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Zam Aug 26. 2017

잊혀진 질문 / 차동엽

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잊혀진 질문 - 절망의 한 복판에서 부르는 차동엽 신부의 생의 찬가

차동엽 (지은이) | 명진출판사 | 2011-12-29

 지난 연말, 우연한 기회에 명진출판사 관계자분을 만날 일이 있었다. 출판업계에 몸담으신 분답게 출간한 책 중 인기 있는 책을 몇 권 가져왔다고 하시면서 열 권 가까운 책을 건네주셨다. 이 책은 그때 받았던 책 중 하나였다.

 이 책 프롤로그에는 이 책을 집필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삼성 이병철 회장이 1987년 타계하기 전 절두산 성당 박희봉 신부께 보낸 질문지”

 질문지를 받은 박희봉 신부는 이 물음에 답할 적임자를 찾았고, 그렇게 몇 단계를 거쳐 이 질문지의 복사본을 작가인 차동엽 신부가 건네받았다. 작가는 “답은 완전하지 않다. 원하는 답의 실마리나 작은 꼬투리쯤이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말하며 책을 시작한다. 


 질문은 대부분 우리가 흔히 갖는 종교, 신과 인간세상의 갈등과 고통에 관한 내용으로 스물네 개의 물음이 번호까지 매겨져 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작가인 차동엽 신부에 대해 인물 검색을 해보았다.

 책에도 몇 번 언급이 되었던 “무지개 원리”라는 이름으로 희망을 이야기하는 ‘희망 전도사’인 것 같다. 현재 인천교구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이라고 한다. 


 책을 처음 펼쳐들 때 살짝 고민을 했었다. 내용의 상당 부분이 종교적인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삶의 모든 부분, 즉 고통이나 희망, 미래, 갈등과 같은 부분에 대해 번번이 이런 방식으로 대답을 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 읽고 나서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야 공감을 할 수밖에 없는 주제이지만, 풀어가는 방식에 있어서 비종교인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해석과 방향 제시라는 점이 아쉬웠다. 


 내가 이 책을 펼쳐 들기 전에는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류가 아닐까 기대를 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는 “종교인의 삶에 대한 설명서”쯤 된다고 결론 내렸다.

 결국 비종교인 또는 무신론자인 내 입장에서는 그다지 공감을 할 수 없는 내용이 많았다. 이 책에 대한 나의 리뷰는 결국 이 책에서 말하는 종교에 대한 반박 수준이 아닐까 싶다.

 따라서 이 책에 대한 내 최종 평가를 먼저 말하고 나서 종교적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종교에 대한 이야기이다 보니 내용도 길어질 것이고,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 나면, 이 책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 책은 ‘종교에 대한 답’을 전면에 내걸고 있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인생은 살아볼 만한 것이고 우리가 겪는 고통이나 슬픔은 충분히 견디어 내고 난 뒤 그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삶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사람, 누군가의 격려와 위로를 받아야 하는 사람, 종교나 신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에 알레르기가 없는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다. 


 뒤의 내용은 이 책에서 작가가 말하는 종교적 관점에 대한 내 개인적인 생각, 혹은 작가의 관점에 대한 반박이다. 따라서 종교 토론에 민감한 분은 여기에서 읽기를 멈추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이 책의 37페이지에서 작가는 고통에 대해 이슬람 최고의 신비주의 시인 루미의 말을 빌어서 이렇게 설명한다. “때로 우리를 돕고자, 그분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

 이건 이슬람뿐만 아니라 많은 종교에서 가장 쉽게 듣는 대답이다. 나 역시 예전 교회에 다니던 시절, 목사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때, 난 이런 의문을 가졌었다. “배 불리 먹여주기 위해 일단 굶긴다는 건가?” 


 또 하나, 이 책에서도 신의 존재를 증명, 또는 설명하는 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만, 이 역시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교회 목사님께 들었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불안과 걱정을 덜 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69P)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 고유의 가치” (111P)

“사람에게는 동물과 구별되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이란 바로 영혼을 가리킵니다.”(112P)

“급하면 누구나 하느님을 찾습니다. 벼락이나 천둥이 칠 때 자신도 모르게 “아이고! 하느님!”하고 찾게 마련입니다.“(138P)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도 슬픔에 직면하면 본능적으로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자신보다 큰 존재에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종교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 (139P)

”미국 해외선교연구센터 OMSC의 ‘세계 종교인구 및 세계선교 연례 통계’를 따르면 2010년 현재 세계 인구 총 68억 5245만 7천 명 가운데 종교별 분포는 이슬람교 22.61퍼센트, 천주교 16.86퍼센트, 힌두교 13.84퍼센트, 개신교 11.50퍼센트, 중국 종교 6.84퍼센트, 정교회 4.-- 퍼센트, 민족종교 3.81퍼센트, 성공회 1.26퍼센트, 기타 기독교 0.50퍼센트, 유대교 0.21퍼센트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무신론자는 2.02퍼센트였습니다. 종교인의 숫자가 무신론자의 숫자보다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난 것은 집단적인 착각 때문이었을까요?“(141P)

”평소 기도하지 않던 사람도, 심지어 스스로 무신론자임을 표방하던 사람도 다급하면 하느님을 찾게 마련입니다“(169P)

”기도는 그 응답과 상관없이 이미 그 자체로 위로이며 보상입니다“(173P)

”임상 경험과 연구 결과도 ‘인간의 행복과 복지에 결정적인 인자들은 우리의 영적인 신념과 도덕적인 선택’ 임을 말해줍니다“(192P)

”누가 알겠는가. 일단 의심의 강을 넘고 나면 혹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체험될지“(206P)


 위에서 인용한 부분들은 이 책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작가가 언급한 신의 존재를 믿어야 할 이유들이다. 그리고 내가 다녔던 교회의 목사님을 비롯하여 신의 존재를 말하려는 이들은 대부분 이와 비슷한 말을 한다.


 하지만 위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어느 하나도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될 수 없다. 단지 신이 존재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언급일 뿐이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인용한 “누가 알겠는가~” 이 부분은 일단 믿고 보라고 하는, 어찌 보면 일견 무책임해 보일 수도 있는 말이다. 그렇게 일단 믿고 봤는데 아니라면 그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사실 신이 존재해야 할 이유는 많다. 살인, 강도, 강간, 마약과 같이 내 생명을 위협하는 공포, 부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휘두르며 군림하는 권력자들... 이 모든 부조리함을 심판할 누군가가 없다면 억울해서 어찌 살 수 있겠는가? 복장 터져 죽을 일이지......

 그런데 또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그런 부조리를 대신 해결해줄 누군가가 있다면, 그래서 세상이 정의롭게 돌아간다면 그게 어찌 인간이 사는 세상인가? 어쨌든 우리는 단 한 번도 그런 신의 심판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 간증은 단지 우리가 확인하지 못할 전설 속, 또는 종교의 경전 속에서나 얼핏 그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그은 몇 구절을 더 언급하고 싶다.

 "만일 어떤 사람이 “신앙이 없이도 잘만 살더라. 적당히 요령을 부려 돈 많이 벌어서 부귀와 안락을 누리면 그만이지. 종교? 난 그런 거 몰라”하며 떵떵거린다면, 한 번쯤 철학자 파스칼의 말대로 내기를 해볼 것을 권합니다.

 '죽은 다음에 천국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어차피 확률이 1대 1이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확률은 똑같다. 자 그렇다면 도박을 해보자. 서로 반대 경우가 사실이라면 결국 손해는 누가 보는가?

 천국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 세상을 ‘함부로’, ‘엉망으로’ 살았는데 죽어서 보니 하느님도 있고 천국도 있다는 알게 되는 사람인가. 아니면 천국이 있다고 믿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하느님도 천국도 없는 경우의 사람인가?

 결국 누가 낭패 보겠는가?'

 분명한 것은 둘 중 하나는 파국의 패를 쥐고 사는 셈이고, 다른 하나는 대박의 패를 쥐고 있는 셈이라는 겁니다."(180P) 


 사실 이 내용은 철학자 파스칼이 신을 믿어도 손해 볼 것이 없다는 취지로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꽤 유명한 내용이다. 그런데 과연 이 말처럼 신을 믿고 살았는데 신이 없다고 판명이 난다면 손해 볼 것이 없을까? 신도 없고 삶도 한 번 뿐이라고 할 때, 파스칼의 말대로 독실하게 믿으며 신을 위해 평생을 살았다고 하면 그 사람은 정말 어마어마한 손해를 본 것 아닌가? 믿음이라는 게 단지 ‘난 당신 믿어요.’ 한마디 하고 끝나는 게 아닌 이상, 신의 존재를 믿는 순간부터 그의 삶은 바뀔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 번뿐인 삶을 오로지 “신”만을 위해 살았는데 알고 보니 거짓이더라? 그렇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삶 전체를 송두리째 잃어버린 것 아닌가?


 그리고 위의 문구에서 ‘천국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 세상을 ’함부로‘, ’ 엉망으로‘ 살았는데... 천국이 있다고 믿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라는 문구 역시 문제가 있다. 신이 있다고 믿으면 열심히 긍정적으로 산다는 전제, 신이 없다고 믿으면 ‘함부로’, ‘엉망으로’ 산다는 전제 역시 너무 극단적으로 가르는 것 아닌가? 세상의 비극 중에는 ‘신에 대한 믿음’이 원인이 되어 광기의 극단을 달린 경우도 많다. 십자군 전쟁은 어떤가? 중세 천주교의 ‘면죄부 발행’은 또 어떤가? 단지 ‘신을 믿는다’는 것만으로 인간이 도덕적으로 선하게, 열심히 살 것이라는 건 초등학교에서도 하지 않는 ‘극단적 이분법’이 아닐까? 


 “존재론적 논증은 중세 신학자 안셀무스의 주장으로 하느님이란 개념의 정의가 하느님의 존재를 함축한다는 것입니다. 안셀모는 하느님을 ‘하느님 그분보다 더 큰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분’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런 분은 반드시 존재하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203P)


 상상할 수도 없는 존재라는 정의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상상할 수도 없이 큰 존재라는 것이 존재해야 한다는 필연은 아니다. 말을 약간 바꾸어 보자.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크고 어마어마한 뱀이나, 독수리, 개, 심지어 바위나 꽃송이는 어떤가? 이런 대상은 반드시 존재하게 마련인 것인가?

 동양의 고전을 말할 때, 꼭 언급하는 책 중의 하나가 장자(莊子)다. 장자의 첫 이야기는 ‘북쪽 깊은 바다에 살던 물고기 한 마리'를 이야기한다. 곤(鯤)이라는 이름의 이 물고기는 그 크기가 몇천 리인지 알 수 없는데 나중에 변하여 붕(鵬)이라는 이름의 새가 되었다고 한다. 그럼 장자에서 소개하는 곤이라는 물고기, 또는 붕이라는 새 역시 어마어마한 존재이므로 실존한다는 말인가? 


 “어떻게 부르건 인간은 이 특별한 눈을 통해 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편린들을 단서 삼아 신의 존재를 직감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신은 ‘증명되는 존재’가 아니라 ‘체험되는 존재’로 인식됩니다”(209P)


 이 부분 역시 종교지도자에게서 많이 듣는 이야기다. 쉽게 이렇게 표현한다. “‘신’을 직접 보는 건 불가능하다. 단지 믿음 안에서 느낄 수 있다. 믿기 전에는 절대 그분을 느낄 수 없다”라고 말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신을 믿게 해야 하는데 증명할 수 없으니 결국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다. 보지 않고도 믿어야 진정한 믿음이다.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또 천지창조에 24시간씩, 실제 7일이 걸렸다고 믿는 기독교인도 있다. 성경 해석 방법이 미숙한 거다. 그건 은유적 표현이다”(237P)


 얼마 전, 자주 가는 인터넷 동호회 내에서 기독교 논쟁이 벌어졌었다. 당시 댓글 중에 그나마 합리적이라고 판단되는 댓글을 쓰신 분께 쪽지를 드렸다. “종교적인 부분에 대해 무신론자인 나와 기독교인인 당신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토론을 할 수 있겠는가?” 그분은 교회 장로 직분을 갖고 계셨고 기쁜 마음으로 대화에 응하겠다고 하셨다.

 당시 나의 전제는 이런 것이었다. “나는 무신론자이다. 따라서 성경을 기반으로 내게 신을 설명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럴 거라면 애초에 시작할 이유도 없다.” 그분은 승낙을 하셨다. 하지만 불과 서너 번 쪽지를 주고받다가 그분은 내게 마지막으로 이런 글을 보내셨다.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하겠느냐? 더 이상 대화하지 않겠다.” 당시 내가 그분께 했던 말은 이런 것이었다. “성경, 특히 구약의 내용은 고대 민족 설화 중에서 상당 부분을 인용했다. 이것은 성경학자들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성경이 정말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기록한 것이고 일점일획도 바뀌면 안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번역에 의한 오류는 어떻게 하느냐?”


 이에 대한 그분의 대답은 앞서 말한 것처럼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과 이야기할 수 없다”였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성경을 경전으로 삼는 종교의 신자들 중 상당수는 성경을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 절대 은유라고 보지 않는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나라 종교 지도자의 문제일 수도 있다. 문득 그런 생각도 든다. 종교의 경전이라면 해석이 필요 없을 정도로 확실하고 단호하게 이야기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면 그거야 말로 이단을 만들어낼 가능성을 스스로 내포하고 있는 것 아닌가? 


 “저절로’는 궁극적인 답이 되지 못합니다. 우주가 ‘저절로’ 생겼다고 해명하는 것은 우리의 궁금증을 온전히 해소해주지 못합니다. 우리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확실히 해소해줄 답은 오직 창조주 하느님이십니다”(250P)


 '저절로’가 궁극적인 답이 아니듯 ‘우리 존재의 의문에 대한 해소’라는 필요가 창조주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단지 창조주라는 존재를 가정해서 우리의 궁금증을 쉽게 해결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의 발현일 뿐이다. 왜 이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지 인간이 알 수 있게 설명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이 세상은 인간에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인가? 이 우주만물이 인간에게 깔끔하고 선명하게 이해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가? 아니면 인간이 갖고 있는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하다가 생각해낸 것 중의 하나가 신이라는 존재라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할까? 


“다시 우주론적 고뇌에 잠겨봅니다.

우주의 무수한 별이 본래 있었던 어떤 물리학적인 원리에 의하여 한순간 생겨났죠. 그리고 저토록 치밀하게 운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라고 믿어버리면 모든 것이 다 설명되는 것인가? ‘됐다’하고 손 탁탁 털고 일어설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저 오묘한 천체계의 질서가 우연일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의 창조 없이 그게 가능한 일인가? “

 바로 이 관점이 인간의 오만함이다. 이 부분은 바로 위에 언급한 내용과 중복되므로 더 이상 길이를 늘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죽어 있는 물질이 생명체가 되어서 수백수천의 식물과 동물이 생겨났고 마침내 말할 줄 알고 노래하고 즐거워할 줄 알며 고뇌할 줄 알 뿐 아니라, 문명을 창조할 줄 아는 인간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지 우연의 어리석은 장난 때문이었을까요? 하느님의 창조 없이 가당한 일이었을까요?”

 여전히 인간의 오만함을 본다. 노래하고, 즐거워할 줄 알며 고뇌할 줄 아는 것, 문명을 창조할 줄 아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뭐 그리 대단하고 위대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우연’이 어리석은 장난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현명한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인가? 과연 인간이 창조한 문명이니 기술이니 물리학이니 하는 것들이 그렇게도 대단하고 위대한 것인가? 그렇게 대단하고 위대하며 어마어마한 행동의 결과는 무엇인가? 지구에 대한 위해, 환경의 파괴, 동식물을 비롯한 생명체에 대한 폭력 아닌가? 이런 행동을 하는 인간, 정말 신이 있다고 한들 이렇게 어리석은 인간이 사랑스러울까? 


 이 책에는 이런 문장도 나온다. “인간은 위대합니다”(261P)

 나는 이 문장을 이렇게 읽고 싶다. “인간은 오만합니다” 


 “‘너 내 선물을 사오거라’해서 받으면 그것이 기쁩니까, 아니면 자발적으로 마음이 담긴 선물을 사 올 때 기쁩니까? 바로 이 점 때문에 하느님은 인간이 스스로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던 겁니다. 물론 인간이 당신을 배반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하느님 편에서 이것은 대단한 사랑의 모험이었습니다.

 바로 이 대목이 역사상 위대한 철학자, 신학자, 영성가들이 하나같이 경이롭게 수긍하는 하느님의 위대함입니다“(275P)


 보통 기독교, 천주교에서 신이 인간을 만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 스스로 신을 경배하게 하고 싶어서’라고... 그럼 결국 신이 인간을 만든 이유는 자기만족이라는 말이다. 그 자기만족의 극대화를 위해 위험을 감수했다는 말인데, 거기에 무슨 위대함이 있다는 말인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연도는 돌아가신 분을 위한 기도이기 이전에 유가족의 슬픔을 눈 녹이듯 달래주는 노래 중의 노래였습니다”(305P)


 유가족의 슬픔을 달래주는 것이 ‘연도’라고 한다. ‘연도’라는 말은 처음 들었지만, 아마도 초상집에서 치르는 장례의식에서 부르는 천주교의 노래인가 보다.

 내가 생각하는 죄의 기준이 바로 이 지점이다. 죄란 결국 당사자, 주변인 등 피해 집단이 받게 되는 슬픔, 아픔, 고통의 크기에 따라 정해진다. 그 정도가 크다면 당연히 더 큰 벌을 받아야 한다. 이 자리에 신이 와야 할 이유는 없다. 단지 특정 행위로 인해 발생하는 고통의 크기로도 충분히 죄를 판단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으면 미련 없이 끝이라는 겁니다. 소멸된다는 겁니다.

 또 어떤 이들은 “죽으면 윤회한다”라고 믿습니다. 죽으면 다음 세상에서 다른 생명체로 환생해서 생명을 존속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업보에 따라 윤회를 거듭하다가 수억 겁을 지나서 윤회의 틀을 벗어나 열반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죽으면 영적인 세계(이데아 세계)로 돌아간다”라고 믿습니다. 죽으면 영혼이 육체의 감옥을 떠나서 영혼의 본래 고향인 이데아의 세계로 귀향한다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이들은 “죽으면 하느님 품으로 가서 영원한 삶을 누린다”라고 믿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온 행실(믿음)에 맞갖은 영원한 삶을 누린다는 신념, 곧 그리스도교의 내세관입니다. 

 과연 어느 답이 맞는 걸까요? 사람마다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하느라 팽팽하게 맞섭니다. 그런데 대체로 둘째부터 넷째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인생을 보다 진지하고 보람되게 살려고 하는 반면 첫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인생을 실컷 즐기겠다 ‘는 자세를 취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런 사람들을 빗대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내일이면 죽을 테니 먹고 마시자’고 해도 그만일 것입니다.‘ (1 코린 15,32 ; 공동번역)”(309P)


 아주 지독한 선입견 아닐까? 정말 그럴까? 종교인들은 비종교인을 말할 때 쉽게 이렇게 말을 한다. 하지만 위의 문장에서 ‘즐기겠다’라는 표현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여지는 충분하다. 독서를 즐길 수도 있고, 연구를 즐길 수도 있으며, 운동이나 또는 아주 거창하게 인류 행복을 위한 노력을 즐길 수도 있다. 반대로 종교인들이 ‘신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인간에게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그런 경우를 수없이 보았고, 지금 현재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벌어지고 있다. 자신이 믿는 종교를 전파하겠다며 신체적, 정신적 폭력을 휘두르는 종교인도 있고, 종교적 만족을 위해 온몸에 폭탄을 두르고 끔찍한 테러를 자행하는 이도 있으며, 종교를 앞에 내걸고 부정축제를 벌이는 지도자 역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심지어 신도와 부적절한 관계를 지속하는 종교 지도자에 대한 기사는 이제 식상할 정도다. 


 이 책이 종교적인 내용이 주가 되다 보니 리뷰라고 쓰면서 계속 말꼬리를 잡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종교’에 대한 내 입장은 이렇다.

 “종교, 신을 믿는가에 대한 문제는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태도일 뿐이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에서 희망을 찾고 싶어 하는 사람이 갖는 신념일 뿐이다. 신이라는 존재는 증명될 이유도, 증명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신을 믿는가’에 대한 결정은 어느 누구의 간섭도 없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선택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의 관점에 따라서 나는 무신론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통섭의 식탁 - 최재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