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변명
중학교 2학년, 신학기가 되자 수민이가 진지하게 이런 말을 했다.
“아빠. 나 보컬 학원 보내주면 안 돼?”
예술 고등학교 보컬학과에 진학하고 싶단다. 그러려면 노래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단다. 예술 고등학교는 실기시험을 치르는데, 보컬학과는 노래를 불러야 하기 때문에 제대로 배웠으면 좋겠다고 한다.
아빠도 진지하게 고민을 해볼 테니 수민이도 조금 더 생각을 해보고 일주일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다.
생각해보니 수민이는 친구들 다 다니는 보습학원도 다녀본 적이 없다. 공부는 스스로 해야 한다는 생각에 수민이가 가고 싶어 하지 않는데 억지로 보낼 생각은 없었다. 너무 성적이 떨어져서 과외를 시킨 적은 있지만...
수민이는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벨리댄스를 배웠고, 2학년 때부터 수영을 배웠다. 전부 공부와는 무관한 것들이었다.
초등학교 오 학년 때쯤이었던가?
수민이가 장래희망을 바꾸었다. 그 전에는 화가가 되고 싶다던 수민이는 언젠가부터 가수가 되겠다고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빠, 난 가수가 될 거야.”라는 수민이의 선언을 나는 그냥 무심히 흘려 들었다. 이것 역시 한 번쯤 호기심에서 해보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중학생이 된 수민이는 본격적으로 가수가 되기 위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뭐, 그래 봤자 친구들과 노래방에 자주 가는 정도였지만 말이다.
그랬던 수민이의 “가수”라는 장래희망이 그냥 스쳐가는 관심 수준이 아니라는 걸 보컬학원에 보내 달라는 말을 들으며 알게 되었다.
약속한 대로 일주일이 지나서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보컬학원 가고 싶은 생각은 변함없는 거야?”
수민이가 종이 한 장을 꺼낸다.
수도권의 보컬학과가 있는 예술 고등학교 목록과 각 학교의 시험방식을 나름대로 정리를 해서 일종의 보고서를 만들어 온 것이다.
학교 곳은 밑줄로 표시를 해두었다. 도전해보고 싶은 학교란다.
이 정도의 열의면 보낼 만 하겠다 싶었다.
수민이 엄마와 잠깐 통화를 했었다. 나와는 헤어졌지만 여전히 수민이의 엄마인데, 이런 건 상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수민이 엄마가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아이가 꼭 가고 싶다고 하면 보내주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런데 성적이 너무 안 좋으니 공부 열심히 하라고 약속을 받으면 어떨까요? 얼마 전 친구에게 들은 이야긴데, 아이와 약속 내용을 정리해서 기록해두면 아이가 책임감을 느낀대요.”
수민이에게 물었다.
“아빠가 보컬학원 보내주면 수민이는 뭘 할 건데?”
배시시 웃으며 말한다.
“공부 열심히 할게요.”
당시 수민이의 학교 성적은 심각했다. 과목 전체 평균이 60점 수준이었고, 수학은 아예 포기한 상황이었다.
“그냥 말로만 열심히 한다고 말하지 말고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봐. 중간고사 때는 얼마나 성적을 올릴지, 기말고사 때는 어떻게 할지 생각해봐.
아빠한테 보여주기 위해 말도 안 되게 목표를 잡을 필요는 없어. 잘 생각해서 네가 할 수 있겠다 싶은 목표를 정하면 돼. “
그렇게 수민이가 정리해온 내용을 중심으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단순히 흉내만 내는 수준이 아니라 제대로 된 계약서를 만들었다. 수민이에게 계약서가 무엇인지 설명을 하면서, 각 문구는 어떤 의미인지 설명을 했다.
“고교 진학을 위한 보컬학원 교습비 지원에 관한 계약서”가 만들어졌다.
내용도 꼼꼼하게 정리했다.
“갑은 을의 보컬학원 교습비를 매월 지원한다.
을은 스스로 세운 목표에 따라 공부를 열심히 한다.
갑, 을 어느 일방이 계약을 이행하지 않을시 본 계약은 자동으로 무효가 된다. 등등... “
이렇게 작성된 계약서를 2부 출력해서 날인을 하고 간인까지 찍었다.
물론 갑, 을 각자 한 부씩 나누어 가졌다.
수민이는 정말 즐겁고 신나게, 그리고 열심히 보컬학원을 다녔다. 목이 쉬어서 켁켁 거리면서도 빼먹지 않았다.
중학생이 된 기념을 사준 책상은 그때까지 늘 잡동사니가 수북했었고, 수민이는 한 번도 그 책상에서 공부를 한 적이 없었다.
중간고사를 앞두고 수민이가 책상을 치우고, 교과서를 펴들고 앉아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변화였다.
중간고사 결과는 목표를 살짝 넘는 수준이었다. 계약사항 일차 통과!
사실 난 수민이가 스스로 세운 공부 목표를 이루는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애초에 높은 목표를 설정하지 않도록 이야기했었다. 수민이도 너무 높은 목표는 부담일 것이고, 따라서 중간고사는 조금만 노력하면 넘어설 수 있는 정도로 목표를 잡았으니 할 만했을 게다.
그때부터 수민이는 자못 진지하게 공부와 노래 연습을 병행하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 직전, 성적표를 들고 들어오는 수민이의 얼굴 표정이 환하다.
의기양양하게 성적표를 내민다. 전체 평균 90점을 넘었다.
“아빠. 담임선생님께서 나보고 예고 가지 말래. 이 정도로 실력이 늘었는데 계속 열심히 하면 서울대도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예고 가기에는 성적이 아깝대.”
물론 자신은 예고 진학을 포기하지 않을 거지만, 선생님께 그런 칭찬을 들으니 정말 기분이 좋단다.
수민이네 반 친구들은 거의 대부분 보습학원에 다닌다고 했다. 아니 요즘 중학생 치고 학교 수업만 듣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수민이는 하루 종일 학원에서 공부하는 친구들보다 더 나은 성적을 받은 스스로가 무척 대견스러운 모양이다.
요즘은 가끔 이런 말도 한다.
“아빠. 내가 왜 전에는 이렇게 공부를 안 했을까? 그때 조금만 공부를 했으면 지금 훨씬 좋은 성적을 받을 텐데...”
요즘 수민이는 학교 시험 일정까지 따져가며 스스로 일정을 짜서 공부를 한다. 심지어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보컬학원을 쉬기도 한다. 그토록 하고 싶어 하고 재미있어하는 보컬학원을 건너 뛸 정도로 학교 공부와 노래 연습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스스로 지켜나가고 있다.
처음 계약서를 쓸 때는 이렇게까지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노래 연습에 너무 몰두해서 공부를 등한시할까 봐 생각해낸 방법이었을 뿐이다.
그 결과가 생각보다 좋게 나오기는 했지만...
수민이가 이런 말을 했었다.
“아빠. 그 계약서 쓴 게 얼마나 신경 쓰였는지 알아? 그거 되게 부담되더라니까!”
이틀 전, 수민이는 보컬학원에서 입시 전 마지막 레벨 테스트를 받았다. 어젯밤에 들고 온 평가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리듬감이 좋고, 음정과 박자가 정확함. 발성이 조금 약하지만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고 발전 가능성 있음.” 200점 만점에 165점.
수민이 인생의 첫 번째 계약서는 “고교 진학을 위한 보컬학원 교습비 지원에 관한 계약서”이고, 그 계약은 여전히 유효하며, 지금까지의 결과는 무척 만족스럽다.
갑과 을 모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