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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 Jun 03. 2017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오시마 나기사 <감각의 제국>

    <감각의 제국>을 보고 난 뒤 평을 뒤적거리다 보면 ‘이것은 포르노일 뿐, 가치가 없다.’는 평과 자주 마주치게된다. 영화가 가지고 있는 파격적인 면모, 그러니까 영화 전체가 성교에 관한 이야기로 꽉꽉 차 있기 때문인지 그게 아니면 배우들에게 실제 정사(!)를 시켰다는 그것 때문인지, 혹은 둘 모두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찌되든 그렇게 볼만 한 소지가 있다는 사실만은 긍정할 수 있다. 내내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성기와 강도를 논하기 곤란할 정도로 직접적인 성교묘사가 날뛰는 이 영화를 보고 누군가는 불쾌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영화에서 '이야기'만을 걸러내려는 작업을 동반한다면, 사실 '<감각의 제국> 포르노설'은 혐의를 벗어나질 못한다. 이 영화의 이야기라는 것은 섹스와 섹스의 반복이니까. 하지만 <감각의 제국>은 아무래도 감각적 흥취만을 말하려는 작품이라 말하기 어렵다. 이에 대한 증거는 영화의 여러부분을 이잡듯이 헤집어서 찾아낼 수 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집약적인 이유를 거론하려고 한다. 


    <감각의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인 그 엔딩은 두 남녀-사다와 키이치-가 정사(배우들이 실제로 연기했다는 그 장면!)를 하며 목을 조르다가 결국 남자가 사망하고, 여자는 남자의 성기를 잘라낸다는 이야기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섹스의 이전에, 오시마 나기사는 이상한 씬을 삽입한다. 거리에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해 개선해오는 일본군들이 열을 맞춰서 이동한다. 한편으로는 그들을 환영하는 사람들이 깃발을 흔들며 축하한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서 키이치는 자신의 몸을 움츠려 숨기고 있다. 그렇게 방으로 돌아와서야 사다와 만난 키이치는 상기에 묘사한 죽음으로 가는 섹스를 한다. 음, 그리고 이 장면 바로 전 사다는 자신의 성을 사던 대학교수로부터 퇴짜를 맞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시마 나기사가 이러한 씬들을 삽입해 놓았다.



    사실 이 두개의 씬은 내러티브에 그다지 도움이 되진 않는다. 이 두개의 씬-특히 개선행군의 옆에서 움츠리는 키이치-이 사라진다고 해서 이 영화의 이야기가 어딘가 헤지거나 이해가 불가능하게 되진 않으니까 말이다. 그렇기 때문이 이 두개의 씬은 '스토리의 잉여'다. 하지만 이 씬이 발생시키는 어떠한 역학을 보자면, 몸을 움츠린 기치의 컷은 누가봐도 노골적인 상징이다. 래디컬한 좌파 감독으로써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던 오시마 나기사는 이 컷에서 군국주의의 상징 앞에 키이치를 움츠리게 만든다. 그런데 키이치라는 인물이 어떤 인간이었나. 그는 단단하고 강력한 남근의 상징이었다. 영화 내내 좀 처럼 쉴 줄 모르는 강력한 성 에너지는 노골적으로 비추어지는 그의 성기로 더욱 강력하게 부과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컷에서 몸을 움츠린 키이치는 ‘발기되지 않은’ 성기 그 자체다. 개선하는 군국주의의 상징 옆에서 자신을 지우듯 움츠린, 발기되지 못한 키이치의 모습은 이후 이어지는 파멸의 섹스를 단순한 유흥으로 만들지 않는다. 더더욱이, 극중에서 내내 키이치의 발기한 성기에 도취되어 있는 듯 하던 사다 역시 그가 그리도 가치를 두지 않던 ‘잘 서지 않는 성기’에 의해 거절당한다. 


    이 컷, 개선하는 일본군 옆에서 움츠린 키이치를 한번에 담고 있는 컷이 등장하는 순간 관객들은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최초의 질문은 ‘이 컷은 어째서 이곳에 있는가’ 이고, 이 시점에서 확장된다면 ‘키이치는 어째서 일본군의 옆에서 몸을 움츠리는가’가 된다. 이 시점에서 이를 이해하기 위해 키이치와 사회의 충돌점-러일전쟁이 한창인 이 시대에, 젊은 남자인 키이치가 참전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며, 결국 키이치가 가지고 있는 상징과 사회의 충돌로 까지 사고가 확장하게 된다.


    오시마 나기사는 60년대 쇼치쿠 누벨바그를 이끌었던 60년대 신좌파 감독의 대표였었다. 그는 <교사형>을 통해 당대 일본의 국수주의를 공격하고, <일본의 밤과 안개>를 통해서는 스탈린 주의에서 일보도 나아가지 못하던 경도된 구좌파를 신랄하게 공격했다. 아시아의 고다르라고 까지 불리웠던 오시마 나기사에게 있어 영화는 정치적 표명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사회적 패퇴, 특히 아사누마 산장 살인사건으로 인해 오명으로 점철되어버린 신좌파는 더이상 활동할 수 있는 운동이라 할 수 없었다. 오시마 나기사는 일본 사회의 환멸을 말하고 세계 무대로 나가겠다고 선언했지만, 이 뒤에는 결국 실패한 운동의 패배의식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 임이 분명하다.


    군국주의의 시대에 참전이라는 선택을 버리고 아나키즘적인 생활을 영위하던 키이치가 국가라는 실체와 마주하는 순간에 그는 스스로 패배해버린다. 그리고 그 패퇴의 의식을 가진 채로 자신의 세계에 몰두하다 사망하고, 자의식의 근간이던 성기마저 거세되며 그의 생이 마감된다. 그들의 섹스가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에너지를 품고 있긴 했으나, 궁극적으로 그들을 생의 밑바닥까지 끌어내린 것은 그들의 성 에너지가 아니라 더 이상 대적하지 못하는 실체들과 마주했다는 사실이다. 결국, 군대의 행렬을 피하는 키이치는 오시마 나기사가 가지고 있는 패배주의의 편린, 그리고 낭만을 향한 끝없는 도주가 그대로 박제된 그야말로 가장 치욕스러운 장면이다.


    그가 이 영화를 향락의 목적으로 만들었을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오시마 나기사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속살을 내비친다. 가장 부끄러운 내면을 정면으로 드러내는 하나의 컷이 정확한 위치에 삽입되었을 때, 이는 우리로 하여금 무의미했을지도 모르는 모든 구조를 다시 받아들이도록 유도한다. 물론 이런 오시마 나기사의 의식을 받아들일지의 여부는 각자가 판단할 일이다. 그저 중요한 것은, 오시마 나기사 본인은 이것을 포르노로 쌓아올리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가 이 컷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면 그때는 포르노가 될 수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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