 에너지라고 한다면 이들은 생의 세계와 사의 세계 중간 어딘가를 떠도는 유령과도 같다. 공교롭게도 이들이 다니고 있는 학교에는 항상 소문들이 떠돈다. 당연히 이 소문들은 개별 혹은 집단의 욕망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으며, 떠도는 그 모습 역시 마치 유령과도 같다. 유령은 또 다른 유령을 낳고, 인간의 삶에 기생한다. 욕망을 채우지 못한 유령들은 또 다른 유령에 자극받아 스스로를 유령의 상태-채우지 못할 욕망을 갈구하는 상태로 방치되어버린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완전히 죽어버린 자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야마다는 자신이 발견한 시체를 하루나에게 소개하며 이렇게 말한다.


"왠지 이 시체를 보면 안심이 돼. 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언제나 헷갈리는데. 이 시체를 보면 용기가 나." (64~65p)


야마다에게 시체는 욕망이 소진된 형태다. 갈구하는 욕망을 채우지 못하는 상태가 유령이라 한다면, 시체는 그 유령마저 소진해버린 상태를 뜻한다. 야마다는 그런 시체를 보며 자신이 삶을 유지하고 있음을-아직도 무언가를 열망하는 자신이 있음을 확인하며 안심한다. 그러나, 그와 함께 시체의 비밀을 공유하던 요시카와는 시체를 발견했을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저는요. 꼴좋다고 생각했어요. (...) 세상 사람들 다 예쁜 척 멋진 척 즐거운 척하는데 웃기고 자빠졌네. 까불지 마. 정신 좀 차려. 나도 그렇지만 네놈들도 도망칠 곳은 없어, 꼴좋다. 뭐, 이랬어요." (113p)


요시카와는 시체로부터 다른 존재를 본다. 요시카와에게 있어 시체는 이 세상에 범람하는 인간 군상의 심벌이나 다름없다. '죽어있음에도 묻히지 못한 존재'가 욕망을 채우지 못한 유령들과 등치 되는 것이다.


야마다와 요시카와는 시체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지만, 거울처럼 시체를 본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공허한 유령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유이한 존재가 된다. 그 두 인물이 다른 유령들과 달리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끊임없이 발산하는 이유는 거울을 통해 근원적 갈구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발견하지 못한 간논자키, 루미, 다지마, 루미의 언니는 그들의 세계에 도래하지 못한다. 그래서 끝도 없이 욕망의 대상을 추동하고 그 간극을 좁히지 못하자 결국 파괴적인 방식을 사용한다.


이 안에서 가장 기이하게 작동하는 것은 바로 주인공인 하루나이다. 하루나는, 그 무엇도 욕망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야마다를 그 대상으로 선정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것이 갈증이었다고 한다면, 그는 목을 축이기도 전에 끝이 나버린 존재다. (야마다 "나 동성애자야. 게이나 호모, 오카마나 변태라고 하지."(19p)) 하루나는 야마다/요시카와의 세계에 간섭하며, 눈을 감은 유령인 간논자키를 구차하다 판단한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욕망이 부재-하거나 감지하지 못-한 하루나는 감정적 충만과 육체적 충만을 등치 하며 끝없이 들이대는 간논자키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리버스 에지>는 야마다/요시카와가 하루나에게 자신들을 투영하려는 게임과도 같다. 다만 시체로부터 서로 다른 것을 본 두 사람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뿐이다. 동물의 죽음을 비웃고, 새로운 시체의 발견에 흥분하는 요시카와는 공허한 이 세계에서 유령으로 즐기길 바란다. 요시카와는 욕망 메터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인물이기에, 음식(욕망)을 채운 뒤 순식간에 게워낸 후에 하루나에게 고백한다. 이 장면이 숙련자의 교육처럼 보이는 것이 과연 착각이었을까? 요시카와는 하루나자신과 마찬가지로 욕망의 감각적 흥취만을 정확히 갈무리하며 살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탓인지 요시카와는 간논자키를 진정시키기 위해 거짓 고백을 하고 끝내 섹스까지 받아들인 하루나를 포기하듯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언니였구나?'일까?


그와 반대로 야마다는 모든 상황이 종료된 뒤에 마을을 떠나려는 하루나에게 고백한다. 대화는 다음과 같다.


"살아있을 때의 다지마는 하나도 좋지 않았어. (...) 그래도... 새까맣게 타버린 다지마는... 죽어버린 다지마는 정말 좋아."
(...)
"... 야마다는 까맣게 타지 않으면 사람을 좋아할 수 없어?"
"그렇진 않아. 나는 살아있는 와카쿠사(하루나)가 좋아. 정말이야. 와카쿠사가 떠나서 정말 슬퍼." (232~233p)


'죽어있는'이 결국 욕망을 채우려는 의지마저 불사르고 소진된 상태를 말한다고 한다면, 야마다는 하루나에게 자신의 욕망을 가지라고 종용하는 셈이다. 야마다는 하루나의 욕망을 보지 못(거나 눈치 채지 못)했다. 결국 야마다의 시야에서 하루나의 욕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야마다에게 있어 하루나는 삶도, 죽음도, 유령도 아닌 규정할 수 없는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파멸적인 선택을 할 것이 명백한 간논자키를 필사적으로 잡은 하루나에게서 생을 본 것일지도 모른다. 오직 욕망하거나 파괴만을 일삼는 이 세계에서 하루나는 유일하게 타인의 파멸에 개입한 인간이다. 어쩌면 야마다는 하루나를 통해 욕망과 소진이 아닌 또 다른 생이라는 일면을 확인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하루나는 야마다 버려진 고양이라는 매개로 묶인 존재이기도 했다.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빌미로 새끼 고양이를 죽이는 자들과, 그런 고양이 시체를 보고 즐거워하는 이가 즐비한 이 세계에서 하루나만이 오직 그와 생에 대한 관점을 나눈 존재였다는 사실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하루나가 떠나기로 한 날, 야마다와 하루나는 일전에 시도해봤지만 실패했던 UFO 부르기를 다시 한번 시도한다. 그 방법이라 봐야 그저 오기만을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다. 물론 애시당초 올 리가 없는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다. 무의미한 바람. 하지만 그것은 애당초 오지 않을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다른 열망들과 달리, 이 열망은 바라는 행위 그 자체에 몰두하게 되니까. 욕망이 파멸로 이어지는 이유는 그것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가 존재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욕망해도 가질 수 없는 것-UFO-을 바라는 것이 파괴로 굴러 떨어지지 않는 삶을 사는 방법이었던 것 아닐까. 그저 그 어떤 유령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뿐 일지도 모르겠다.




첨언. 이 만화의 마지막 페이지는 요시카와 고즈에의 모습으로 장식된다. 작품의 감정적 마무리가 야마다와 하루나에게 설정되어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는 매우 이상한 선택이다. 마치 그의 유령 관찰이 앞으로도 더 이어질 것 같다는 불안감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이 궁금증에 대해서는 오카자키 쿄코의 또 다른 명작 <헬터 스켈터>가 답해준다. 요시카와 고즈에의 '모험'을 더 보고 싶으신 분이 또 있다면 함께 <헬터 스켈터>의 정식 출판을 열렬히 망해줬으면 좋겠다. 뭐, UFO가 오는 것보다는 확률이 높지 않겠는가.


* 본 글은 디지털 만화 규장각 리뷰 페이지( 링크 )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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