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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 Aug 16. 2022

'정상성의 신화'앞에 선 만화들

<다양한 계절>과 <목소리의 형태>

김도현의 《장애학의 도전》은 '200년 전에는 장애인이 없었다.'라는 자극적인 문장으로 운을 떼며 시작한다. 물론 이는 '장애인'이라는 규정에 대한 설명이다. 그는 '정상적인 몸'이라는 표준화된 도상이 노동의 가능성 여부와 함께 등장했다 말한다. 장애라는 범주 그리고 구분은 인간의 역사와 언제나 함께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것이 불변의 기준이 아닌 만큼 지속적인 변화도 수반한다. <국제 손상·장애·핸디캡 분류>가 처음 발표되었던 1980년에는 '활동에서의 장애'가 장애인의 육체 그 자체에서 출발한다고 여겼다. 2020년의 우리가 보기에는 매우 폭력적인 관점임을 부정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장애인을 포함한 소수자의 이야기를 미디어가 다룰 때, 사회적 억압과 충돌에 대해 모든 포커스를 집중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들은 소수자들이 사회의 벽과 충돌한다는 사실을 인식시키는 효과도 있었던 반면, 주동인물이 가진 개별성을 지우고 하나의 스테레오 타입에 갇히게 만들었다. 소수자를 시혜의 대상이라는 기준에 가두워온 셈이다. 그와 반대로 현재의 미디어들은 소수자인 인물들의 개별성, 그리고 그들이 충분히 욕망을 가진 존재임을 드러내도록 만들어진다.


본질적인 차이는 어디에서 만들어지는가? 이는 '정상성의 신화'로 연결된다. '정상성'이란 다수자가 생각하는 자신들만의 공통분모이다. 이 구분을 기준으로 다수자가 생각하는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규정이 발생한다. '정상성의 신화'라 말했듯, 이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1970년 초 미국의 인류학자 노라 엘렌 그로스의 마서즈 비니어드 섬 연구에 따르면, 과거 섬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농인을 장애인으로 인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전적으로 농인과 청인의 비율이 유사할 수 밖에 없었던 환경 때문이다. 그곳에선 청인과 농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 수화를 제 1언어로 익혔고, 그 누구도 소통의 장애를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장애인(Disabled)이 아니었어요. 그저 듣지 못하는 사람(Deaf)이었지요."(노라 엘렌 그로스(2003), 《마서스 비니어드 섬 사람들은 수화로 말한다》, 한길사)라는 놀라운 인터뷰도 존재한다. 이 놀라운 연구는 '정상적인 몸'이라는 개념이 인간들이 발명해낸 것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소수자들은 '정상성'의 안으로 포섭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할까? 글쎄, 더 본질적인 해법을 주문하면 안되는 것일까? '정상성'의 환상을 해체하고, 더는 그것이 작동하지 않는 세계로 향하는 건 어려운 것일까?


<다정한 계절>과 환원된 '정상성'

이준이 다음에서 2011년부터 연재한 웹툰 <다정한 겨울>은 호르몬 장애로 어린아이의 몸을 가진 채 삶을 보낸 19세 소녀 '다정'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작품은 다정의 여러 욕망들을 가시화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다정의 딜레마들은 매우 사적이다. 다른 19세 소녀들같은 옷을 입을 수 없다는 점, 나이가 같은 남자에게 연애 대상으로 인지되지 않는다는 것들 정도이다. 이런 사적인 욕망들의 발현이 사회적 억압이라는 전형적 드라마보다 앞서 나갈 때, 다정이라는 인물은 호르몬 장애라는 단어 안에 집어삼켜지지 않는다. 특별하지 않은 고민들이 전형성이라는 벽을 투과해 생동감을 드러낸다.


하지만 <다정한 겨울>의 미덕은 이 시점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서사의 중심에서 있는 또 다른 주인공 '민성'과 양 인물들의 가정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민성'은 다정의 대립쌍(지적장애로 인해 7세의 정신을 가진 17세 소년)으로 설정되었는데, 다정의 편부 가정과 민성의 편모 가정 그리고 두 인물의 장애가 가진 '상호보완적 구성'은 마치 이 둘이 서로 정확하게 조립될 수 있는 존재들인 것처럼 만든다. 그리고 이는 역설적으로 인물 개개인을 '정상 가족'이라는 환상으로부터 갈라져 만들어진 '불완전한 존재'로써 표출하고 있다.


물론 <다정한 겨울>이 표면적으로 '정상 가족'을 이상화고 있지는 않다. 허나 이 작품의 후반부가 《사랑과 전쟁》의 카피같다는 혹평을 재차 떠올려보자. 다정과 민성에게 발생하는 가장 중요한 서사들은 고전적 가족 드라마의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고전적 가족 드라마의 본질은 '정상 가족'에 대한 환상 복권에 있다. 그것은 완전한 형태(라는 환상)로부터의 결손을 다시금 수복하려는 노력으로 진행된다. <다정한 겨울>의 서사는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정과 민성을 짓누르는 프레셔는 가족으로부터 버림받는다는 공포이며, 이것이 후반의 서사를 진행하는 원동력이 된다.


다정은 어머니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상처를 이겨냄과 동시에 민성이라는 존재를 통해 부재의 공백을 채울 수 있다는 희망을 얻는다. 바로 이러한 봉합이 다정이라는 인물의 (개인적 그리고 가정적)'결손'을 하나로 '수복'시키는 과정처럼 보인다. 작품의 에필로그에서 다정의 부친 '영준'과 민성의 모친 '서하'가 로맨스 관계를 구축할 수도 있다는 작은 뉘앙스가 등장하는 순간 어쩐지 이 모든 그림이 하나로 연결되는 불온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편부의 가정과 편모의 가정이 각자의 자녀를 통해 봉합되며, 두 자녀는 각자가 가진 부재의 영역을 상대로 채우려 든다. 이를 통해 만들어지는 표상은 결국 4인 가족이라는 '정상성'의 환영일 뿐이다.


또 하나. 다정의 서사와 달리 민성의 서사에서는 전형적 장면들이 불쑥불쑥 침입해온다. 이준은 지적 장애를 다루는 전형적 서사에서 탈피하려는 노력하지 않는다. '순수한' 행동과 그에 대한 외부의 오해, 의도를 설명하지 못하는 민성을 향한 폭력적 언행은 몇 번 반복된다. 그리고 충돌을 극화하려는 시도가 도리어 기이한 구성을 만들어낸다. 민성에게 폭력을 가하는 주체들이 당초부터 폭력적인 존재처럼 묘사되는 것이다. 미아를 구해주려다 유괴범으로 오해받는 22화에서, 아이의 어머니는 상대의 말을 듣지 않으며 덤벼든다. 아이의 어머니로 하여금 혐오 발언을 발화하도록 하여 장애인에 대한 편견의 발로 보이도록 만들고 있을 뿐이며, 이것은 아무리 봐도 위장이다. 이 어머니라는 인물이 민성이 장애인임을 알고 나서 폭력적인 발화를 하였는가? 그는 처음부터 대화가 통하지 않는 악마처럼 묘사되었다. 마찬가지다. 민성과 충돌하는 모든 '어떤 인물'들은 처음부터 대화를 성립시킬 수 없는 괴물처럼 묘사된다. 이준은 이러한 괴물들의 등장에 민성이 지적장애라는 사실만을 삽입해 이것을 외부세계와의 충돌로 읽히길 바란다. 이런 태도는 마치 이런 말을 던지는 것 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자, 이 무개념들과 민성 중 누가 더 '정상'처럼 보입니까?'라고.


<다정한 겨울>은 매우 적극적으로 다정과 민성이 '정상성'으로 포섭되기를 바란다. 반면 어떠한 것들을 '정상성'의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 그들이 가져야 할 '정상 가족'을 수복함시켜줌으로, 그리고 새로운 '비정상'인 무개념을 지목하는 것으로 그것이 달성될 것이라 믿는다. <다정한 겨울>은 '정상성'이라는 범주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 작품이다. 그저 그 안에 포섭될 존재와 밖으로 밀려날 존재를 다시 선별 하자고 주장하는 것 뿐이다.


<목소리의 형태> 무개념의 향연.

오이마 요시토키의 <목소리의 형태>는 그 시작부터 '무개념의 향연'이라 할 수 있다. 한 초등학교에 청각장애인 니시미야 쇼코가 전학을 온다. 반의 골목대장인 이시다 쇼야는 자신과는 다르다는 이유로 쇼코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가벼운 장난으로 시작되었지만 점차 끔찍한 행위들로 발전해나간다. 결국 쇼코는 다시 전학을 가게 되고 쇼야는 아이들의 다음 타깃이 된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목소리의 형태>는 가해자 서사라는 이유로 숱한 비판을 받고 있다. 한때 가해의 입장에 있던 쇼야가 피해자인 쇼코를 찾아가 관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시작해, 쇼코가 쇼야를 통해 삶의 구원을 찾아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판의 지점에서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오이마는 왜 모두에게 비판받을 것을 알면서도 가해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인가, 이다.


물론 <목소리의 형태>의 구도는 단순하지 않다. 쇼야는 가해의 입장에 있었지만 순식간에 피해의 입장으로 돌변한 인물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행위를 직시한 쇼야는 그 죄의식에 침잠하여 모든 소통을 거부한 채 살아가고 있다. 쇼코와의 대면이 자살의 전조라는 사실이 쇼야가 가진 침잠의 깊이를 알 수 있게 만든다. 오이마는 쇼야라는 인물을 설정함에 있어서 '가해'와 '피해'라는 이원론 안에 가둬두지 않으려 애쓴다. <목소리의 형태>는 오이마 요시토키라는 작가의 투박한 실험장처럼 보인다. 가해와 피해라는 이항 대립, 그리고 가해자가 원죄를 가진 채 살아가야 함을 당위처럼 여기는 지금의 세계에 곤란한 해석을 가진 인물을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후략)


※본 원고의 전문은 2020년 발간된 <지금, 만화> 7호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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