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롤플레잉 게임의 사반세기
비디오 게임 장르로서의 RPG는 상당히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 장르다. 이 장르는 태생부터 특정한 테이블 탑 게임을 도달해야 하는 이상적 모델로 삼으며 탄생했다. 초기 비디오게임 RPG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은 테이블탑 RPG(이하 TRPG)인 《던전즈 & 드래곤즈》(이하 D&D)를 혼자서 할 수 있도록 구현하는 것에 목표로 두었다. 대부분 미국의 대학 내 인트라넷 시스템이었던 PLATO를 그 플랫폼으로, D&D를 즐기던 대학생들에 의해 자주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세간에도 잘 알려져있다. 또한 리처드 개리엇의 초기 작품인「아칼라베스」 역시 초기 버전의 제목이 DnD였다는 사실 또한 익히 알려진 이야기다. 이 독특한 장르는 이러한 외부적 게임을 디지털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장르다. 물론 다른 장르들, 예를 들어 스포츠나 대전 격투 역시 현실의 ‘게임’을 디지털적으로 구현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RPG는 이들과는 다른 방식의 번역을 요구했는데, 그것은 RPG가 디지털의 방식으로 구현하려는 대상이 육체의 운동이나 정형화된 규칙이 아니기 때문이다. TRPG를 구동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했던 것, 그것은 TRPG의 가장 핵심적인 기반이 참가자들의 ‘언어’라는 사실이었다.
TRPG 역시 대개는 적절히 구성된 게임 세계와 가변성이 큰 상황을 판단하기 위한 규칙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게임을 ‘불편하지 않게’ 유지하기 위한 기반적 틀거리에 한정된다. TRPG는 그 이상의 모든 요소들, 그러니까 게임 내에 등장하는 장애물의 종류, 풀어야 하는 퍼즐이나 수수께끼, 참가자들 이외에 존재하는 세계의 모든 요소가 완전히 구조화되어 있지 않다. 설령 특정한 적 캐릭터에게 수치적 데이터가 있다고 한들, 그들이 어떤 배치로, 어떤 전략으로, 어느 정도의 사기로, 어떤 목적으로, 어떤 마음 가짐으로 플레이어들과 대립하는지는 규정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게임을 진행하는 사람들 사이의 언어적 합의와 심판의 역할을 맡는 ‘게임 마스터’에 판단에 의해 규정된다. 또한 이러한 세계와 게임 플레이어들이 어떻게 상호 반응할 것인가, 당면한 문제를 어떠한 과정으로 해결할 것인가 역시 모두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서 확정된다. TRPG라는 게임이 가진 가장 핵심적인 기반은 언어이며, 비디오 게임으로서의 RPG는 이 기반의 ‘거대함’을 번역하는 것을 요구받은 장르다.
초기 미국의 컴퓨터 RPG(이하 CRPG)들은 이 거대함을 ‘게임 세계’라는 컨셉으로 해석했다. 이를테면 세계는 선형적이거나 순환적이지 않았다. 플레이어는 사전적으로 규정된 세계 내에서 자율적으로 세계와 접촉할 수 있는 기능을 얻었다. 「울티마」는 탑뷰로 내려다본 세계와 1인칭의 시점으로 구현되는 던전을 모두 가지고 있었으며, 던전의 구성은 난수적이긴 했으나 일정한 패턴을 통해 구현되었다. 플레이어는 어떤 곳에 먼저 들를지, 무엇을 먼저 구매할지 따위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세계와 반응해나가야 했다.
「위저드리」는 그보다는 더 좁은 세계인 다층 구조의 지하 던전을 다루고 있지만, 이러한 구조물과 플레이어는 비선형적 관계를 맺었다. 좁은 지하의 터널 내부에서도 ‘어떤 방’을 ‘어떤 순서로’ 탐험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플레이어의 몫이었으며, 때로는 모험을 포기하고 다시 지상으로 귀환해 상태를 재정비하고 다시 내려가야 했다. 물론 이러한 반응성의 세계는 초기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 이를테면 「콜로설 케이브 어드벤처」나 「조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CRPG는 이런 어드벤처 게임들과는 전적으로 구분되는 체계를 내장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일종의 ‘수치에 의한 캐릭터 규정과 성장의 체계’다. 이 체계는 전적으로 그들이 원본으로 삼던 D&D의 것을 빌려온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언어라는 구조를 완전히 빌려올 수 없었던 디지털의 방법론에서 이 수치 개념이야 말로 가장 구현의 가능성이 높은 것이기도 했다. 지미 메이허Jimmy Maher는 《CRPG의 르네상스 파트 1》에서 이 문제를 꽤나 신랄하게 비판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CRPG는 전투와 병참 관리가 전부인 게임 엔진 위에 스토리와 세계 구축이라는 얇은 외피를 씌웠고, '롤플레잉role-playing' 게임이 아니라 '롤플레잉roll-playing'이 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구현은 RPG라는 것이 초기 텍스트 어드벤처 혹은 다른 ‘거대한 서사’를 지탱하려는 비디오 게임 장르들과 구분되는 지점을 형성한다. RPG의 주인공은 결과적으로 ‘위대해짐’의 상태를 달성하는 것이다. 요컨 당대의 서사를 내포하는 다른 장르의 주인공들 역시 ‘더 복잡하고 장대한’ 장애물과 마주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장애물과 마주하는 주인공 그 자체가 그에 상응할만한 존재로 변화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RPG가 D&D로부터 빌려온 이 캐릭터 성장의 구조는 플레이어의 캐릭터에게 ‘이전보다 더 나은 상태’를 부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더 위대한 상태에 도달해 더 거대한 위협을 무찌르는 에픽epic의 서사의 구축이 가능해진다. 한편 이러한 장대함의 구조는 TRPG의 ‘언어’라는 컨셉을 대체할만한 또 하나의 컨셉, 즉 ‘에픽의 서사’라는 컨셉을 가질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줬다. 따라서 비디오 게임 장르인 RPG는 ‘(거대한) 게임 세계’와 ‘(거대한) 에픽의 서사’라는 두 가지 컨셉을 지닌 장르로 체계화되었다.
그리고 핵심은 이 두가지 컨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컨셉들이 발현시키는 고유한 RPG만의 체감 조건에 있다. 넓고 반응 가능한 세계, 그리고 점차 ‘위대해지는’ 캐릭터의 변화는 플레이어를 게임의 내부에서 ‘정처없이 서성거리’도록 내민다. 이런 구조는 원뿔형의 나선으로 토픽화 된다. 플레이어는 넓은 반응 중심의 게임 세계에서 다양한 대상을 만나며 ‘정처없이’ 움직이고, 이러한 움직임이 캐릭터를 ‘점차 위로 상승’시켜 최종적으로는 꼭대기peak와 접촉한다. 이런 구조는 초기 미국의 RPG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코드를 어느 정도 변용해 받아들인 일본의 RPG(Japanese RPG, 이후 JRPG)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단, 이 하위 장르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드래곤 퀘스트」는 프로듀서의 지향에 의해 ‘게임 세계’보다는 ‘에픽의 서사’가 더 강조되었고, 이후의 JRPG가 그러한 서사에 더 집중하도록 만드는 기반을 부여했다.
이렇게 비디오 게임의 역사에 RPG라는 것이 탄생한다. 선형 혹은 순환형 세계에서 변화를 가지지 않던 주인공들이 존재하던 세계에 ‘정처 없는’ 플레이가 들어선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RPG라는 장르는 1990년대에 이르러 그 형태가 더욱 졍교해진다. 《롤플레잉 게임 스터디즈Role-playing Game Studies》(2018) 에서 슐스Schules, 피터슨Peterson, 피카드Picard는 ‘게임 제작 수의 폭발적인 증가와 출시되는 게임의 질적 향상으로 인해 일반적으로 학계와 팬들은 1990년대를 CRPG의 황금기로 간주한다.’고 쓰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중반은 이후의 RPG를 규정했다고 말할 수 있는 몇 개의 게임들, 블리저드의 「디아블로」, 바이오웨어의 「발더스 게이트」, 인터플레이의 「폴 아웃」, 베데스다 소프트웍스의 「엘더스크롤 II : 대거 폴」, 스퀘어 소프트의 「파이널 판타지 VII」 등이 발매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다수/다종의 제작과 발매는 장르 내부에서의 적극적 분화를 이끌어낸다.
이 시기에 RPG가 유독 비디오 게임계의 주요 화두가 된 것은 비디오 게임 환경의 전적인 이동에 있기도 했다. 1990년대 개인용 PC의 보편화와 더불어 닌텐도, 세가의 적극적 공세는 비디오 게임의 소비 공간을 아케이드에서 가정으로 끌고 들어왔다. 이러한 소비 공간의 변화는 게임의 소비 방식 자체를 ‘일회적 양식’에서 ‘다회적 양식’으로 크게 변화시켰고, 플레이어들은 다회의 플레이가 맥락적으로 연결되는 경험을 요구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닌텐도의 「슈퍼 마리오 월드」같은 플랫포머 게임조차 맥락적 다회 플레이를 의식하는 구성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이경혁은 《현질의 탄생》에서 이렇게 적는다.
"(게임의 소비 공간의 변화를 통해) 첫 번째로 발견할 수 있는 변화는 긴 호흡의 게임들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 엔딩 없이 무제한으로 반복되던 초창기 게임들은 서서히 나름의 서사를 가진, 다시 말해 엔딩이 있는 게임의 형태로 변화했다. (...) 콘솔/PC 게임들이 보여주는 세이브/로드를 통해 초장 시간의 서사를 갖는 게임 플레이는 (...)"
70~80년대에 발흥한 RPG라는 장르는 이러한 비디오 게임 소비의 공간적 변화에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작동한다. 호리이 유지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점점 강해진다는 점이 재미있다고 생각했거든요. AVG는 수수께끼가 막히면 할 일이 없어져버리지만, RPG라면 일단 레벨을 올리기만 해도 즐길 수 있잖아요. 수수께끼를 풀고 레벨도 올리면서 계속 나아가면 많이 놀 수 있는데다가,(후략)."
이 시기를 루이스 자네티Louis Gianetti의 장르 사이클에 놓고 본다면 전적으로 고전기라고 볼 수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고전기는 ‘중간단계로서 균형, 풍요, 안정 같은 고전적인 이상을 구현한다. 즉, 80년대에 만들어진 RPG라는 장르 규칙은 1990년대의 폭발적 증가를 통해 수없이 반복되며 하나의 이상적 형태를 이룬다. 그리고 이 때의 RPG들이 무엇을 그 고전적 이상으로 삼았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990년대 RPG를 ‘RPG적’인 것으로 이해하게 만든 것은 사실상 거대한 세계, 에픽의 서사라는 컨셉보다도 그것을 달성시키는 ‘양식 조건’, 수치적 캐릭터 구성과 그 성장 체계에 기울어진 경향이 있다. 그것은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RPG를 ‘다른 장르와 다르게 만들어주는’ 메커니즘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무엇인가에 ‘RPG’라는 태그를 달 수 있는 조건은 플레이어 캐릭터에게 수치화된 ‘능력치’라는 것이 있는지, 점수화된 경험을 모아 ‘레벨’을 올릴 수 있는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를통해 이 시기에 ‘RPG화’라는 욕망은 이 메커니즘을 어떻게 이식하는지에 달려있었다. 예를들어 시에라 온라인이 이러한 ‘RPG성’을 이식해 만든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게임 시리즈 「퀘스트 포 글로리」의 경우, 역시나 강조되는 것은 이러한 양식 조건이다. 당시의 게임 잡지인 《PC 매거진》 1993년 1월호는 이 게임의 세번째 작품을 소개하며 다음과 같은 문구를 사용한다. ‘이전의 「퀘스트 포 글로리」와 마찬가지로, QG3는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CRPG)과 그래픽 어드벤처가 혼합된 게임입니다. 캐릭터의 특성과 능력은 능력치의 리스트에 의해 정의됩니다. 상황의 성공 여부는 스킬 레벨에 따라 달라지며, 연습을 통해 스킬을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규정은 연구자들에게서도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구석이 있다. 2008년 International Journal of Role-playing Games - Issue 1에 실린 마이클 히친스Michael Hitchens와 앤더스 드레이센Anders Drachen의 《롤플레잉 게임의 다양한 얼굴들》에는 싱글 플레이어 디지털 롤플레잉 게임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이 적혀있다. ‘이러한 게임은 캐릭터의 수치적 표현에 의존하며, 펜 앤 페이퍼 게임의 전형적인 스킬과 능력의 수치적 향상에 따라 캐릭터가 성장한다.’ 또한 2012년 발매된 《비디오 게임 대백과》에서도 이와 유사한 문장을 찾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특징 중 하나는 모든 RPG에는 정량화할 수 있는 특징(테이블탑 스타일 RPG에서 사용되는 캐릭터 시트와 동등한 디지털적 요소)을 가진 플레이어 캐릭터가 있으며 캐릭터의 성장이 성공의 중심 척도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RPG 규칙 시스템에는 자주 '경험치 레벨'이 포함되는데, 이는 게임에서의 성공적인 진행을 통해 새로운 능력과 스킬로 '레벨 업'할 수 있는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다는 의미다.’
물론 당시에도 이러한 양식 조건만으로 RPG를 설명할수 있는가에 대해 여러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1996년 블리저드의 「디아블로」가 출시된 뒤, 해당 게임을 CRPG로 구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디아블로」는 여러 게임 잡지들의 기사 등에서 ‘RPG’로 홍보되었으며 전통적 팬덤의 입장과 무관하게 RPG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즉 업계에서는 RPG라는 게임을 ‘제작’하는 데에 있어서 이러한 수치적 캐릭터 규정과 성장 방식을 하나의 문법으로 사용했다. 설령 전통적 RPG의 팬덤이 이를 수용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한편 이러한 비교적 가벼운 규정은 1990년대에 RPG의 제작을 더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는 토대가 되어주기도 했으며, 덕분에 다종으로 분화할 토대가 형성되었다는 사실도 생각할 여지가 있다. 이를테면 일본에서 탄생한 SRPG의 경우 세계와의 접촉이 선형적이고 불가역적임에도 불구하고 RPG의 하위 장르로 분류되고 있는데, 이는 개별적인 게임 무대stage에서의 자유로운 전술적 지침이 이러한 ‘정처없는 서성거림’을 일부 대체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1990년대는 그것의 고전기라고 부를 수 있는 조건과 동시에 그것에 다종의 분화를 만드는 수정기의 초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분화는 크게는 RPG의 거대 컨셉을 어떤 맥락에서 접근하느냐를 통해 분화되었다. 요컨대 지리적 요건에 의해서는 일시적으로 서구식 RPG(Western RPG, 이후 WRPG)라고 불리웠던 그것과 JRPG로, 인터넷이라는 기술 조건에 의해서는 단일 플레이어 RPG와 멀티 플레이어 RPG로 분화되었다. 이 때 이 분화를 만들어낸 배경에는 전적으로 RPG의 핵심인 ‘거대한 컨셉’에 대한 각자 다른 접근법이 있었다는 사실을 명시할 필요는 있다.
(후략)
※본 원고의 전문은 게임 제너레이션 홈페이지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