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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Zam Nov 06. 2017

죽음이란 무엇인가 - 셀리 케이건

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셸리 케이건 (지은이) | 박세연 (옮긴이) | 엘도라도 | 2012-11-21 | 원제 Death (2012년) 

2년 전이던가? 마이클 샌델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전국 서점가를 강타했었다. 그 후로 ‘왜 도덕인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까지 꽤 많이 팔린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은 다분히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염두에 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학교수가 강의했던 내용을 정리해서 출간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하버드, 예일이라는 미국 명문대학이라는 묵직함이 주는 신뢰감도 그렇다.
‘정의란 무엇인가’ 책 표지에는 부제를 이렇게 적었다. ‘하버드 대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이 책은 어떤가?
똑같은 방식으로 표지를 구성하고 있다. 부제마저 같다.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말 그대로 ‘죽음’에 대한 철학자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철학자는 과연 어떻게 죽음을 정의하고 있을까? 더구나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독자들이 글로 설명된 ‘죽음’이라는 난해한 주제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게 설명했을까?
두 번째는 내가 생각하는 ‘죽음’에 대한 의미와 비교해보고 싶었다. 언제부턴가 세상을 보는 내 나름대로의 시각이 바뀌고 있음을 느끼며 과연 내 시각이 올바른 걸까? 누군가와 비교해보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했었고, 죽음이라는 주제라면 제법 고민해볼 가치가 있겠다 싶어서였다.
결론을 말하자면 두 가지 이유 모두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느낀 아쉬움 몇 가지를 정리해보면...
우선 너무 지루하다. ‘죽음’이라는 주제 자체가 쉽고 가볍게 접근할 수 없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점에 접근하기 전에 너무 힘을 빼버리는 느낌이었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저자는 아마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의 눈높이를 너무 낮게 잡은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쉽고 빠르게 진행할 수도 있을 부분을 너무 상세하게 설명하다 보니 페이지는 한참 넘어갔는데 여전히 ‘같은 비유’를 만난다. 내가 제일 듣기 어려워하는 강의는 ‘한 이야기 또 하는’ 레코드판 돌아가듯 진행하는 수업이다. 이 책을 읽으며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러다 보니 지루하다. 


다음으로는 저자 자신의 생각을 너무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죽음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사례와 유명인의 말을 많이 끌어다 썼는데,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도 눈에 띄었다. 특히 초반부의 “컴퓨터와 욕망”에 대한 비유는 아무래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만일 이 내용을 강의로 들었다면 어땠을까?
꽤 재미있었을 것 같다. 입담도 좋을 것 같고, 간간이 낄낄 웃어가며 그렇게 들을 만 할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책으로, 인쇄된 글로 만나니 영 맛이 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아쉬움이 큰 책이었다. 


책 자체에 대한 평가는 이쯤하고, 이 책에서 저자 ‘셀리 케이건이 말하고자 하는 죽음’에 대한 내 의견을 말하자면 70%쯤 공감한다.
일단 ‘신’, ‘영혼’을 믿지 않는다는 관점은 나와 같다. 나 역시 그런 부분을 믿지 않는다. 따라서 저자가 죽음에 대해 단호하리만치 ‘죽음 자체로 끝이다. 그 이후는 없다.’라고 말하는 부분 만큼은 100% 동감한다. 문제는 그런 이야기를 전개하는 부분에서 논리의 비약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평생을 살아온 나와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살아온 저자와의 관점 차이 때문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책에 대해서는 딱 이만큼만 이야기하면 될 것 같다.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 책을 읽으며 나름대로 정리를 해볼 수 있고, 내게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고민해볼 기회가 되었다는 사실에 만족하도록 하자. 


죽음은 무엇일까?
일단 나는 신, 영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또한 인간만이 특별하게 대단한 존재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도대체 인간이 다른 생명체에 비해 특별하다고 하는 건 누가 하는 말인가? 인간 이외에는 아무도 그런 말 하지 않는다. 인간이 위대하다고? 인간만이 사고할 수 있고 인간만이 우주를 정복할 수 있으며 과학을 발전시켜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그런 모든 평가는 인간 스스로 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만일 누군가가 갑자기 내게 와서 “난 너보다 똑똑해. 무척 잘 났지. 게다가 난 너무도 창의적이어서 너는 상상도 못할 위대한 작업을 할 수 있어. 난 너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나게 귀하고 특별한 존재야!”라고 말했다고 치자. 내가 무슨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응. 맞아.”라고 적극적으로 인정해줄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쌍심지 돋우고 싸울까?
난 아마 ‘뭔 개가 짖나?’ 하며 피식 웃고 말 것 같다. 


지금 인간이 스스로를 우월하다고 하는 게 바로 그 꼴 아닌가? 게다가 최근의 ‘자연보호’니 뭐니 하는 것 역시 인간이 똑똑한 척하다 벌어진 문제를 뒤늦게 수습하고 있는 꼴이니... 

어쨌든 죽음 이후에 무언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사실 조금만 깊게 생각하면 아주 많은 문제를 떠올릴 수 있다. 

인간은 ‘상상’을 할 수 있다고 한다. 현실이 아닌 것을 구체화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에도 종종 등장하는 내용인데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영생을 바라는 것은 ‘가치’ 때문이다. 삶에는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고, 죽음에는 부정적 가치를 떠올린다. 죽음은 나쁜 것이고 산다는 것만이 좋은 것이라고 믿는 거다.
하지만 과연 무엇이 나쁜 것이고 좋은 것인가에 대해 따져보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된다. 


절대적인 가치라는 것이 있을까?
인간이 멸종한 후에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라는 것이 존재할까?
결국 가치라는 단어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고 현실이 아니다.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려면 그것은 인간의 존재여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무조건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가치라는 단어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내가 생각하는 ‘죽음이 나쁜 이유’는 죽음을 당하는 당사자보다는 그의 죽음이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에게 ‘슬픔’이라는 부정적 감정을 안겨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이 임박한 사람이 느끼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생명이 다하는 바로 그 순간까지는 당사자가 고통을 느끼고 공포를 느낄 수 있겠지만 죽는 그 순간 그 모든 것은 없어진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당사자가 죽어버렸으니까 그 순간 모든 것은 사라지는 것이다.
오히려 죽음을 곁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그 후로도 오래도록 슬퍼하고 아파하게 된다. 남은 자들만 괴로운 것이다. 


죽음 이후에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면 너무 허무하지 않느냐고, 그러니 내생을 믿는 게 낫지 않느냐고 말하는 이들을 종종 본다. 특히 종교인들이 그런 말을 많이 한다. 불교에서는 윤회를 이야기하고,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의 심판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이 없기 때문에 인생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쉽게 듣는 말 중에 ‘한번뿐인 인생’이라는 표현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뿐이기 때문에 더 열심히 살아야 하고 더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의미’니 ‘소중하다’느니 하는 것들 역시 인간이 만든 ‘상상’일 뿐이지만 나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이런 절대적이지 않은 ‘가치’를 귀하게 여긴다. 


책 자체는 그다지 매력적이지도 재미있지도 않았지만, ‘죽음’이라는 절대 피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시간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 책에 약간은 후한 점수를 줄 수 있겠다. 이 책이 아니었으면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기회가 쉽게 오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이 책의 맺음말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우리는 죽는다.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 죽음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다.” 


아!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다.
글로 채워진 두툼한 물건이다 보니 글 자체에 오류가 있으면 신뢰감이 확 떨어진다. 이 책에는 몇 군데 오류가 눈에 띄었다. 내 눈에 띈 것 딱 다섯 군데...
그게 좀, 아니 아주 많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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