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내 옆자리

나를 위한 변명

by NoZam


친구 녀석은 나에게 진지하게 재혼을 권유한다.


뭐, 이혼한 남자에게 재혼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어디 그 친구 녀석뿐이겠는가? 하지만 나에게 이 친구의 권유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만큼 가볍게 흘려들을 수 없는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고등학교 시절에 만나서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마흔 몇 해의 절반이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항상 함께했던 친구다.

내가 아이 엄마와 연애하던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고 결혼식 사회를 서 주었으며 이혼 서류의 증인 란에 자신의 아내와 함께 나란히 이름을 적었던 녀석이 바로 이 친구다.

어쩌면 이 친구는 나의 결혼과 이혼에 남모를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이야기를 할 때는 그렇지 않다가도 재혼 이야기를 꺼낼 때는 제법 진지하게 말을 한다.


두어 달쯤 전이었을 것이다.

이 친구의 딸이 수민이와 동갑인 데다가 둘이 꽤 친하다 보니 가끔 가서 둘을 만나게 해주기도 한다.

그 날은 아마 일요일이거나 공휴일이었을 것이다.

점심 때 수민이와 함께 이 친구네 집에 놀라갔다. 두 딸은 방 안에 틀어박혀서 신나게 놀고 있었고 나는 거실에서 차를 마시며 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친구의 아내 역시 나 어릴 적 한 교회에 다녔었고 한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꽤 친하다.

그 날은 아마도 이 친구가 작심을 하고 말을 꺼낸 것 같다. 게다가 그의 아내도 옆에서 연신 거들고 있어서 쉽게 말을 자를 수가 없었다.

“내가 여동생처럼 아는 여자가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이혼을 했거든. 지금 나이가 우리보다 네 살 정도 아래이니까 나이차도 적당한데 한 번 만나볼래?”

나는 눙치듯 이렇게 말을 했다.

“왜? 그 여자가 외롭대? 그래서 연애라도 할 상대가 필요한 거야?”

“장난치지 말고 진지하게 들어라. 내가 보기에 둘이 잘 어울릴 것 같아. 한 번 만나봐라.”

“예쁘냐?”

“우리 나이에 여자 얼굴 뜯어먹고 살래?”

“연애를 하려면 예뻐야지.”

“너 자꾸 그런 식으로 말 돌릴래?”

“너도 알잖아. 나 지금 재혼이니 뭐니 할 상황도 안 된다. 네가 자꾸 그러면 나 부담스럽다니까...”

옆에서 이 친구 아내도 한마디 거든다.

“그러지 말고 만나봐. 누구는 다 준비해놓고 사귀고 결혼하고 하나? 더구나 서로 한 번씩 아픈 경험도 있고 하니까 마음만 맞으면 조촐하게 하면 되는 거지. 그 사람 나도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성격도 좋고 생긴 것도 그만하면 예쁘지, 뭐.”


쉽게 말이 끝날 것 같지 않다.

“야. 잠깐만, 너무 그렇게 몰아붙이지 마라.”

난 슬그머니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담배를 한 대 물고 아파트 단지를 둘러보았다.

친구 녀석은 그 새를 못 견디고 나와서 옆에 앉는다.

“넌 왜 그렇게 나 재혼 못 시켜서 안달이냐?”

“그러는 넌 왜 재혼 못하겠다고 난린데?”

“뭐, 나 결혼할 때 사회도 보고, 이혼할 때 증인 란에 이름도 쓰고 해서 책임감이라도 느끼는 거야?”

“왜? 그렇다고 하면 만나볼래?”

손에 들고 있던 사진 한 장을 불쑥 내민다.

“자. 봐라. 이 정도면 미인이잖아. 일단 한 번 만나봐. 서로 이야기를 해봐야 연애를 하든, 재혼을 하든 할 것 아냐?”

“내가 말했지? 난 재혼 생각 없다고..., 내가 재혼할 생각했으면 벌써 여자 만났어. 지금 이렇게 부모님, 수민이하고 사는 것도 버거워.”

“애를 생각해서라도 재혼을 해야 하는 거 아냐?”

“글쎄? 난 잘 모르겠어. 솔직히 내가 여자 만나서 재혼한다고 하면 어쨌든 수민이가 가장 크게 상처받을 건 당연한 거 아니겠냐? 제 엄마랑 헤어질 때 받은 상처도 클 텐데 내가 다른 여자를 데리고 와서 엄마라고 부르라고 하면 애가 어떻겠냐?”

“그럼 언제까지 혼자 살 건데? 그리고 혼자 살면 수민이가 상처 안 받고 잘 큰데? 엄마가 없는 아픔도 있잖아.”

“엄마가 없기는 왜 없어? 자주 만나지 못해서 그렇지.”


이야기는 계속 겉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단 한 번 만나봐. 좋은 사람이야. 서로 같은 경험을 했으니 그런 부분 때문에 부딪힐 것도 없잖아? 직장 생활하면서 혼자 살고 있어. 내 주위에 이혼한 남자는 너 하나고, 이혼한 여자는 그 친구 하나야. 그러니 둘이 만나면 좋겠다 싶어서 그런 거야. 전에 메신저로 이야기 나누다가 네 이야기를 했더니 한 번 만나보겠다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시간 내서 둘이 만나 봐.”


친구가 건넨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나이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얼굴에 선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모습이다.

“사람 좋게 생겼네. 생긴 것도 이만하면 미인 소리 들을 만하고...”

“그렇지? 그러니까 만나.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잘 통할 것 같아.”


사진을 돌려주었다.

“됐다. 난 생각 없네. 네가 이런다고 맘 바뀔 건 없어.”

“넌 어릴 때는 그렇게 여자를 밝히더니 정작 여자가 필요한 나이에 왜 그러는데?”

“글쎄? 어려서 여자를 많이 만나봐서 그런가 보지.”

“왜? 아직 수민이 엄마를 못 잊는 거냐? 그래서 그러는 거야?”

“그런 건 아니고, 아까 한 말 그대로야. 난 지금 여자 만나서 재혼할 겨를도 없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거든. 내가 싫은데 어떻게 해? 한 번 실패했는데 섣부르게 덤비는 것도 안 내키고...”


그 날 이후로도 이 친구는 종종 같은 말을 꺼낸다.

난 여전히 “생각 없다.”고 일축하지만...


언젠가 읽었던 책에서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사람에게는 이성을 갈구하게 하는 호르몬이 있다고 한다.

그 호르몬은 결혼을 하게 되면 점차 수가 줄어들어서 결혼 후 몇 년이 지나면 거의 생성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이혼을 하게 되면 다시 호르몬의 분비가 왕성해져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 결혼 전의 수준으로 되돌아간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거의 없던 호르몬이 다시 활동을 하게 되는 것이므로 신체적으로는 오히려 결혼 전보다 더 이성에 관심을 갖게 되기도 한단다.


솔직히 말을 하자면 나 역시 여자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건 사실이다.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예전과는 달리 여자들에게 눈길이 가기도 하고,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여성을 보면 슬금슬금 훔쳐보기도 한다.


하지만 여성에게 관심을 갖는 것과 새로운 여성을 만나서 연애를 하고 재혼을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재혼이라는 단어가 갖는 무게는 제법 묵직하다.


수민이에게 새로운 엄마가 생긴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아이에게서 제 엄마를 떼어냈을 때 받았던 상처의 흔적은 여전히 크다. 그런 아이에게 ‘이제 이 사람이 네 엄마다.’라고 말한다는 것은 또 다른 커다란 아픔과 혼란을 가져다 줄 것이다.


물론 전적으로 수민이 때문에 재혼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 무거움을 감당하는 것보다는 내 옆자리를 비워두는 것이 오히려 내게는 더 쉬운 선택이다.


언젠가는 진지하게 재혼을 고민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의 일이라는 게 장담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내일 당장 마음 맞는 여자를 만나게 될 수도 있을 것이고 몇 년, 혹은 몇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홀로 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이혼을 겪으며 받은 아픈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은 모습으로 남아있다.

내 옆자리는 지금도 비어 있고, 그 자리를 채우게 될 날이 언제일지는 모른다.

어쩌면 평생 빈자리로 남겨둔 채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슬그머니 방문을 열고 수민이가 들어온다.

“아빠. 나 잠이 안와. 나랑 같이 자자.”

“그래? 그럼 아빠가 재워줄게.”

“응, 고마워. 옛날 얘기도 해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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