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히 늘어선 퀴어 영화와 BL 만화
'BL 만화'와 '퀴어 영화'는 무엇이 다른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나 내릴 수 있다. '그것은 대답이 불가능한 명제이다.'라는 대답이다. 양자는 '차이'라는 것을 논할 만큼 맞물리는 개념이 아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날 수 있는 것과 새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과 동일하다. 좀 더 정확한 논지를 풀고 가자면 BL 만화란 이론으로써 구분해낼 수 있는 '장르'로써 기능하며, 퀴어 영화는 매체를 바라보는 렌즈로써 기능한다고 정리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미리 정리해야 할 것이 있다. 퀴어 영화는 왜 장르가 아닌가?
물론 퀴어 영화를 비장르로 구분하려는 시도 역시 여러가지 위기와 마주할 수 있다. 릭 알트만이 말한 바 처럼, 장르란 안정적인 카테고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라파엘 무안이 <영화 장르>에서 제시한 '장르의 정글' 안에서 장르들은 가지를 뻗고 얽히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하지만 변곡의 연속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이전의 상태, 즉 본래 공유되던 어떠한 근원적 형태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대상이 장르'인' 것인지와 장르'였던' 것인지에 대해 뿌리의 단계에서부터 논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우리가 퀴어 영화라고 부르는 것들로 어떻게 관습이라는 합집함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를테면 왕가위의 <해피 투게더>, 토드 헤인즈의 <캐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페인 앤 글로리> 피터 스트릭랜드의 <듀크 오브 버건디>, 구스 반 산트의 <밀크>, 조현훈의 <꿈의 제인>, 바바라 해머의 <질산염 키스>로부터 어떠한 동일적 맥락을 발견해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 모든 작품들은 주동인물이 헤테로 섹슈얼/시스 젠더라는 틀 밖의 인물이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동일시 할 수 없다. 퀴어 영화는 젠더 퀴어의 '성애적 서사'를 다루는 영화인가? 그렇다면 산트의 <밀크>, 조현훈의 <꿈의 제인>은 탈락한다. 혹은 젠더 퀴어인 주동인물이 사회와 충돌하는 양상을 그린 영화인가? 그렇게 되면 알모도바르의 <페인 앤 글로리>나 오종의 <썸머 드레스>같은 영화들은 슬그머니 자리를 내줘야 할 것이다. 《한국 퀴어 영화사》의 책임 편집자인 이동윤이 여러 인터뷰에서 '퀴어 영화'의 규정이 선결되어야 할 조건이라고 지속적으로 밝혔던 것 처럼, 퀴어 영화라는 틀은 쉬이 규정되지 않는다. 결국은 명징한 규정을 찾기 보다는 그것이 영화라는 틀 내에서 어떻게 작동해왔는가를 추적하는 것이 더 빠를 수 있다.
퀴어 영화사는 당연하게도 퀴어 운동과 그 맥을 함께 해왔다. 퀴어 시네마는 초기 게이/레즈비언 운동의 기치인 '우리는 모든 곳에 있다 we are everywhere'를 증명하는 가장 직접적인 결과물로 작동했다. 리처드 다이어가 에세이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에서 지적했듯, 개별 인물의 섹슈얼리티는 결코 '시각화' 되지 못한다. 모든 영화에는 젠더 퀴어가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에도 철저한 이성애 규범이 그 가능성을 감춰온 셈이다. 퀴어 영화는 이성애 중심 서사의 맹점으로부터 가려져있던 사실들을 가시화한다. 퀴어 영화는 주인공들을 퀴어로 '만드는 것'이 아닌 그들이 퀴어였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기능한다.
그렇기에 퀴어성은 모든 관습들과 연계하며 모듈처럼 작동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서사 안에서 누군가의 성적 지향을 가시화시킴으로써 아웃풋을 형성해내는 것이다. 이 일련의 공정은 우리가 이성애 규범 안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이상한(queer) 감각에 익숙하게 만들며 주류 규범의 틀을 무너뜨려나간다. 시스 젠더에 국한된 퀴어 시네마에 대한 반발로 등장했던 '뉴 퀴어 시네마'가 전위 영화의 형식으로 감각에 균열을 냈다는 점을 상기하자면 '무너뜨린다'야 말로 퀴어 모듈이 작동하는 진짜 목적이라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퀴어 영화'는 이성애 규범의 세계에 다른 시각적 매개를 던짐으로써 틀을 무너뜨리는 모듈, 그러한 시각을 발생시키는 기능적 렌즈로써 틀 지어질 수 있다. 물론 이는 엄밀한 규정은 아니다. 때마침 퀴어 영화에 관한 주제를 다룬 독립 영화 비평지 《마테리-알》 3호 안에서도 각자의 틀거리-성애 장면을 노출해야 퀴어인가? 호모 섹슈얼의 고난을 다뤄야 퀴어인가? '퀴어 영화'는 장르화 해야 하는가?-가 다종 형성되고 있음을 생각하자면, '무너뜨린다'는 감각은 이미 내부에서부터 작동하고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그에 반해 BL은 명백하게 장르로써 작동한다. 토마스 소벅과 비비안 C. 소벅이 제창했던 바, 장르라는 것은 형식Formula, 관습Convention, 도상Icon을 3대 요소로써 가진다. 이것들은 거시적 서사의 공통성, 미시 서사=사건의 유사성, 시각적 형상의 반복성을 통해 대상이 장르로써 기능하는지를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미조구치 아키코가 자신의 저서 《BL 진화론》에 표기한 'BL의 정형'에 관한 네 가지 질문을 확인해보자.
왜 남성 캐릭터들은 동성 간의 연애에 있어서 자신이 논케(이성애자)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왜 그들은 섹스 외에도 '공' '수'로 나뉘어 고정화한 남녀의 젠더 역할을 연기하는가?
왜 언제나 애널 섹스를 하는가?
왜 이렇게 많이 강간이 일어나는가? (참고문헌 : 미조구치 아키코(2018), 《BL 진화론》, 길찾기)
미조구치는 이 4가지 질문에 대해 자답함과 동시에 유사한 구조를 가진 작품들을 '정형 BL'이라는 카테고리로 부르는데, 이 형성 과정은 고전기 장르가 형식/관습을 형성하는 방식과 일치한다. 여기에 BL이 제시하는 전형적 남성 육체-미형의 얼굴, 가늘고 긴 목, 넓은 어깨와 가슴, 가늘고 매끈한 허리-가 도상으로 제시됨으로 형식과 관습, 도상을 지닌 장르로써 기능할 수 있음을 확정하게 된다. 특히 섹스의 관계에서 '삽입하는 쪽'이자 '남성의 수행을 하는' 공(攻/세메)과 '삽입되는 쪽'이자 '여성의 수행을 하는' 수(受/우케)라는 개념은 BL이라는 장르가 확장되는 와중에서도 끝없이 재현되는 장르적 표상이 된다. 당대에 'BL보다는 퀴어에 가깝다.'고 평되었던 라가와 마리모의 <뉴욕 뉴욕>에서조차 공과 수의 관습은 거의 정확하게 재현되고 있다.
(후략)
※본 원고의 전문은 2020년 발간된 <지금, 만화> 8호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