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혼자 사는 남자

나를 위한 변명

by NoZam

수민이가 초등학교 1학년 입학하고 나니 학부모의 입장에서 학교에 방문할 일이 생기곤 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어머니께서 대신 다녀오시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내가 가야 할 일이 생기곤 한다. 그러다 보니 다른 학부모들과 인사를 건네게 되고, 한 동네 살다 보니 종종 마주치기도 한다.

수민이가 처음 사귄 친구는 진희라는 아이다. 같은 반인 데다가 동네 문화센터에도 같이 다닌다. 수민이는 벨리댄스를 배우고 진희는 미술을 배운다.
진희엄마와는 문화센터에서 만나면 인사도 건네고, 아이들을 기다리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곤 했다.
어느 날인가 진희엄마가 다른 이야기 끝에 같이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한다.
“수민아빠, 연말이고 한데 같이 맥주나 한 잔 할까요?”
“네? 아... 전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에이, 술 못 마시는 남자가 어디 있어요? 그러지 말고 같이 한 잔 하시죠. 언제 할까요?”
“아뇨. 전 술 마시지 않거든요. 그리고 하는 일도 있고 해서 시간 내기가 좀 어렵겠네요.”
“아! 둘이 마시기 어색해서 그러시는구나? 그럼 다른 아이 엄마와 같이 마시면 되죠, 뭐...”

곤혹스러웠다. 아이 아빠라면 부담스럽지 않겠지만 아이 엄마와 술을 마시는 건 영 내키지 않았다. 다행히 아이들 강좌가 끝나는 바람에 이야기는 더 진전되지 않고 끝났다.

겨울방학은 대학 시간강사에게 바쁜 시간이다. 학생 평가도 해야 하고 다음 학기 강의 준비도 해야 한다. 나는 싸이월드에서 학생들의 과제를 관리하고 있었다. 따라서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들곤 한다.
학점 공지를 하기 위해 접속했다. 미니홈피 방명록에 새 글이 올라왔다는 아이콘이 보인다.
겨울방학이면 미니홈피 방명록에 글을 남기는 학생들이 종종 있다. 좋은 학점을 부탁하는 학생도 있고, 한 학기 동안 고생했다는 인사를 남기는 학생들도 있다.

미니홈피를 열었다. 방명록에 보이는 이름이 낯설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의 이름이 아니다.
[안녕하세요? 미니홈피 둘러보다가 우연히 들어왔네요. 반가워요. 저 진희엄마예요. 그런데 지난번에 맥주 약속하면서 날짜와 시간을 안 정했네요. 언제로 할까요?]
당황스러웠다. 우선 학생들이 보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들었고, 어떻게 내 미니홈피를 알았을까 궁금했다. 싸이월드에서 아는 사람의 미니홈피를 우연히 보게 된다는 건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찾는 것보다도 백만 배쯤은 어려울 것 같다.

일단 비밀글로 잠그고 나서 댓글을 달았다.
[아, 진희어머님이시군요. 그때 말씀드렸듯이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게다가 요즘 한창 바쁜 시기라 시간 내기도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곳은 제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오는 공간입니다. 앞으로 글을 남기시려면 비밀글로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대놓고 쓰지 말라고 할 수는 없고, 이 정도면 알아듣겠지 싶었다.
그런데 비밀글로 남기라는 말을 오해했는지 시도 때도 없이 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수민아빠는 왜 저와 맥주 마시는 걸 피하시는 거죠? 아이들 이야기도 하면서 같이 한 잔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제가 오늘은 술을 한 잔 했습니다. 술 마신 기운에 제 넋두리 좀 하겠습니다.
제 남편과는 나이 차이가 꽤 납니다. 연애로 결혼을 했지만 남편이 꽉 막힌 성격이라 집안에서는 답답함을 느끼곤 합니다. 애가 둘이나 되다 보니 친구들 만나기도 쉽지 않고 말이죠.
그러다 수민아빠를 알게 되고 말도 잘 통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참 좋았는데 이렇게 술 마시자는 걸 피하시니 서운합니다..........]
정말 술 마시고 주정하는 것, 딱 그 꼴이었다.

어떤 날은 앞뒤 자르고 마치 일기장에 일기 쓰듯 글을 남기기도 했다.
[오늘은 아이 아빠와 싸웠다. 도대체 나를 부인으로 생각하고 있기는 한 걸까? 아니면 집안일하는 가정부쯤으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
내용을 보니 가정문제로 고민이 많은 것 같았다. 섣부르게 댓글을 달기도 조심스러워 그냥 방치해두었다. 가끔 비밀글로 올리지 않은 경우에는 비밀글로 돌리기는 했지만 삭제하지는 않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그 해 겨울이 지나갔다. 진희엄마가 부담스러워서 가끔 문화센터에도 어머니께서 대신 가기도 하셨다.
한동안 마주치지 않다 보니 방명록에 글 올리는 것도 시들한가 보다. 다행이다.

신학기가 되었다. 강의를 끝내고 제법 이른 시간에 집에 돌아왔다. 집 앞 골목길을 돌아서는데 누군가 인사를 건넨다.
“어머!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일찍 들어오시는구나.”
이런! 진희엄마였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저 수민아빠한테 화난 거 아세요?”
“네? 저한테 화가 나요? 왜요?”
“왜 긴요. 같이 술 한 잔 하자고 했다가 거절당하고, 미니홈피 방명록에 글을 그렇게 남겨도 댓글 한 번 안 다시고……. 아무래도 수민아빠한테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화났어요.”
저렇게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화났다는 말을 하다니 참 어울리지 않는다.
“그건 그렇고 미니홈피는 거의 안 쓰시나 봐요?”
“네. 전 학생들이 들어와서 보기 때문에 미니홈피는 안 쓰고 따로 블로그를 쓰거든요.”
“아, 그러시구나. 저도 블로그를 써볼까 싶은데 어디 쓰세요?”
“전 뭐 그냥 별로 유명하지 않은 블로그 쓰고 있어요.”
계속 어떤 블로그냐고 묻는다. 골목길에 마주 서서 길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영 어색하다.
“저... 그냥 이글루스라는 서비스 이용하거든요. 그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내가 사용 중인 이글루스 블로그는 정말 개인적인 이야기를 적는 인터넷 일기장쯤 되는 공간이다. 일기 쓰듯이 글을 올리다 보니 어릴 적 이야기며 결혼생활, 이혼에 관한 이야기까지 쓰고 있었다.

블로그라는 공간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기는 하다.
하지만 몇 년째 사용하면서 단 한 번도 아는 사람이 다녀간 적 없는 공간이었다. 그렇기에 맘 편하게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편하게 올리기도 하고, 익명의 누군가가 달아주는 댓글에 격려를 받기도 한다.

블로그에 접속했다.
새로운 댓글이 달렸기에 확인을 했다.
[다 읽었다.]
달랑 네 글자뿐인 댓글이 왠지 섬뜩하다.
별명을 확인하니 [장미의 이름으로]란다. 어? 어디서 봤더라?
별명을 클릭하고 들어갔는데 신규회원이고, 블로그에는 아무런 글도 남겨있지 않다.
‘장미의 이름으로? 이걸 어디서 봤더라?’
아... 진희엄마의 싸이월드 미니홈피 이름이다.
이글루스를 알려준 게 화근이었다.
내 블로그에 댓글을 남기기 위해 번거로운 회원가입까지 한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남긴 댓글이라는 것도 하필이면 이혼, 아이와 함께하며 느끼는 것들을 적은 글에 달려있다. 마치 내가 발가벗겨진 느낌이었다.
‘아니? 이 여자가 미쳤나? 왜 남의 사생활을 이렇게 침범하고 지랄이야?’
결국 수백 건에 달하는 글을 모두 비공개로 돌려놓고 블로그를 폐쇄해버렸다.

그 이후 진희엄마를 만날 일을 만들지 않았다. 학교에 갈 일이 있어도 담임선생님과 전화통화를 해서 다른 학부모가 돌아가고 난 뒤에 갔다. 문화센터에는 발도 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 동네에 산다는 건 언제든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것 아니던가?
블로그를 닫은 지 반년이 넘어서 진희엄마를 만났다.
진희엄마는 마치 언제 만나든 만나기만 하면 이야기를 하려고 벼르고 있었는가 보다.
“전에 제가 댓글 남긴 것 때문에 블로그를 닫으셨나 봐요? 그렇게 기분 나쁘셨어요? 전 우연히 수민아빠 블로그를 찾게 돼서 반가워서 그런 건데...”
“인터넷에서 아는 사람을 우연히 찾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죠. 전 인터넷을 한지 십오 년이 넘었어도 지금까지 우연히 아는 사람 미니홈피나 블로그에 접속해본 적 없는데, 진희엄마는 두 번씩이나 우연히 들어오셨어요?”
“저 때문에 기분 나빠서 닫으신 것 맞는구나. 죄송해요. 그런데 제 기분도 이해해주셔야죠. 제가 댓글 남기자마자 그렇게 딱 닫아버리시면 제 마음이 어떻겠어요?”

‘그럼, 홀라당 발가벗겨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당황스러운 난 기분이 어떻겠냐?’ 차마 말로 하진 못하고 돌아섰다.


내 뒤통수에 대고 그녀가 한마디 한다.

“너무 그렇게 거리 두지 마세요. 저는 아는 사람이 생기고 말도 잘 통하고 그래서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요.”

그 이후 진희엄마는 다시 싸이월드의 미니홈피 방명록에 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내 블로그에 적은 글들을 다 읽어서 친해졌다는 느낌이 들었을까? 진희엄마가 남기는 글들은 황당하고 어이없을 정도로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이런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수민아빠는 왜 이혼하셨어요? 이혼하고 혼자 사니 좋으세요? 이것저것 눈치 볼 것도 없으니 편하세요?]
황당하고 어이없는, 당황스럽기까지 한 글이었다.

남편과 성격이 맞지 않고, 경제적으로도 문제가 있어서 이혼을 생각하고 있다고 적었다. 직접 이혼을 겪어본 입장에서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 간단하게 댓글을 달았다.
[이혼은 자신들보다 자녀들에게 더 큰 상처를 남깁니다. 힘들어하는 수민이를 보며 많이 후회했었습니다. 아이들을 생각해서 잘 생각하고 결정하세요.]

내가 댓글을 달아주어서였는지 그 뒤로 진희엄마는 더 노골적인 내용을 더 자주 남기기 시작했다.
[어젯밤에는 남편이 겁탈하듯 부부관계를 요구해서 정말 힘들었거든요.]
[아침에 아이들 학교 보내고 외출 준비 다 끝내고 나가려는데 남편이 강제로 하는 바람에 옷이며 화장도 다 망치고, 결국 외출도 포기했어요.]
[관계를 하면서 남편이 하도 소리를 질러서 아이들이 다 깼어요.]
[시부모는 나보고 여자 같지 않대요. 남편이 바람이라도 피우면 어쩔 거냐고 하네요. 속상해서 눈물이 나요.]
[남편이 바람이라도 난 걸까요? 안 그러던 사람이 꽃다발을 사들고 오지 않나, 옷에서는 여자 화장품 냄새가 나고...]

참다 못한 나는 결국 진희엄마의 방명록에 글을 남겼다.
[이혼을 생각할 만큼 심각한 상황이시라기에, 같은 경험을 한 입장에서 도움이 될까 싶어서 댓글을 남긴 것이었습니다. 요즘 올리시는 글을 보면 내용이 너무 당황스럽습니다. 진희엄마 입장에서 누군가에게 말 못할 고민들을 털어놓으시는 걸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입장에서는 참 불편합니다. 앞으로는 글을 남기지 않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도대체 왜 진희엄마 아빠가 어떻게 부부관계를 갖는지 알아야 하죠?
남편이 겁탈할 것 같아서 무서우시면 경찰에 신고를 하시던지, 소리 지르는 게 신경 쓰이시면 입을 틀어막으세요. 옷 입고 하는 바람에 곤란하시다면 옷을 벗으시면 될 것 아닙니까?
앞으로는 남편이나 아이들에게 보여줘도 괜찮을지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제게 보내시는 것보다 남편에게 메일을 쓰세요. 그게 두 분을 위해 더 나을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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