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홀아비로 산다는 것

나를 위한 변명

by NoZam

“글쎄, 전 여자 안 만난다니까요.”
평소와 다르게 단호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사실 어머니야 무슨 잘못이 있으랴.
이혼하고 혼자 사는 아들내미가 궁상맞아 보이기도 했을 것이고, 주위에서 재혼 이야기를 건네는 사람이 있다 보니 한마디 건넨 것일 뿐…….

아내와 헤어진 후로 한 동안 정신없이 살다 보니 훌쩍 오륙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주위에서 중신을 서겠다는 말들이 오고 간다.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직 그럴 생각도 없고, 준비도 되어있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정중하게 거절을 했다.
문제는 나의 그런 대답을 말 그대로 “예의상” 하는 말 정도로 취급하고 밀어붙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아예 날짜와 시간, 장소까지 정해서 통보를 받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어머니께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시라’고 말씀을 드렸었다.
하지만 여전히 주위에서는 ‘참한 색시 하나 소개할 테니 만나보라’는 말을 듣는다.

언젠가 딸아이가 다니는 피아노 학원 원장에게서 중매를 서겠다는 말을 들었다. 극구 사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문자가 왔다.
[수요일 저녁 8시, 우리 은행 2층 수 커피숍. 깔끔하게 입고 나오세요.]
한숨을 푹 내쉬고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 수민이 아빤데요.”
“아! 네, 수민이 아버님. 문자 확인하셨죠? 그 날 멋지게 하고 나오세요. 이 친구가 보기보다 눈이 높거든요. 하긴 그래서 아직 결혼도 못 했지만... 호호호”
내 말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한참을 떠든다.

결국 목소리를 높였다.
“원장님! 제 말 좀 들으세요.”
“네? 아... 네, 말씀하세요.”
“죄송한데요. 전 여자 만날 생각 없거든요. 지난번에 말씀드렸는데...”
“에이, 왜 그러세요? 저랑 친한 친구예요. 사람도 좋고, 나이는 마흔이지만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라니까요. 제가 아버님 생각해서 소개해 드리는 건데...”
또 내 말을 자르고 말이 이어진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전 재혼 생각이 없습니다. 그때도 말씀을...”
“아버님 마음 알아요. 그러니까 이 친구 꼭 만나보시라는 거죠. 막상 만나보시면 마음이 달라지실 거예요. 이 친구가 마음이 참 착해요. 게다가 성격도 억척같아서 생활력도 있고 음식은 또 얼마나 잘 한다고요. 진짜 친구로서 아까운 애예요. 그러니까...”
“전에도 같은 말씀하셨거든요. 그리고 그때 저도 생각 없다는 말씀을 분명하게 드렸고요. 그런데 이렇게 일방적으로 약속을 잡으시면 어떡합니까? 약속은 취소하시고...”
“아버님, 이 친구도 없는 시간 겨우 낸 거라니까요. 일단 만나보세요. 만나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마음도 통할 거고요. 같이 맥주라도 한 잔 하시면서 대화를 해보시면 좋겠네요. 아, 커피숍 건물 지하에 맥주집이 있어요. 그러니까 커피숍에서 만나서 인사 나누시고 자리를 지하 호프집으로 옮겨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원장님, 저 그날 시간도 없고요. 만날 마음도...”
“어머! 바쁘시구나. 그럼 목요일로 하죠, 뭐. 목요일... 괜찮으시죠? 목요일 같은 시간에...”
결국 이야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있었다.
“원장님,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해야 합니까? 전 여자 만나고 싶은 생각 없거든요.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요. 친구 분께는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에이, 그런 말을 제가 왜 전해요? 직접 만나서 하세요. 직접..., 만나보시면 안다니까요. 그 친구 진짜 진국이거든요. 사람들이 눈이 삐어서 못 알아보는 거지, 아버님도 이 기회에 좋은 여자 만나셔서 새 출발하셔야죠. 언제까지 그렇게 사실 거예요?”
“어쨌든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다시는 이런 문제로 전화하지 마세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피아노 학원 원장이 친한 친구라며 소개시켜 주겠다며 계속 연락을 했었다. 나는 번번이 생각 없다고, 괜찮다고 거절을 했었는데 급기야 일방적으로 약속을 통보받는 사태에까지 이른 것이다.

전화를 끊고 한숨 돌리는데 또 문자가 들어왔다.
[아버님, 그럼 조금 더 생각해보세요. 약속은 좀 미룰게요.]

도저히 전화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피아노 학원엘 찾아갔다. 원장을 만나서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했다.
“계속 이러시면 제가 불편해서 수민이 피아노 학원을 옮겨야겠습니다.”라는 말까지 꺼내고 나서야 겨우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끝났다고 생각을 했는데, 원장이 어머니에게 전화를 한 모양이다.
“애비야. 수민이 피아노 학원 원장이 너 중매 서겠다는데...”
나도 모르게 어머니에게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글쎄, 전 여자 안 만난다니까요.”

담배며 음료수를 사러 동네 슈퍼엘 갔다.
들어서니 슈퍼 주인 아주머니가 다른 중년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야 할 것들을 고르고 있는데 그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알지? 조 앞에 있는 피아노 학원, 그 원장 친구 중에 노처녀가 있대. 시장에서 장사를 한다는데...”
“아, 그 옷가게 사장? 그 치가 아직 처녀야?”
“응, 그렇대. 그 친구 나이도 있으니까 제대로 시집 가긴 글렀잖아. 그래서 원장이 딸 하나 딸린 홀아비 중신을 설려고 했는데 남자가 거절했대.”
“그래? 아니 홀아빈데 처녀장가를 싫다고 했단 말이야?”
“그렇대. 뭐 말 들어보니까 피아노 학원 다니는 아이 아빠라는데, 이혼한지 몇 년 됐나 봐. 그런데 약속까지 잡았는데 싫다고 했대.”
“어머! 누구야? 뭔 홀아비가 처녀장가를 마다해?”
“싫다는 걸 원장이 밀어붙였나 봐. 그러다가 남자가 싫다고 난리를 쳤대.”
“웃긴다. 홀아비가 처녀장가면 감지덕지지, 그걸 마다해? 왜 그랬대?”
“몰라. 만나보지도 않고 거절했다는 걸 보니까 여자가 맘에 들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근데, 그 옷가게 사장이 좀 뚱뚱하지 않나?”
“맞아. 너무 뚱뚱해서 결혼 못했다는 말도 있고, 결혼 못해서 스트레스 때문에 뚱뚱해졌다는 말도 있고...”
“만난 다음에 싫다고 하는 것보다는 낫네. 그런데 그 남자 누구지?”
“글쎄, 누군지 모르지만 처녀장가를 싫다고 했다는 걸 보니 아직 멀었지, 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동네에 소문이 나니까 이렇게 되는구나 싶었다.
그냥 담배만 한 갑 사들고 나왔다.
“뭘 그렇게 고르다가 그냥 가요?”
“네, 음료수를 좀 사려고 했는데 제가 마시는 게 없네요. 안녕히 계세요.”

가게 문이 막 닫히는 사이를 뚫고 주인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저 양반도 혼자 사는데, 누구 괜찮은 여자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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