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잠수함의 훅 당기는 북리뷰
제텔카스텐 - 글 쓰는 인간을 위한 두 번째 뇌
숀케 아렌스 (지은이), 김수진 (옮긴이) 인간희극 2021-05-20 원제 : How to Take Smart Notes (2017년)
생각해보니 나는 어릴 적부터 꽤나 메모를 좋아했던 것 같다.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친구들이 내 앞에서 말 함부로 못 하겠다고 투덜거리곤 했다. 옆자리에 앉은 내가 끼적거려놓는 통에, 나중에 수첩 들이밀면서 날짜와 시간까지 짚어가며 “네가 이런 말을 했었고 내가 적어 둔 거야.”라고 하면 꼼짝할 수 없다고 했었다.
대학 시절에는 데이트할 때 마신 음료수, 주고받은 이야기, 심지어 뽀뽀를 몇 번 했는지까지 다 적어두었던 기억이 난다. 그 수첩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아마 이사하는 와중에 잃어버렸으리라.
군 제대 후 우연히 교보문고에 들렀었다.
90년 초 겨울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모닝글로리라는 브랜드로 출시된 시스템 다이어리라는 걸 보곤 정말 말 그대로 첫눈에 반해서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3만여 원 가까운 비용을 지불하고 샀었고, 이걸 2000년대 중반까지 썼다.
그 다이어리는 지금도 낡은 모습 그대로 책꽂이에 있다.
내가 90년대 중반에 손에 넣은 뉴튼이라는 PDA는 디지털 기기이지만 손으로 글을 쓸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글을 지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구입을 했었고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 PDA 역시 늘 휴대해야 하는 메모지였다.
심지어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주제는 PDA의 사용자 인터페이스 연구였으니...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된 후로 한동안 에버노트를 썼고, 이리저리 돌고 돌아 지금은 단순 메모용으로 그냥 네이버 메모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고민은 참 많았다.
그간 그렇게 쌓인 메모는 정말 많은데,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쌓이다가 잃어버리기를 반복한 셈이다.
어쨌든 그런데 그런 메모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게 정말 쉽지 않다는 게 항상 문제였다.
얼마 전 자주 가는 인터넷 동호회 게시판에 “제텔카스텐”이라는 걸 소개하는 글을 읽었다.
평소 고민하던 메모에 관한 내용이라 글을 읽다가 책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주문을 했다.
내용은 사실 까다롭지 않다.
메모에 대한 기본적인 이야기와 함께 동기부여가 될만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방식을 선택하느냐라던가 특별한 노하우를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이 책은 독일의 사회학자 니콜라스 루만이 생전에 어마어마한 양의 책과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던 방법으로 그만의 독특한 메모 관리 기법을 꼽고 있다.
그의 메모 방식을 연구하고 정리해서 소개하고 있는데, 내용이 어렵지 않고 이 책에서 말하는 메모 관리 방법 역시 까다롭지 않아서 충분히 시도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습관이 되기까지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이 책에서는 어떤 메모 앱이나 프로그램을 사용하라고 권하지 않는다.
메모는 임시 메모, 문헌 메모, 영구보관 메모로 나누어 관리할 것을 제안하고 각각의 메모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에 대한 설명이 전부다.
뭔가 거창하고 대단힌 비밀을 숨겨둔 것 같았는데 약간 싱거운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큰 마음 단단히 먹지 않고, 지금까지 메모하던 습관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치지 않고도 충분히 시도할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노션이라는 서비스를 알게 되어 조금씩 익히고 있는 중이다.
노션에 일단 임시 메모, 문헌 메모, 영구보관 메모 항목을 추가해야겠다.
아! 이 책을 읽으며 느낀 아쉬운 점.
일단 표지, 내지를 비롯한 전반적인 책 디자인이 아쉽다.
표지의 이미지는 왠지 무료 이미지 사이트에서 다운로드하였을 것 같은 느낌이고, 본문 레이아웃은 일반적인 단행본이 아닌 논문을 펼쳐 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본문에 여백이 부족한 느낌이다. 한마디로 책 디자인이 내용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은 아쉬움이 남는다.
제텔카스텐은 메모 상자라는 뜻의 독일어라고 한다.
56P 도구란 이를 사용하는 사람의 능력만큼만 유효한 법이다.
62P 무언가를 공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그것을 글로 적어 읽힐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글로 표현되지 않은 아이디어의 역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108P 진정한 전문가는 계획을 세우지 않는 법이다.
132P 책의 저자와 강연의 연사가 정확하고 간단명료하게 표현할수록, 독자와 청중은 그를 이지적인 사람으로 여긴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179P 또한, 어떤 주장을 접하면 원래 출처를 항상 확인해야 한다.
192P 그러므로 어떤 텍스트를 정말로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의 첫 해석을 끊임없이 정정하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