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변명
이혼을 한 뒤 딸과 함께 살다 보니 아빠 노릇을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난감할 때가 있다.
수민이가 한 살씩 나이를 먹으면서 생활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수민이가 갓난아기였던 시절부터 목욕을 함께 했었지만, 초등학생이 되면서 따로 하게 되었다. 딸아이 속옷을 사는 게 어려운 일이라는 걸 실감하게 됐다. 언젠가 수민이가 생리를 시작하던 날, 결국 아이 엄마에게 전화를 했었다.
그렇게 조금씩 어려움이 커져가고 있었다.
아는 분께서 책을 한 권 내셨다고 한다. 제목은 “남자 삼대 교류사”.
이 책의 말미에는 입대한 큰 아들이 훈련소에서 보내는 기간 동안 아버지가 매일 쓴 편지를 소개하고 있다.
책 내용보다 나에게 더 큰 충격을 준 것은 바로 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쓴 편지”였다.
사실 편지의 내용이라야 별 것 없다.
편지를 쓴 아버지가 우리나라 정치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인지라 그 분의 매일이 나 같은 사람과는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 분 입장에서야 그런 것이 일상일 테고, 결국 매일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적고 아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내용일 뿐이다.
내가 이 편지 모음에 충격을 받은 건 “아들에게 매일 편지를 썼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까지 내 생각에 편지는 무언가 특별한 이벤트였다. 군대에서 한 번쯤 보내는 “부모님 전상서” 또는 연애할 때 쓰는 연서였다. 아주 가끔은 멀리 여행을 떠나서 자주 보지 못하는 가족에게 묻는 안부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책에서 만나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쓴 편지”는 그냥 하루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이야기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만일 내가 매일 수민이에게 편지를 쓴다면 어떨까? 당장은 몰라도, 시간이 흘러 먼 훗날 언젠가 편지묶음이 도움이 되는 날이 있지 않을까? 적어도 “아빠는 나에게 매일 사랑한다 말하고 있었다.”는 정도의 흔적이라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편지를 시작할 수는 없었다.
뭐랄까? 자신이 없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매일 편지를 쓴다?
일기를 쓰는 것도 아니고 매일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을까?
못 쓰게 되는 날이 오면 어쩌지?
그냥 써보기로 했다.
쓸 말이 없으면 쓸 말이 없다고 쓰면 되고, 쓰다가 지치면 그만 두면 되지. 만일 중간에 포기하게 된다고 해도 그동안 쓴 편지는 남을 테니...
처음 딸에게 편지를 쓴 날이 2011년 2월 7일 월요일이었다.
편지의 제목을 이렇게 썼다.
“수민이에게 쓰는 첫 번째 편지”
첫 편지여서 그랬는지 제법 길게 썼다.
그 다음날 쓴 편지는 “수민이에게 쓰는 두 번째 편지”
그렇게 내가 쓰는 편지의 제목은 정해졌다.
수민이가 초등학교 5학년 올라가던 해에 쓰기 시작한 편지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첫 번째 위기를 맞이한 건 그 해 11월 말이었다.
갑자기 감기몸살이 심해져서 일주일 정도 편지를 중단하는 일이 벌어졌다.
몸이 아플 때도 편지를 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꽤나 신경이 쓰였다.
몸살이 낫고 다시 편지를 쓰기 시작하면서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어쩔 수 없는 날에는 건너뛰기도 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억지로 쓰려고 하다가 지쳐서 포기하는 것 보다는 낫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편지를 쓰다 보니 몇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
우선 조급하게 수민이를 들볶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내 성격이 딸아이를 들들 볶는 성격이 아니기도 하지만, 밤에 편지를 쓰다 보면 대부분의 문제에 대해 내 스스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다.
편지라는 건 사실 받는 사람이 읽지 않으면 완성되지 않는 반쪽짜리 소통에 지나지 않는다. 편지를 쓰는 입장에서는 일방적으로 글을 쓰게 된다. 그 편지를 읽은 상대가 답장을 건네야만 완성되는 것.
하지만 일방적인 소통일지라도 편지를 쓰는 동안에는 상대방을 생각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며 “내가 이토록 수민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한 적이 얼마나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결국 편지는 내가 수민이에게 대해 깊게 생각하고 고민하는 시간인 셈이다.
아빠가 자신에게 편지를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수민이가 편지를 보여 달라고 했다. 내 무릎 위에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가끔은 다이어리를 가져가 읽다가 돌려주기도 했다.
한동안 꾸준히 편지를 읽던 수민이가 어느 날 이런 말을 한다.
“아빠. 앞으로는 이 편지 안 읽을 거야.”
“왜?”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읽어야 할 것 같아. 그래야 폭풍 감동을 받지.”
말은 제법 그럴듯하게 하지만 사실은 재미도 없고 지루하다는 뜻이었을 것 같다.
사실 무슨 재미있는 글을 그렇게 매일 쓸 수 있겠는가?
“내가 이렇게 매일 쓰는 편지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때 내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설령, 이 편지들을 수민이가 단 한 장도 들춰보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결국 이 편지들은 내가 수민이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고 있으니까...”
난 매일 워드 프로세서로 편지를 쓴다.
난 매일 블로그에 편지를 공개한다.
난 매일 다이어리에 볼펜을 꾹꾹 눌러가며 편지를 쓴다.
요즘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이 편지의 끝은 언제일까?
어쩌면 내일일지도 모른다. 십 년 뒤일지도 모르고, 내가 죽는 날이 될지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오늘도 난 천육백마흔아홉 통째 편지를 쓸 것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