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엠 어 히어로> vs <컨테이전>
코로나19로 스티븐 소더버그의 <컨테이전>에 대한관심이 갑자기부상한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컨테이전>은 팬데믹이라는 국면을 현미경으로 꿰뚫듯 유심히 관찰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이제와 이 영화를 찬찬히 훑어보면 기시감을 일으키는 이미지들이 산재해 있음이 눈에 보인다. 문제는 <컨테이전>의 짝이 될 만화를 찾는 일이었다. '질병'과 만화는 이상하게도 강하게 연계되지 않는다. 물론 많은 만화들이 치명적인 유행병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이 팬데믹 국면의 엄밀함과 연결되는 일은 드물다. 이미 커다란 재앙이 지나간후를 다루거나(《Y 더 라스트맨》, 《7 SEEDS》), 감염자의 변이라는 매개를 통해 다른 장르를 향해 나아가거나(좀비 혹은 유사 좀비를 그린 작품), 최악의 경우 코미디의 소재로써 전유하거나 한다.
하나자와 켄고의 《아이 앰 어 히어로》는 그중에도 대중의 움직임, 시스템의 반응, 개인 단위의 상황인지를 전면에 내세우며 시작한 작품이다. 물론 그 양상은 <컨테이전>의 엄밀함과는 꽤나 거리가 있는 편이나, 도리어 그러한 간극이 두 작품을 맞대어 보고 싶게 만든 동기가 되었다. 영화의 질병과 만화의 질병, 그리고 그에 대한 개인과 시스템의 반응과 반목에는 분명 무언가 있지 않을까.
만화와 영화 중 무엇이 더 시각적인가? 물론 이러한 질문이 무의미하다고 여기는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황을 좁혀 보자. 위협과 죽음에 대해서라면 어느쪽이 더 시각에 의존할 것인가? 질병이라는 무형의 공포에 대해 두 매체는 각기 다른 답을 내놓는다.<컨테이전>과《아이 앰 어 히어로》는 근본적으로 질병의 시각적 발현을 달리하고 있다. 이는 두 작품에 국한된 구분은 아니다.
이를테면 볼프강 페터젠의 1995년 작 <아웃브레이크> 같은 팬데믹 영화에서도 시각적 징후는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좀 더 올라가 외계 미생물의 침입을 막는1971년 실험실 영화 <안드로메다의 위기>에서도 그렇다. 이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질병이 도달할 최종점, 죽음이라는 결론뿐이다. 하지만 《아이 앰 어 히어로》 뿐만아니라 많은 만화의 질병은 시각적 변이를 묘사한다, 때때로 나오는 청각적 변이역시 만화라는 매체 안에서는 시각적 표현 안에 포함되어 버린다. 결국 상기의 질문에 대답을 하자면 팬데믹을 묘사함에 있어 만화가 더욱 시각에 의존하고 있다는 답을 낼 수밖에 없게 된다.
영국의 페미니즘 영화 이론가 로라 멀비는 1초에 24번의 죽음>에서 영화의 서사란항상암전이라는 죽음을 향해 달리고 있다 주장한다. 이는 영화가 기본적으로 시간에 의한 사멸을 포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영화에서의 고통은 시간으로 응축된다.영화에서 감염이라는 사건 자체는 강조될 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아 있는 것인가로 초점이 모이게 된다. 말하자면 이것은 시간과의 싸움이며, 인물들은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적 속성과 대립하게 되는 셈이다.
그런 이들에게 '감염의 징후'는 인지의 아래에 숨어 있을 때 더욱 공포로 다가온다.아무리 강렬한 변이를 묘사한다고 하더라도 시간이라는 공포보다 더 강렬히 다가올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컨테이전>은 마리옹 꼬띠아르, 기네스 펠트로, 맷 데이먼, 로렌스 피시번, 주드로, 케이트윈슬렛 같은 대중에게 잘 알려진 배우를 다수 캐스팅함으로써 이러한 감각을 극대화시킨다. 최초 감염자인 베스 역으로 분한 기네스펠트로는 영화가 거의 시작하자마자 사망한다. '잘 알려진 배우'의 생존성은 친근함이라는 단순함이상의 영역이다.
우리는 디제시스 밖의 관계-영화의 산업성을 통해서도 그러한 안정성을 담보받는다. 허나 그것이 깨어지는 순간 영화는 온통 불안으로 점철되게 된다. <컨테이전>이 던진 시간의 소멸성은 영화내부의 모든 인물이 피해갈 수 없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셈이다. 그 누구도 이겨낼 수 없는 시간성. 이보다 더 무섭게 생긴 괴물이 존재할 리 없다.
반면 만화의 시간은 어떠한가? 만화의 시간에는 영화의 그것과 같은 절대성은 없다. 독자는 자신의 손을 멈추는 것으로 그 흐름을 자의적으로 조정한다. 감염과 소면 이전의 상태를 언제든지 선택할 수 있는 매체 내에서 '질병'은 둔화된다. 결국 만화는 감염과 접촉이라는 시점 그 자체에 천착하게 된다. 육체의 변이, 기이한 소리,초월적 운동성, 급격한사멸 시간이라는 공포를 대치하기 위해 만화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는 셈이다.
(후략)
※본 원고의 전문은 2020년 발간된 <지금, 만화> 6호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