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철학 - 모든 위대한 가르침의 핵심
올더스 헉슬리 (지은이) | 조옥경 (옮긴이) | 오강남 (해제) | 김영사 | 2014-07-14 | 원제 The Perennial Philosophy
인터넷 서점에서 이 책을 선택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제목이 매력적이었다. 최근 철학을 이야기하는 책에 관심이 가서 몇 권 읽던 중이었는데, 이 책은 마치 모든 철학의 처음과 끝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인상을 풍겼다.
다음으로는 올더스 헉슬리라는 저자 이름이었다.
멋진 신세계라는 책을 아주 오래전에 읽은 기억이 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말이다. 고전이라는 평을 듣는 소설을 펴낸 작가가 쓴 책이라니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책을 펼쳐들자마자, 내가 이 책을 고른 두 가지 이유가 모두 잘못된 선택 기준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소설가가 썼다고 볼 수도 없었고, 철학을 다루는 책도 아니었다.
물론 누군가는 신학이야 말로 궁극의 철학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영원의 철학이 정말 잘 고른 제목이겠지만...
이 책은 신과 믿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게다가 무척 두툼하다. 500페이지가 넘는다!
조금 과장되게 이야기하자면 세계의 모든 종교를 다루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 믿음, 종교, 기도 등등 신과 관련된 모든 공통적 사항에 대해 언급하고 이야기한다.
기독교, 가톨릭교를 비롯해서 동서양의 종교들을 비교했다고 할까?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 책은 역설적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인, 신을 믿는 이들은 자신이 믿는 신만이 유일하다고 말한다. 기독교에서 믿는 하나님과 이슬람 종교에서 믿는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인 것 같지만 같지 않고,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의 선에 도달하는 것과 인도 종교철학에서 말하는 것 역시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은 그 모든 종교를 다 다루고 있다.
서로 다른 신이라고 생각하고 각각 자신만의 종교가 최고라고 믿지만 사실 그 모든 믿음의 대상은 하나라는 이야기일까?
그렇다면 같은 왕의 통치를 받고 있는 백성들이 자신의 왕을 위해 몸 바쳐서 서로 죽이고 싸운다는 이야기인데, 참 아이러니하다.
이 책을 읽는 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내가 사긴 했지만, 내 관심사에서 살짝 빗나가 있는 주제라 구미가 당기지 않기도 했고, 이런저런 이유로 읽어야 하는 다른 책들이 있어서 ‘잠시 멈춤’ 상태가 되기도 했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신을 옹호하는(?) 대부분의 책들이 갖는 공통점이 있다. 이건 아마 종교가 갖는 특성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따지지 말고 믿어라”라는 주장이다.
제법 객관적으로 신을 증명하겠다고 주장하는 책들도 마찬가지다. 신이 있다는 것 자체를 논쟁의 대상으로 삼다 보면 당연히 논쟁이 끝날 수 없다. 그래서일까? “믿어라. 그 뒤 말하자.”라는 게 기본 전제가 된다.
하지만 존재 여부를 알지도 못하면서 믿는다는 건 분명 선후가 뒤바뀐 일이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갖는 한 가지 장점은 이런 것 아닐까 싶다.
특정 종교에 치우치지 않고 비교적 공통적인 요소들을 언급했다는 점이다. 물론 상대적으로 비중이 높은 종교, 기독교, 가톨릭교, 불교 등에 관한 내용이 많기는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것 같고, 모든 종교의 공통점을 골고루 이야기했다는 점이 그나마 마음에 든다.
이 책에서 내가 밑줄을 그은 문장 몇 개...
016P
물이 수소와 산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일상의 경험을 통해서는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다. 그렇지만 물에 극단적인 처리를 가하면 그 구성 요소들의 성질이 드러난다.
: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면 누구나 그 본성을 드러낸다. 그것은 지금까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내면의 모습일 가능성이 더 높다.
029P
“질병은 약의 이름을 외워서 치료되는 것이 아니라 약을 먹어야 치료된다.”
: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할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다는 것을 종종 보여준다.
036P
정치적 수준에서 단일성 unity을 숭배하는 것은, 개인적이고 영적인 수준에서 단일성을 추구하는 진정한 종교의 우상숭배적 대용품에 불과하다.
이런 식의 정치적 일원론은 사실상 소수에게 과도한 특권과 힘을 부여하여 다수를 억압함으로써 나라 안에서는 불만족을, 나라 밖에서는 전쟁을 유발한다. 그러나 지나친 특권과 힘은 자만, 탐욕, 허영, 잔인함을 위한 지속적인 유혹이 된다. 탄압은 공포심과 시기심을 초래하고, 전쟁은 미움, 고통, 절망을 야기한다.
: 대한민국의 비극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 눈길을 끈다.
054P
이름 없는 것에서 하늘과 땅이 생겼다
: 창세기에서 천지창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이 우주를 말로 창조했다는 이야기다. 나는 이걸 이렇게 본다. (인간의 관점에서) 세상은 둘로 나뉜다. 이름이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이름이 있다는 건 인간이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는 건 인간의 관심 밖이라는 말이다. 세상을 분간하고 각각에 이름을 붙이는 종족인 인간이 눈에 띄는 것들에 이름을 붙이면서 인간의 문명은 시작되었다고...
056P
주기도문의 시작 문구, 즉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Our Father who art in heaven’를 한 단어씩 분석함으로써 신성한 본성의 무한한 풍요로움에 대해 약간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신은 ‘우리의 것 Ours’이다.
: 놀랍지 않은가? 우리는 보통 인간은 신의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주님의 종이로소이다. 하나님 아버지...”이렇게 늘 말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전제는 “나를 위한 내 신”이다. 신이 내 것이 아니라면 그 뒤에 이어지는 모든 기도문은 효력정지!
057P
초월적이며 전능하신 인격신을 애정 어린 아버지로 여긴다면 상황이 훨씬 낫다. 그런 신을 진심으로 숭배하면 행위뿐만 아니라 인격이 변하며, 의식에도 어떤 변화를 일으킨다.
: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게 신이, 종교가 필요한 이유는 이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회적으로 위험하지 않은 인간, 함께 살기에 알맞은 인간으로 변화하기 위해서...
058P
“글은 그 사람이다. le style, c’est l’homme.”“
: 글을 쓴다는 건 나를 만드는 행위라는 말? 조금 더 신중하게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076P
에크하르트의 진술에서처럼 신은 무 nothing와 동일하다. 어떤 의미에서 그 등식은 정확하다. 왜냐하면 신은 분명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스코투스 에리게나가 사용한 표현을 빌면 신은 어떤 무엇이 아니다. 달리 말해서 근본 바탕은 거기에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낼 수 있을 뿐, 어떤 특징들을 가진 것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 나는 기본적으로 “신은 없다”고 믿는다. 만일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는 절대 인간 개개인의 영욕에 관여하지 않고, 따라서 자신의 입신양명이나 구원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150P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만을 사랑할 수 있으며,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것은 완전히 알 수 없다.
: 사랑은 인간에게 가장 큰 의미를 갖는다(고 믿고 산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한 생존 필수요소일지도 모른다. 사랑을 갖는다면 그 존재를 해치지 않는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는 적어도 그로 인해 그의 역량 범위 안에서 안전하다. 만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역시 나를 사랑할 가능성이 조금은 더 높아진다. 따라서 사랑한다면 살 수 있다. 목숨을 걸고 사랑해야 할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228P
신이 스스로 나타나고 그대에게 자명한 것이 아니라, 어떤 외적 증거를 통해 신을 찾거나 알고자 한다면, 지금이든 나중이든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 윌리엄 로
: 내가 근본적으로 종교에 대해 제기하는 문제가 이것인데, 신이라는 존재를 찾지도 알려 하지도 말라는 거다. 이건 분명 신의 목소리가 아니다. 신이라는 존재를 믿게 해서 그 믿음으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인간의 목소리다. 만일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분명코 인간이 신을 믿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는다.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내 보여주어야 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인간이 신의 존재 운운할 때, 사실은 신을 믿는다기 보다는 인간은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324P
세속적 목적의 권위는 본질적으로 끔찍한 수단의 사용을 정당화시켰다.
: 사실상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그 목적이 불행하게도 타인의 고통과 아픔을 요구할 경우, 비극은 시작되는 것.
367P
20세기는 무엇보다도 소음의 시대이다. 물리적 소음, 정신적 소음, 욕망의 소음, 우리는 이 모든 것에서 역사적인 기록을 세우고 있다. 놀랍지는 않다. 왜냐하면 현재 거의 기적에 가까운 우리의 기술적 자원들은 모두 침묵에 대항하여 공격을 퍼붓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모든 발명품 중에서 가장 인기 있고 영향력 있는 라디오는 이미 만들어진 소음이 우리 가정으로 흘러들어오는 도관에 불과하다.
공중으로 방송되거나 종이로 출판된 모든 광고물은 의지 will가 침묵을 성취하지 못하도록 하는 단 한 가지 목적을 갖고 있다.
: 소음에 대해 단지 소리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실 인간이 행하는 대부분의 행위는 의미 없는 소음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389P
사랑을 위해 고통받는 자는 고통스럽지 않다.
모든 고통을 잊기 때문에
- 에크하르트
: 난 분명 연애를 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사랑은 남녀 간의 연애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랑은 사실 고통스럽다. 자신의 안전과 생명을 보장하기 위한 것인데 어찌 쉽겠는가? 다만 그 고통을 잊을 수 있기에 사랑은 계속된다.
429P
그대 자신이나 그대의 범죄에 대해서 지옥처럼 생각하지 말라. 스스로를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우리 주님을 사랑하는 것 이외에는 결코 이런 것들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천상에도 그런 성자들이 많지만 일반적으로 그대 스스로를 죄인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 샤를 드 콩드랑
: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인정을 해야 신앙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관점이 철저할수록 믿음이 견고해진다. 믿음이 견고해진다는 것은 의존도가 높아지는 것이고, 의존도가 높아지면 끊을 수 없다. 마약과 같다. 즉 종교는 신이 아니라 신을 앞세운 인간이 다른 인간을 끌어들이기 위한 정교한 장치이다. 그 시작은 “나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그 부정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신을 앞세운다.
474P
자기 증오와 겸손으로 이끄는 자기에 대한 앎은 신을 사랑하고 알기 위한 조건이다.
: 자기에 대해 안다는 것을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고 긍정적으로 대할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의미라고 본다는 것과 모멸의 감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신을 받아들여야 할 전제라는 건 상당히 심각하게 생각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