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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 Jun 02. 2017

빌 하포드의 모험

스탠리 큐브릭 <아이즈 와이드 셧>

    실력도 명망도 인정받는 의사 윌리엄 '빌' 하포드는 기묘한 밤을 보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밀 섹스 클럽, 그곳에서 위기를 모면한 그는 다음날, 자신을 그곳에 소개한 친구를 쫓다가 자신의 환자로부터 그 실체를 듣는다. 그나마 자신을 위해 희생된 (것으로 여겨지는) 여인에 대한 질문조차 석연찮게 끊나버린 문답에서 큰 무력감을 느낀 빌은 떠밀리듯 순순히 집으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카메라는 빌이 잃어버렸다 생각했던 가면을 비춘다. 배게 위에 놓여있는 가면을 비추던 카메라는 천천히 패닝해 옆에 누워있는 빌의 아내 앨리스의 자는 얼굴을 비춘다. 그리고 그제서야 집안에 들어서는 빌의 모습이 나오며 카메라는 천천히 그를 트랙킹한다.


    빌이 집 안에 들어가기 전 보여주는 가면과 그 옆에서 자는 앨리스의 모습은 사실 극적으로는 아무 필요도 없는 잉여다. 이 샷이 편집에서 뭉텅 잘려나갔다고 하더라도 이야기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아니 좀 더 거칠게 말하자면 이 컷은 이야기를 스무스하게 읽는데 방해를 주는 수준이다. 영화의 앞에서 빌은 어디선가 가면을 잃어버렸다. 관객들은 이 사실을 쉽게 눈치채지 못한다. 대여했던 정장과 망토를 반납하는 씬에 가서야 빌도 그리고 관객도 가면이 어디론가 가버렸다고 인지하게 된다. 물론 이 씬에서도 가면이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식의 ‘정보’ 만을 비출 뿐 가면이 커다란 의미를 갖진 않는다. 하지만 빌이 모든 과정을 거치고 집에 돌아온 그제서야 가면이 집에 있음을, 그것도 아내 앨리스의 옆에 놓여있음을 보여주게 된다.



    누군가는 이 컷이 서스펜스를 발생시키기 위한 장치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서스펜스는 관객과 인물의 정보 격차를 통해 발생하는 일종의 게임이다. 관객이 가면에 대한 정보를 빌 보다 많이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서스펜스는 발생하지 않는다. 관객이  알고 있는 정보라고 해봐야 앨리스 옆에 놓여있다는 수준이다. 이 가면이 어디에서부터 왔고, 누구의 의지로 그곳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이상 이는 서스펜스를 발생시키지 못한다. 서스펜스가 아니라 서프라이즈가 목적이었다면 더욱이 이 위치에 이 컷이 존재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이 컷은 관객으로 하여금 꺼끌꺼끌한 체감을 하게 만든다. 굉장히 신비로운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스무스하게 전달되던 <아이즈 와이드 셧>이 어딘가에서 덜컥 걸리는 시점이 이곳이기 때문이다. <아이즈 와이드 셧>은 영화 전체에서 빌의 시각 이상으로 정보를 관객에게 전가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빌의 모험(?)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는 모조리 관객이 동일한 시선으로 쫓아가게 된다. 영화가 많은 미스테리를 품고 있음에도 그것을 쫓는 명백한 말(빌)을 배치하였기에 관객들은 영화 밖으로 튕겨나가지 않은 채 몰입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이 컷은 의도적으로 지금까지의 흐름을 위배하고, 갑작스럽게 불균질한 정보를 조달함으로써 관객에게 혼란을 야기시킨다. 기존의 영화의 흐름을 명백하게 반하는 컷이다.


    하지만 덕분에 이 컷에서 부터 의심이 시작된다. ‘저 가면은 어디에서 왔는가.’  여기에서 부터 시작되는 추측은 영화 전체를 복기시킨다. 가면은 비밀 클럽에서 잃어버린 것인가, 아니면 집에서 나올때 떨어뜨린 것인가. 앨리스는 비밀 클럽의 존재를 알며 가면을 직접 들고 온 것인가, 아니면 집에서 찾아낸 것인가. 앨리스가 놓았다면 무슨 의미인가… 공교롭게도 이 컷의 이후부터 이어지는 장면은 굉장히 조심스러운 카메라의 율동을 보여준다. 부유하듯 움직이는 카메라는 집 안에 들어선 빌의 등을 쫓는다. 빌은 조심스레 움직이며 집 안을 훑고 트리의 불을 끈다. 그리고 주방에 앉아 맥주캔을 따서 마시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방에 들어가는 다음 컷으로는 크로스 페이드로 연결되어 있어 두 장면 사이에 어느 정도의 긴 시간이 존재한다는 정보와 함께 심리적인 여유를 준다. 이렇게 장면들은 의도적으로 시간을 유보시켜 관객들에게 상상의 나래를 펼칠 시간을 부여한다.


    해당 컷은 그 컷 자체가 무언가를 의미하고 있는 것인가 보다, 바로 그 위치에 있는 것으로 기능한다. 물론 이 (편집적인 관점에서의 ‘컷’이 아닌) 샷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은 분명히 있다. 빌에게 있어서의 일탈의 증거였던 ‘가면’과 앨리스가 현실의 법칙으로 부터 떠나기 위해 사용했던 ‘꿈’이 약간의 율동을 통해 하나의 샷 안에 담기기 때문이다. 둘을 하나의 샷에 담은 이유는 명백하다. 이 시점이 부부의 일탈적 행위가 하나로 조립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조립되어야 할 이유를 찾기 위해서는 이 시점에서 영화 전체를 복기해야 한다. 이 (편집적 의미에서의) ‘컷’은 독립적으로 읽히는 서브 텍스트를 가지지 않는다. 도리어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전체에 대한 사고를 발생하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이 컷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의 원천이다. 물론 이전의 어느 위치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소위 '스토리' 자체에는 위해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위치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 컷은 영화의 근본을 향한 의문을 만드는 절대적인 존재감을 뿜어내게 된다.


    이 의문의 시간이 나타나고 난 뒤, 영화는 급격히 결말을 향해 달린다. 빌 하포드는 아내에게 자신이 겪었던 일을 고백하고 울음을 터트린다. 그 후 딸과 함께 백화점에 간 두 사람은 앞으로의 생활에 대한 짧은 대화를 하고 영화를 마친다. 이 대화는 기존의 선명하던 대화들에 비해 그 목적과 맥락이 모호하다. 둘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클로즈 업의 샷-리버스샷의 연출은 마치 세상에 둘 이외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태도를 보여주며, 이는 이 대화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임을 확연히 알려준다. 모호한 이 대화의 맥락을 읽어낼 수 있는 단초는 오직 지금까지 설명했던 하나의 컷 이외에는 없다. 홀연히 나타난 그 컷이 등장하고 난 뒤 영화는 결과를 향해서만 직진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빌의 모험(혹은 일탈)의 증거인 가면과 앨리스의 모험(혹은 일탈)의 실체인 꿈(을 꾸는 행위)가 하나의 샷에 잡혔음을 기억해야 한다.


    빌 하포드는 앨리스로부터 일탈의 꿈 이야기를 들은 것을 계기로 자신의 모험을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앨리스의 일탈은 빌에게 동기로만 작용했을 뿐, 극의 안으로 깊이 들어오진 않았다. 빌은 그것을 해결하려 하기 보다는 그것에 반응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모험을 끝냈을 때, 자신의 내면에 같은 무게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말하자면 앨리스의 꿈에 대척시킬 수 있는 가면을 발생시켰을 때, 비로소 앨리스의 일탈은 해결해야 될 문제가 된다. 자신 또한 문제를 집 안으로 들여왔기 때문이다. 최후의 대화는, 말하자면 이 영화 내에서 둘이 제대로 대화하는 유일한 씬이다. 상대가 발생시킨 무엇에 대해 반응하기만 할 뿐인 것이 아니라, 드디어 둘은 눈앞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둘은 '모험'과 '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들은 둘이 각자 발생시킨 문제들에 정확히 대입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모험'과 '꿈'이 하나로 모였을 때, 짧은 패닝을 통해 하나의 샷 안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이루어진 일이다.


    <아이즈 와이드 셧>은 거슬러 올러가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관객이 이해해야 할 부분은 모두 이 유일한 대화씬으로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갑자기 나타난 그 알 수 없는 컷이 왜 그곳에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컷을 다시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지금까지 나왔던 영화의 모든 내용을 복기해야한다. 가면과 꿈을 다시 상기하고 머릿 속에서 재조립해야한다.


    이 모든 통행로를 완벽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정체를 파악하기 힘들었던 그 하나의 컷이다. 이는 뒤를 설명시키고 앞을 복기 시킨다. 아무것도 아닌 이 컷이 이 위치에서 떨어지는 순간, 우리들의 사고는 갈 길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아마도, 누군가가 이 영화의 줄거리만을 소개한다면 이 컷은 그곳에 부재할 것이다. 아예 없어지거나, 기껏해야 '아내의 옆에 가면이 있었어'라는 말로 쇼크를 발생하고 끝나버릴 것이다. 덕분에 우리가 전체를 복기할 기회도, 질문을 되뇌일 기회도 가지기 어려울 것이다. 영화의 마법은 거창한 이야기, 멋진 대사, 아름다운 샷에서 나오지 않는다. 되려 우리가 이야기에 천착할 수록 잃어버리기 쉬운 가장 작은 단위의 퍼즐 조각에서 나온다. 우리가 영화를 본다는 건, 아니 영화를 읽는 다는 건 가장 이상한 모양의 조각을 찾아 그것으로부터 퍼즐 전체를 다시 훑어보는 과정이다. 그러니까 '스토리의 잉여'를 찾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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