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의 너머를 위한 프레이밍

게임「The Star Named EOS 별을 향한 여정」

by 이선인

C. 티 응위옌은 ‘게임은 여러 행위성 형식을 저장하고 주고받기 위한 하나의 매체’라는 흥미로운 주장을 펼친 바 있다. 게임이란 하나의 도전적 고투를 통해 일시적 몰입을 발생시키는 기입적 매체이며, 그 기입의 중심에는 특정한 행위agency가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티 응위옌이 다루는 ‘게임’이라는 범주는 비디오 게임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따라서 이 ‘행위’의 범주를 조금 복잡하게 바라볼 필요는 있다.


요컨데 프라스카의 주장대로 비디오 게임은 현실에 대한 해석체를 매개로 하는 2차성을 지닌다. 따라서 ‘현실’의 게임과 달리, 비디오 게임에서의 행위는 어느 정도 중첩된 경향을 가진다. 이를테면 스포츠인 ‘양궁’에서 활을 쏘는 것은 물리적인 행위일테지만, 「마리오와 소닉 올림픽」 시리즈의 양궁에서는 게임적 메커니즘을 위해 해석된 행위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듯 비디오 게임이 저장하는 ‘행위’는 2차적 매개의 결과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적 거리감을 전제할 때, ‘창작의 행위들’은 대개 게임 메커니즘에 안치시키기에 곤란한 경향을 지닌다. 말하자면 2차적 매개가 가지는 표현의 유사성을 발생시킬 수는 있겠으나, 원본과의 괴리를 지우기는 어렵다는 의미다. 이를테면, 「파이널 판타지 6」에 등장하는 캐릭터 ‘리름’의 ‘그리다’의 작동 원리는 ‘싸우다’와 별 차이가 없다. 그저 전투 중 해당 이름을 가진 커맨드를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싸우다’가 그 원본성에 해당하는 공격적 행동과 상당히 밀접하다고 느끼는 데에 반해 ‘그리다’에서는 그러한 작동이 정지한다. 물론 이 커맨드의 목적이 적을 공격한다는, 즉 그림 그리기의 본래 목적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영향을 주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QTE의 방식으로 그래피티를 그리는 「젯 셋 라디오」의 경우는 어떠한가? 물론 앞선 리름의 사례보다야 조금 더 ‘그림을 그리는’ 감각을 주기는 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인식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몇 번의 간단한 조작을 통해 복잡한 결과물이 순식간에 생성되는 이 현상이 현실의 복잡한 ‘그리기’로 즉각 치환되지는 않는다. 이런 면은 흥미로운데, 본 게임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버튼을 눌러 점프 후 난간을 타고 그라이딩’ 역시도 현실에 비해 꽤나 단조로운 조작을 요하나 그래피티 그리기 만큼이나 멀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분명 ‘창작 행위’라는 것에 대한 우리의 근원적 인식이 작동한다. 창작의 행위에는 창작자의 자의적 목적성과 행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기를 휘두르거나 점프해 난간을 타고드는 행위들과는 다른 층위를 이룬다. 예를 들어, 무기를 휘두르는 행위는 명백한 목적(적들을 쓰러뜨림)과 행위의 효율성이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버튼을 눌러 해당 행위가 작동할 때, 우리는 그것이 더 의도적이고 자유로울 것이라는 기대를 갖지 않는다. 그에 반해 창작의 행위에는 창작자(를 조작하는 나)의 자의적 목적성과 그것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더 넓은 범주의 자유가 포함되어야 한다. 따라서 고정된 무브셋moveset으로 재현된 ‘그리기’는 우리의 현실과 지나치게 거리가 있다. 원본의 감각을 시뮬레이트하기에는 너무 먼 곳에 위치한 셈이다.


하지만 여기엔 딜레마가 있다. 비디오 게임이 창작자의 자의적 목적성과 행위의 자유를 담지하는 경우,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메커니즘과 분리되어 작용되곤 한다. 즉, 루두스ludus가 아니라 파이디아paidea의 형국을 띄는 것이다. 가난한 예술가의 삶을 따라가는 게임 「파스파투」의 경우가 그렇다. 물론 게임을 진행하기 위해 플레이어는 계속 그림을 그려야 하지만, ‘무엇을 그렸나’가 게임의 진행에 크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이 게임에서 복잡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규칙이 규정하는 목적과 무관하다. 이는 플레이어의 자의적 목적을 위한 행위로 명백히 파이디아적이다. 무엇을 그려도 상관없다면 이것은 그저 창작의 툴로 전용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는 자유로운 건축(또는 조형)을 지원하는 「마인 크래프트」 역시 마찬가지다. 1x1x1의 입방체를 이용해 효율적인 보관 체계만을 이루던, 실제 사이즈의 건담을 만들던, 프로그래밍을 통해 작동하는 계산기를 만들던 그것은 게임이 제공하는 목적 지향의 수행과는 무관하다.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킹덤」에서 걸어다니는 거대로봇을 만들 수야 있겠지만, RTS에서 건물 배치를 ‘예쁘게’ 배치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 모두 게임의 목적과 크게 조응하지 않는 그저 플레이어의 자의적 욕망에 의한 생산물일 뿐이다. 거칠게 정리한다면, 게임이라는 툴로 만들어진 독립적이고 아름다운 창작물이다.


따라서 비디오 게임, 특히 내러티브 비디오 게임에서 창작의 행위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조금은 복잡한 세팅을 전제한다. 플레이어는 의도와 행위에 어느정도 자의성을 가지고 있되, 그 결과물 중 특별한 형태가 목적을 위해 선별되어야 한다. 루카스 아츠의 「룸」이나 닌텐도의 「젤다의 전설: 시간의 오카리나」에서의 연주 메커니즘 또는 「포켓몬 스냅」 시리즈의 촬영 메커니즘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물론 이들 역시 고정적인 대상, 특정한 마법의 주문이나 피사체로 수렴되어 버리는 만큼 기능적인 인상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한다.


그림 1.jpg 「룸」은 특별한 음계의 조합을 통해 마법을 시전한다.


「Behind the Frame : 가장 아름다운 경치」

「The Star Named EOS 별을 쫓는 여정」은 실버 라이닝 스튜디오Silver Lining Studio의 전작 「Behind the Frame : 가장 아름다운 경치」(이하 BTF)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특정한 창작 행위를 서사 추동의 기본으로 삼고 있는 것에 더해, 방탈출의 메커니즘을 이러한 창작을 위한 중간 단계로 제시한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실버 라이닝 스튜디오의 디렉터 윌슨 옌Wilson Yen은 PocketGamers.biz와의 인터뷰에서 본 게임의 특징 중 하나를 ‘페인팅 메커니즘’을 든다.. 그만큼 ‘그리기’의 행위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플레이어는 특정 챕터를 클리어하기 위해 그림을 완성해야 하나, 챕터의 시작 시에는 물감의 종류가 부족한 상태다. 물감의 수색이 방탈출의 메커니즘으로 이어지며, 이 과정에 마주하 시각적 정보들이 서사의 빈 부분을 보충하는 식이다. 퍼즐을 풀고 물감을 획득하면 캔버스에 앉아 물감을 직접 발라 그림을 완성해야 한다.


여기서 이 게임의 특징이 발생한다. 플레이어는 이미 스케치가 되어 있는 캔버스에 물감을 직접 찍어 ‘발라야’하는 것이다. PC라면 마우스 포인터로, 콘솔이라면 아날로그 스틱으로, 모바일이라면 터치를 이용해 내부에 색을 채워넣어야 한다. 「BTF」는 이 ‘칠하기’의 과정을 적극적인 태도로 다룬다. 즉 퍼즐이 완료되고 물감이 수집되는 순간에 자동으로(또는 컷씬을 통해) 완성되거나, 포인트 앤 클릭이나 QTE 같은 매개적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플레이어는 직접, 규정된 만큼의 면을, 자신의 손으로 채워넣어야 하는 것이다. 이 명확한 선택은 「BTF」라는 게임의 서사를 온건히 체감하기 위해선 ‘창작의 행위’ 역시 감각적으로 체감해야 한다는 전제로부터 결정된 것으로 여겨진다. 즉 ‘그리기의 행위’는 게임 디자이너가 의식적으로 배치한 중요한 메커니즘인 것이다.


「BTF」는 ‘창작의 행위’를 그 감각의 핵심에 둔다 할 수 있다. 플레이어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퍼즐을 거치고, 스케치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는 캔버스에 포인터를 세심히 점점 채워나간다. 이 과정은 퍼즐을 해결하며 마주했던 방의 풍경들, 사진이나 그림 또는 텍스트 정보들을 다시금 상기하고 정리하는 것을 돕는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게임의 ‘프레임 뒤에Behind the Frame’있는 진실을 탐구할 수 있다. 그리고 완성된 그림이 그러한 진실의 편린과 맞닿아 하나의 서사적 세트를 이룬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흥미로워야 할 과정에는 약간의 어긋남이 있다. 이 ‘창작의 행위’는 시뮬레이트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쉽게 말해 「BTF」의 페인팅 메커니즘은 그저 ‘색을 찍어 바르는’ 것에 국한된다. 특정한 위치에 올바른 색을 적당히 발라만 놓으면 ‘완성된’ 그림으로 즉시 치환된다. 플레이어는 명암이나 텍스쳐를 위해 물감을 덧대 바를 필요도 없고, 심지어는 제시된 면을 가득 채울 필요도 없다. 따라서 ‘플레이어가 그린 그림’과 ‘서사의 추동을 위해 필요한 그림’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전자는 그저 후자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흉내내기’에 가깝다.


그림 2.png 「Behind the Frame : 가장 아름다운 경치」는 플레이어의 불완전한 그리기를 완벽한 그리기로 순식간에 바꿔친다.


이 불일치는 「BTF」가 요구하는 과정상의 몰입을 일정량 끊어버린다. 내가 ‘적당히’ 바른 물감이 그럴싸한 그림으로 변화하는 순간, 플레이어는 게임이 제시하는 서사적 추동으로부터 튕겨져 나온다. ‘내가 그린 그림’이 진실의 편린에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미리 그려둔 그림’이 진실의 편린으로 제시된다. 플레이어인 자신은 필요의 과정으로 그것을 (적당히 닮은 정도로) 제시한 것 뿐이다. 물론 비디오 게임의 서사가 모두 경험적 몰입의 과정을 제시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러한 작동을 위해 삽입된 페인팅 메커니즘이 그 목적을 배신한다면 조금 다른 문제가 된다.


(후략)


※본 원고의 전문은 게임 제너레이션 홈페이지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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