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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Oct 13. 2017

사랑도 못해본 남자, 안데르센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덴마크  6


O 오덴세의 안데르센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1805.4.2-1875.8.4), 어느새 그가 서거한 지 142년이 지났다. 그 사이 그의 동화책은 성경책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렸다고 한다. 안데르센 동화책이 세계 15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파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안데르센은 덴마크 오덴세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두수선공, 어머니는 세탁부, 할머니까지 병원에서 청소부로 일을 해야 했다. 부모들의 가정형편이 어렵다 보니 안데르센 유년기에 부모들의 살아가는 모습은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더구나 안데르센의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시는 바람에 호구지책을 마련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 공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어린 시절 가난하게 자라면서 구걸까지 해야 했던 자신의 어머니를 소재로 안데르센은 ‘성냥팔이 소녀’라는 작품을 쓴다. 이외에도 유명한 여러 작품들이 그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소재로 작품화된다.     


1819년, 안데르센은 14살의 나이로 연극배우의 꿈을 품고 코펜하겐으로 간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꿈을 접어야만 했다. 그러나 다행히 후원자를 만나 가난 때문에 받지 못한 정규 교육을 뒤늦게 받게 되고 드디어 1828년, 23살에 코펜하겐 대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다.      


*오덴세 거리 한 귀퉁이에 안데르센 조각상과 동화작품 중 한 장면을 조각해 설치해 놓았다.

*오덴세 거리에 있는 안데르센 박물관 안내 간판과 안데르센을 벽화로 그려 장식을 했다.

* 오덴세에 있는 안데르센 박물관 입구



그 후 안데르센은 몇 편의 희곡과 소설을 쓰면서 작가로서의 재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고 돌아와 코펜하겐 뉘하운 20번지에 둥지를 튼다. 그리고 1834년 그곳에서 드디어 그의 첫 번째 자전적 소설 ‘즉흥 시인’을 발표한다. 그리고 1835년 5월 8일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는 제목으로 첫 번째 동화집을 발간한다.     


이 책에는 동화 156편이 실려있다. 이 책을 발간하면서 안데르센은 적지 않게 고민을 한다. 과연 이 이야기들을 문학적 장르라고 해야 할지, 그리고 자신을 소설가라는 호칭을 사용해야 할지 등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작은 소책자가 “동화”라는 장르로 불리면서 안데르센의 명성을 드높이고 유명 작가로 자리를 잡는 계기가 된다.     


그 후 안데르센은 175편에 달하는 동화와 14편의 소설과 단편소설, 그리고 50여 편의 희곡과 12편의 여행기, 그리고 800 여수의 시와 일대기 등 엄청난 양의 작품을 남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는 작품들은 주로 동화들, 예를 들면, ‘미운 오리 새끼’와 ‘백조 왕자’ ‘벌거벗은 임금님’과 ‘빨간 구두’, 그리고 ‘성냥팔이 소녀’와 ‘엄지공주’, ‘인어공주’ 등이다.     


여하튼, 이제 어느 정도 글을 쓰면서 입에 풀칠을 하게 되자 안데르센은 사교계에도 자주 출입을 한다. 다른 작가들과의 교류나 문화계 인사들 모임에도 자주 참석을 하면서 교분을 쌓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스웨덴 출신의 세계적 가수 제니 린드(Jenny Lind)가 코펜하겐으로 공연을 하러 온다.


그녀를 보는 순간 안데르센은 그만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만다. 연신 제니의 공연 모습만을 지켜보며 한숨만 짓던 안데르센이 마침내 제니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거의 2년여 만의 일이다. 하지만 제니는 아니나 다를까 안데르센에게 아주 멋지게 거절을 하고 만다.      


* (오른쪽) 제니 린드에게 보낸 안데르센의 친필 사인이 들어 있는 사랑의 메세지

* 15살의 나이차이가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신분 차이가 더 문제였다는...



1845년 제니는 공연을 마치고 사람들과 회식을 하는 자리에서 선언을 한다. “모든 덴마크 사람들 중에 딱 한 사람을 나의 오빠로 정할 것입니다”라고 말이다. 그녀는 연인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해 주는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오빠로서 안데르센을 선택한다니 기묘하지 않은가 말이다. 안데르센이 15살이나 나이가 많으니 그리 말해도  뭐라 달리 할 말이 없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제니는 결국 안데르센에게 쓰디쓴 사랑의 기억만 남겨두고 얼마 후 스웨덴으로 떠나간다.    


비록 안데르센이 여러 번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픈 욕망을 실현시킬 뻔도 했지만 언제나 그의 출신성분, 특히 당시 그의 사회적 지위와 그가 벌어들이는 소득의 미천함 등이 그의 동료나 친구들 세계에서 소외감을 느끼게 했다. 따라서 그에게 지체 높은 문화계 인사들과의 교류, 특히 그들과 연인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어쩌면 계급성이 강한 덴마크 사교계에서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호사스러운 것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역지사지라 했던가? 그런 그의 소외된 사회생활 때문에 오히려 안데르센의 동화는 더욱 숙성해지고 깊이를 더하게 된다. 그의 그런 서글픈 삶의 여러 모습들이 그에게는 또 다른 동화를 쓰고 만드는 좋은 소재로 작용을 했기 때문이다., 역시나 안데르센은 사랑놀음보다 글쓰기가 더 쉬웠던 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안데르센은 작가로서 거대한 상상력의 소유자였다. 안데르센은 그것을 스스로 자신에게 주어진 위대한 신의 선물이거나 또는 저주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안데르센은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모든 것이 흐르는 물처럼 모두 내게 그렇게 흘러드는 것을 느낀다. 모든 사물은 내게 거울처럼 반사되어 비치고 있어. 이런 것들은 반드시 내가 창의력을 발휘해 독자들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줄 수 있는 글을 쓰라는 위대한 신의 명령으로 느끼고 있다네.”(* 1855년 친구 에드바르드 콜린(Edvard Collin)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그렇게  숨 가쁘게 살아온 안데르센은 그의 작품을 통해 전 세계 어린이들과 친구가 된다. 그래서 못생긴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니라 성공한 ‘백조 왕자’가 되는데, 그만 그에게도 죽음이 찾아오고 만다. 안데르센은 70세를 일기로 지친 숨을 거두게 된다. 당시 전 세계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을 뿐만 아니라 덴마크 국왕 부부까지 친히 장례식에 참석해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안데르센의 삽화집, 그는 거의 대부분의 삽화를 직접 그렸다.

* 안데르센이 직접 그린 동화책 표지와 본문 삽화들



원래 연극배우가 되어 무대에 서기를 원했던 그의 꿈은 부족한 환경 때문에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꿈이 무너졌다고 포기하지 않고 무대 각본을 쓰기 시작했고, 각본이 보잘것없다는 평가를 받자 이번에는 시인이 되려고, 그리고 소설가가 되려고 직업을 바꾸더니 마침내 동화 작가로서 성공을 하게 된 사람, 안데르센.

    

당시 안데르센과 같은 시대에 독일에서는 괴테, 하이네, 그림 형제가 활약을 하고 있었고 프랑스에서는 빅토르 위고가, 영국에는 바이런과 디킨스가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안데르센은 이 사람들과 달리 동화라는 장르의 작품을 쓰고 있었기에 그 당시 비평가들은 안데르센에게 “아이들에게 빵 부스러기나 받으며 만족해하는 것은 좀 한심하지 않은가. 날개를 퍼덕이며 창공을 향해 높이 날아가면 좋을 텐데”라는 비아냥 조의 평을 한다.(*)      


그러나 이제 그의 사후 142년 동안 그는 한갓 빵부스러기나 주워 먹는 한심한 안데르센이 아니라 전 세계가 사랑하는, 창공을 높이 나는 그런 안데르센으로 자리했고, 성경책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을 가진 사나이가 되었다.


o 참고문헌

* 우라야마 아키토시(지음), 구혜영(옮김), 어른들을 위한 안데르센 동화, 2004, 북스캔, p.139.

- 안데르센 박물관, 안데르센 안내자료.




O 안데르센의 저작 활동과 달리 그에게는 또 다른 창의력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종이를 가위로 잘라 만드는 종이 공작이다. 이 놀이는 그만이 할 수 있는 분야처럼 정말 독창적인 사물을 만들어내고는 했는데 2차원적인 평면 종이가 그의 손이 닿으면 삼차원의 세계로 전환된다. 이처럼 종이공작은 아이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하는 대단한 놀이였다. 이런 종이 공작은 그 어떤 이론교육과 실습보다 어린이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놀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O 안데르센이 직접 만든 작품들 중 일부(안데르센 박물관에 전시중)

* (왼쪽) 오덴세 거리에 설치된 안데르센 박물관 안내간판이 안데르센의 종이공작 작품을 소재로 만들었다.

* (오른쪽) 안데르센 박물관 입구에 설치한 안데르센 제작물, 뒷배경은 안데르센 종이공작품을 설치한 것이다.

인간의 얼굴이 대칭이라서 종이공작도 대칭으로 만들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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