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설명한 전각돌, 전각칼 외에 필요한 물품에 대해 정리해보도록 한다.
3. 흑먹 : 말 그대로 서예를 할 때 사용하는 바로 그 먹이다. 주로 인면(글 새기는 면)에 칠을 하거나 새길 글, 그림을 그리는 용도이므로 먹물을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큰 먹은 필요없다. 귀찮으면 연습용 먹물을 사용해도 무방하다. 다만 먹물의 경우 아교 성분이 많이 들어 있어서 약간 끈적거리는 느낌이 날 수도 있다. 당연히겠지만 먹을 직접 갈아서 쓰는 편이 훨씬 낫다.
4. 주먹 : 붉은 먹을 말한다. 흑먹과 함께 인면에 글을 쓰거나 할 때 사용한다. 주의할 점은 주먹 자체가 생산지에 따라 품질이나 색상, 먹을 갈았을 때의 느낌 차이가 많이 난다. 주먹 역시 갈아서 파는 먹물이 있다. 하지만 주먹은 먹을 직접 갈아서 만든 먹물과 차이가 많으므로 가능한 한 직접 갈아서 사용하는 걸 추천한다.
5. 쌍구 벼루 : 흑먹, 주먹을 갈 때 사용한다. 서예 할 때 사용하는 큼직한 크기의 벼루가 아니라 작은 크기에 먹을 갈고 먹물을 담아두는 공간이 작다.
6. 세필 : 두자루가 필요하다. 흑먹물용과 주먹물용...
이쯤에서 위에 소개한 물품의 사용방법을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가자.
우선 흑먹과 주먹을 잘 갈아서 먹물을 만든다.
인면에 새길 글자를 정한다.
인면에 흑먹, 혹은 주먹을 칠한다. 가능한 한 균일하게 먹물을 도포하는 편이 보기도 좋지만, 작업하기에도 낫다. 도포하는 데 사용하지 않은 먹물ㄹ로 세필을 적셔서 인면에 새길 글자를 그린다.
보통 도장을 찍었을 때 글자 부분이 붉게 찍히는 형태(양각)을 주문(朱文), 바탕 부분이 찍히는 경우를 백문(白文)이라 부른다. 말 그대로 붉은 글씨, 흰 글씨라는 의미겠지?
주문으로 새길 것인지, 백문으로 새길 것인지 정해서 그에 맞게 포치를 한다. 포치란 인면에 새길 글자를 써두는 걸 말한다.
획과 획 사이의 간격 등을 감안해서 보기 좋게 포치를 해야 한다.
어쩌면 전각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 바로 이 포치 과정이다. 포치만 제대로 하면 그 뒤에는 칼로 새기기만 하면 되므로...
게다가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상당히 신경쓰이고 귀찮은 작업이 될 수 있다. 다만 종이처럼 번지거나 찢어질 우려가 없으므로 몇 번이든 수정을 해도 된다.
7. 사포 : 사포는 인면을 다듬기 위해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필방에서 구입한 전각돌은 기본적인 치석(治石)이 되어 있다. 다만 전체적으로 기름을 먹인 상태라 인면 역시 표면이 매끄럽다. 전각칼을 쓸 때는 문제가 없을지 몰라도 포치를 하려면 이 기름막을 걷어내야 한다. 또한 간혹 인면의 마무리가 덜 된 경우도 있고, 보관하는 와중에 표면을 상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전각을 하다 보면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돌을 사용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돌을 사용하게 될 경우 표면을 다듬는 데 사용한다.
또는 나처럼 전각칼을 갈아서 사용하는 경우에도 유용하게 쓰인다.
내 경우, 사포는 80방, 320방 두가지를 사용한다. 우선 80방 사포를 이용해서 1차로 갈아낸 뒤 320방 사포로 곱게 다듬는다. 돌을 갈 때는 물을 적셔가며 사용하는 편이 좋다. 건조한 상태에서 작업을 하게 되면 날리는 돌가루를 감당하기 어렵다.
8. 한지 : 전각을 마친 뒤 찍어서 확인하는 데 사용된다. 한지는 종류와 가격대가 천차만별이지만, 너무 값비싼 걸 쓸 필요는 없다. 서예 연습용 한지 정도면 충분하다.
9. 강화 유리판 : 돌을 다듬거나 전각칼을 갈 때, 당연히 표면이 최대한 평평해야 한다. 이 때 가장 유용한 게 유리판이다. 가까운 유리 전문점에서 적당한 크기로 맞추면 된다. 아쉬운 대로 주방 식탁에 깔린 유리판을 이용해도 되지만, 작업이 끝난 뒤 치워야할 게 많아지기도 하고, 식탁으로 온통 물바다를 만들게 될 수도 있으므로 별도로 하나쯤 갖고 있는 편이 좋다. 사포 한 장이 다 올라갈 크기는 되어야 하므로 적어도 A4 사이즈보다는 충분히 커야 한다.
10. 인주 : 흔히 사무용품점에서 파는 인주보다는 필방에서 파는 인주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인주의 색상도 다양하다. 가장 흔하게 보는 붉은색도 종류가 다른데, 주황색에 가까운 밝은 인주부터 짙은 붉은색까지 있다. 또한 용도에 따라 검정색, 파란색 등 다양한 색상의 인주가 있다.
11. 롤러 : 나는 흔히 미술용품점에서 판매하는 화홍롤러라는 제품을 사용한다. 롤러의 크기가 너무 작으면 불편하므로 적어도 3~5cm 정도 크기의 롤러를 사용한다. 만일 큼직한 작품을 만드는 경우에는 그에 맞는 롤러를 사용하는 편이 좋다. 작품의 크기보다 조금 큰 것이 좋다.
12. 잉크 : 판화용 잉크, 유성 잉크 등을 사용한다.
약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원래 전각으로 만든 인장은 인주를 이용해서 종이에 찍으면 되므로 잉크를 이용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전각이 일종의 조각작품처럼 만들어지기도 하고, 전시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인장면에 인주가 뭍어 있다면 인장면을 정확하게 볼 수 없다.
또한 방각면(인장면이 아닌 옆면 등)에 글을 새긴 경우, 색상 구분이 안 되어서 감상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럴 때 잉크를 바르기도 한다.
또한 한지에 찍을 때도 먹물을 이용한 탁본이나 인주를 사용해서 찍는 경우, 깔끔하게 찍히지 않을 수 있다. 이럴 때 가장 무난한 방법이 잉크를 이용하는 것이다.
강화 유리는 이 때도 이용할 수 있다. 유리면에 잉크를 약간 덜어내고 11번에서 설명한 롤러에 뭍힌다. 그 뒤 롤러로 전각면에 잉크를 도포한다. 마지막으로 한지에 찍는데, 이 때 일반적으로 도장을 찍듯 찍게 되면 균일하게 찍히지 않는다.
전각 작품의 잉크 바른 면을 하늘로 향하게 해서 고정을 한 뒤, 그 위에 한지를 올린 다음, 흔들리지 않게 고정하고 작은 유리잔과 같은 걸로 잘 문지르면 된다. 나는 주로 아크릴로 만든 큼직한 주사위나 바닥면이 평평한 양주 스트레이트 잔을 이용한다. 철물점 등에서 파는 애자(사기 재질)를 이용하는 게 가장 나은데 이건 요즘 구하기 어려운 편이다.
13. 전각자전 : 전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한자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한문이다. 어찌 보면 부적에서 가끔 본 것 같기도 하다. 중국 진시황이 권력을 잡은 뒤 전국의 한자를 전서체로 통일했고 그 뒤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등의 서체가 시대를 달리하며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인장면에 한자를 새길 경우, 기본적으로 전서체를 사용하게 되므로 전서체 자전을 한 권쯤 갖고 있으면 좋다. 전각용 전서 자전을 보면 시대별로 인장에 사용된 전서체를 확인할 수 있으므로 유용하다.
14 : 인상 : 나를 가르쳐주신 전각 선생님께서는 인상은 사용하지 말라고 하신다. 손으로 잡고 새겨야 한다는 말씀이신데, 이게 생각보다 까다롭다. 당연히 손을 베일 염려도 있다.
큰 작품을 새길 때는 몰라도 작은 크기의 도장을 새길 때, 인상은 정말 유용하다. 전각돌을 고정하는 용도이므로 고정만 잘 되면 된다. 궂이 값비싼 고급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이 외에도 다양한 전각관련 상품이 있다.
인규는 인장을 찍을 때 정확하게 각도를 맞추기 위해 사용한다. 나무, 아크릴 등으로 T자 형태로 되어 있다.
인보집은 한지를 두겹으로 접어서 묶은 형태로 만든 일종의 공책이다. 자신이 만든 전각작품을 찍어서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일반적인 전각에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내 경우에는 단순히 글자만이 아니라 그림을 새기기도 하는데, 이럴 때 사용하게 되는 것들도 있다. 물론 표준화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작업을 하다 보니 이런 방법을 이용하는 것이므로 누군가에게 권할만한 방법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그림의 경우에는 보통 프린트를 해서 먹지를 대고 그린 다음 칼을 댄다. 따라서 먹지를 사용한다.
언젠가 블로그에서 본 것 중에, 레이저 프린터를 이용해서 출력을 한 뒤, 그걸 돌에 밀착시킨 다음 투명라카 등으로 충분히 적실 정도로 도포를 하니 레이저 프린트된 부분이 돌에 그대로 전사되는 걸 본 적 있다. 이 방법을 이용하면 꽤 편할 것 같기는 한데, 레이저 프린터가 없어서 시도해보지는 못했다.
대략 이 정도면 전각에 필요한 준비물은 다 소개한 것 같다.
다음 글은 모각(模刻)에 대해 소개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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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이미지 중에서 전각 관련 상품은 모두 서령필방(http://www.pilbang.co.kr)에서, 화홍롤러는 e-화방(http://www.ehwabang.com)에서 퍼왔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