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덴마크 7
북해와 발틱해 사이에서 443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나라, 덴마크. 현재까지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들을 살펴보면, 덴마크 지역에 인간이 활동한 흔적은 1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적어도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가 겹치는 BC 10000년에서 BC 1500년 사이에 덴마크 주민들은 사냥이나 고기잡이로 생계를 유지했고, 점차 농사를 지으며 사는 정착생활로 전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BC 500년경에는 농경을 주로 하는 ‘앵글(Angles)’과 ‘유트(Jutes)’라는 부족이 처음으로 집단부락을 형성한다. 그런데 어떤 학자는 덴마크인들이 원래 스웨덴 지역에 살던 데인(Dane)족인데 추운 곳을 떠나 따뜻한 남쪽 덴마크로 넘어와 정착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 덴마크 역사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덴마크 현지역에 거주하던 원주민이 정확히 누구인지에 대한 논쟁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만 바이킹 시대를 지나며 지금의 덴마크 국가를 형성하고 발전해온 그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역사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회변동 현상 역시 그 사회의 문화와 사회구조의 형성과도 직접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기에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다.
그런 면에서 덴마크의 역사발전과정은 참으로 특이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공통점을 공유하면서도 상대적으로 근대국가로 발돋움하면서 나름대로 덴마크만의 고유한 문화적 발자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북유럽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문화적 기본 틀은 다름 아닌 공통의 북유럽 신화를 공유하고 바이킹이라는 역사적 과정을 함께 겪어왔다는 사실이다. 스칸디나비아가 바이킹 시대를 통해 북유럽만의 문화를 형성하면서 그들만의 사회구조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스칸디나비아의 문화적 전통 때문이다.
따라서 바이킹에 대한 관심과 문화는 여전히 그들 삶의 가장 큰 동력으로 자리하고 있고 오늘도 바이킹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그들에게 중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로스킬데의 위상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로스킬데의 의미를 알게 된다면 바이킹과 덴마크 역사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덴마크인들에게 바이킹 체험은 가장 즐겁고 유익한 역사공부이다.
10세기경 로마 가톨릭이 북유럽에 전파된다. 이 시기에 즈음해 덴마크의 옐링(Yelling) 지역을 중심으로 고름(Gorm) 왕조(936~958)가 형성된다. 고름 왕조의 1세(고름의 아들)가 되는 하랄(Harald) 왕조(958~986)는 아버지가 시작한 국가 통일을 완수하고, 덴마크인들을 기독교도로 개종시킨다. 따라서 오딘(Odin)을 주축으로 하는 덴마크의 민속신앙 파간(Pagan)이 사라질 위기에 놓이게 된다.
한편, 1016년 덴마크 출신 크누트(Knut: 995~1035) 왕은 잉글랜드 왕이 된다. 그는 덴마크의 하랄드 블라톤 왕(940~986)의 손자인데, 서기 1018년에 덴마크 왕을 겸하고, 1028년에는 노르웨이 왕으로 추대되어 세 나라의 왕을 겸하는 북해 제국(앵글로 스칸디나비아 제국)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크누트 대왕의 사후 스칸디나비아 제국은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가 분열과 갈등으로 점철되면서 혼란에 빠진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분열이 거듭되는 와중에 1157년 크누트 리바르의 둘째 아들 발데마르(Valdemar den Store) 1세(1131~1182)가 덴마크를 통일하고 발데마르 왕조를 일으킨다.
발데마르 왕은 신성로마 황제에게 복종을 맹세하고, 군사력을 증진하고 독일을 견제하면서 발트해에서 슬라브 세력과 전투를 벌인다. 그는 이때 셸란 섬에 성채를 구축하는데 이 성이 바로 오늘날의 코펜하겐(Copenhagen)의 기원이 된다. 그러나 발데마르의 사후 덴마크는 또다시 왕과 교회, 귀족 간의 투쟁이 심화되어 내란의 조짐까지 나타나게 된다.
발데마르 4세가 죽자 외손자인 올라프(Olaf) Ⅱ세(1376~1387 재위)가 1380년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를 합병(1814년까지 지속)하고, 이어서 발데마르 4세의 둘째 딸 마르그레테(Margrete) 1세(1387~1397 재위)가 등장하여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섭정한다.
1389년에는 스웨덴 왕을 겸함으로써 스칸디나비아 3국을 다스리게 된다. 마르그레테 1세는 1397년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3국 연합체인 칼마르 동맹(Kalmar Union: 1397~1523)을 결성하고 정식으로 북유럽 3국의 제왕으로 등극하기에 이른다. 오늘날의 덴마크가 예전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은 욕구와 욕망이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1397년 시작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칼 마르 동맹은 스웨덴이 1523년 동맹을 탈퇴할 때까지 연합국 체제를 유지한다. 그리고 스웨덴이 칼마르 동맹을 벗어나자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그 후 칼마르 동맹이 아니라 덴마크 왕국의 주도로 두나라가 절대왕정을 유지하며 한나라처럼 지낸다.
이런 관계 속에 덴마크 왕국은 노르웨이가 해외에 소유하고 있던 페로제도와 아이슬란드, 그리고 그린란드를 포함한 노르웨이 왕국의 모든 국가들과 부속도서들을 자신의 영토로 귀속시키고 지배하기 시작한다.
두나라의 연합체는 1814년까지 유지된다. 그러나 1814년 스웨덴과 노르웨이가 전쟁을 벌이게 되고 스웨덴이 승리를 하게 되자 노르웨이는 또다시 이번에는 스웨덴의 식민지로 부속되고 만다. 노르웨이의 얄궂은 운명은 여전히 속국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좌측: 칼마르 동맹을 맺을 당시의 스칸디나비아 제국 영토, 우측: 18세기 중반 덴마크-노르웨이 제국 영토
로스킬드 대성당은 코펜하겐에서 자동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다. 12~3세기 스칸디나비아 지방의 초기 고딕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대표적인 건축물인 이 성당은 15세기부터 덴마크 왕실의 묘지로 사용되어 교회 안에서 덴마크 역대 군주들을 만날 수 있다.
현관과 측면 쪽의 채플은 19세기 말 증축되어 로스킬드 대성당의 고딕 양식을 유럽 종교 건축에 보급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당시 덴마크의 국제적 위상이 그만큼 컸다는 의미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른다.
* 왼쪽: 대성당 입구는 2010년 참나무로 만든 문을 화려하게 장식한 청동문으로 교체했다. 그리고 '왕의 문'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왕족들만 드나드는 문임을 알린다. 일반인 출입은 우측 편 다른 문을 이용해야 한다.
* 덴마크는 11세기부터 가톨릭 국가였지만 1563년부터는 복음주의 루터교를 신봉하는 개신교 국가로 개종을 한다. 따라서 로스킬데 대성당은 건물의 규모와 처음 건축되었을 당시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할 뿐 현재는 루터교 교회로 사용 중이다. 또한 교회건물 내부에는 5개의 채플이 있는데 왕실 가족들은 서거 순서에 따라 차례로 각 채플에 매장된다.
로스킬데(Roskilde)라는 도시는 960년경 하랄 왕조를 일으킨 하랄드 블루투스(Harald Bluetooth) 왕이 덴마크의 새로운 수도로 지정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한다. 블루투스 왕은 왕권을 잡은 초기에 옐링(Jelling)에 거주하면서 교회를 만들고 옐링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지만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연합한 후에는 두나라의 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새로운 수도를 필요로 한다.
블루투스 왕이 로스킬데로 옮겨 옴으로써 기독교(가톨릭) 신도로서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하랄드 왕은 980년 기독교(가톨릭) 신을 위한 성당을 마련한다. 그 성당이 바로 지금의 로스킬데 대성당이다. 처음에 하랄드 블루투스는 목조건물로 성당을 짓는다. 이 목조 성당은 그 후 1030년과 1080년 두 번에 걸쳐 두 개의 돌기둥을 세워 개축을 한다.
또한 12세기 중반 롬바르디아 장인들이 덴마크에 벽돌 제조법을 보급하자 1170년 당시 로스킬레 대주교였던 압살론(Absalon)이 새로운 재료로 성당을 재건축하도록 결정한다. 재건축 사업은 장기간 계속되는데 1275년경에 일차 완공을 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100여 년이 지나서 완공된다.
일설에 의하면, 986년 경 블루투스 왕이 전장에서 사망하자 그의 시신을 로스킬데로 가져와 그가 지은 로스킬데 성당에 안치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성당 어디에서도 그의 무덤을 찾아볼 수 없다.(* 블루투스 왕의 무덤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확인되지 않고, 로스킬데 도시 어딘가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이후 로스킬데는 여전히 덴마크의 수도로 사용된다. 따라서 코펜하겐이 덴마크의 수도로 정해지기 전까지 로스킬데는 오랫동안 덴마크 왕국의 수도였기에 로스킬데는 수도로서의 위상과 위용을 지니고 있다. 로스킬데 대성당은 그런 의미에서 덴마크 수도로서, 그리고 왕족의 권위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상징적 역할을 하고 있다.
왕족들의 무덤이 이곳에 거의 대부분 모여있기 때문에 어찌 보면 덴마크는 죽은자들이 모여 산자를 다스리는 형국이다. 그중에서도 로스킬데 대성당은 바로 죽은 자들이 모일 수 있도록, 산자들이 경배를 드릴 수 있도록 제단을 마련해 놓은 곳일지도 모르겠다.
* 주위에 왕의 초상화와 메달이 부조되어 있고 석관의 모서리에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상징하는 2명의 여인들이 있다. 덴마크 조각가 요하네스 웨드웰렛이 조각했다 이 조각은 그의 주요 작품으로 길이 2.5m 높이 약 1.8m이다. 프레드릭 5세는 2번 결혼을 했는데 첫 번째 배우자는 잉글랜드 출신의 루이스(Louise)였다. 그녀는 1751년 출산 후 사망을 한다. 2번째 부인이 된 줄리안 메리도 이곳에 함께 매장되어 있다.
*왼쪽: 갑옷 입은 기사, 크리스토퍼(Christoffer) 왕의 석고상, 그는 1362년 지금의 스웨덴 헬싱보리에서 한자동맹과 벌인 전투에서 심하게 부상을 당하고 얼마 후 사망을 한다. 당시 그는 가장 유력한 덴마크 왕위 계승자였으나 1358년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한다. 부왕은 아들을 추모하기 위해 전체를 갑옷으로 장식한 무덤을 만들어 준다. 실제 그의 사체는 교회 바닥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 마리 공주의 할아버지는 프랑스 마지막 황제 루이 필립이다. 그녀는 1865년에 태어나 20살이 되던 해인 1885년에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Christian) 9세의 막내둥이 발데마르(Valdemar, 1858년 생) 왕자와 혼인을 한다. 그런데 마리 공주의 최후는 몹시 쓸쓸했다. 남편 발데마르 왕자와 세 아들이 극동지방으로 여행을 떠난 사이 1939년 74세를 일기로 혼자 죽음을 맞는다. 당시에는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리 공주가 로스킬데 성당에 묻힐 때 까지도 마리 공주의 가족들 그 누구도 그녀의 죽음을 알지 못했고, 심지어 그녀가 성당에 매장된 후 많은 시간이 지나서야 가족이 돌아와 그녀의 죽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로스킬데로 돌아온 발데마르 왕자 역시 얼마 안 되어 그녀의 곁으로 떠나간다. 발데마르 왕자 역시 로스킬데 성당 한편에 마리 공주와 함께 나란히 누워있다.
로스킬데 대성당에 마련된 박물관에는 로스킬데의 지난 역사에 대해 설명하는 패널들을 세워 놓았다. 그게 다다. 로스킬데 대성당이 보관할만한, 아니 보여줄 만한 물품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왕관이나 왕족들이 사용하던 물품들을 이곳에서는 볼 수가 없다. 그 많은 왕족들이 묻혀 있는데도 말이다. 그 이유는 이 성당에 아무것도 보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1020년부터 1536년 덴마크가 가톨릭에서 루터파 개신교로 개종을 할 때까지 로스킬데 성당은 가톨릭 성당이었다. 더구나 1600년 경 당시 이 성당은 덴마크에서 가장 부자교회로 소문이 났을 정도였고, 실제 많은 보물들을 소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개신교로의 종교개혁 과정을 거치면서 로스킬데 대성당 보물들은 하나씩 자취를 감추고 지금은 아무런 소장품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당 측이 보관하고 있던 중세 초기의 귀중품들은 종교개혁 시기인 16세기를 전후해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또한 남아있던 귀중품 대다수 역시 1806년 어처구니없이 경매시장에서 팔려나간다. 그나마 지금까지 남아있는 문화재로는 교회의 제단 배후를 장식을 하고 있는 삼단 벽화만 남아있을 뿐이다. 이 장식 벽은 1560년에 제작되었는데 네덜란드 종교 예술의 걸작품으로 꼽힌다. 여기에는 예수의 일생이 담겨 있는데 총 3부작으로 지금의 벨기에 안트베르펜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아있는 작품들 중 또 다른 가치 있는 작품으로 1420년에 만든 성당 성가대석의 여러 장식들도 눈여겨 볼만하다. 이 역시 귀중한 문화재인데 이것들은 독특한 회화를 연작으로 그려 넣어 제작한 것으로 작품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른 교회나 대성당들에 비해 로스킬데 대성당의 건축 미적 위용은 대단하지만 상대적으로 내부의 문화재는 거의 사라진 상태라서 그런지 썰렁한 묘지라는 느낌만 든다. 죽은 자들이 모여 무슨 회의라도 하는 건 아닌지 엿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만 으스스한 분위기를 벗어나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다.
압살론(Absalon), 또는 ‘악셀’(Axel)로 부르기도 하는 그는 1158년에서 1201년까지 43년간 당시 덴마크의 수도였던 로스킬데(Roskilde) 교구의 대주교로 지내며 덴마크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한 인물이다.
그는 발트해의 영토확장을 획책하고 로마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독자노선을 다져나간다. 그 결과 압살론은 코펜하겐이 지금의 덴마크 수도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를 코펜하겐의 아버지로 부르는 이유이다.
당시 압살론은 교회와 대중 간의 관계를 개혁하고 발전시키려는 덴마크 사회발전정책의 핵심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압살론 대주교는 덴마크를 위협하는 외부의 적들과 전투를 하며 국권을 수호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는데, 시내 한복판에 성인의 모습이 아니라 예전 바이킹 전사처럼 도끼를 들고 말 탄 동상을 세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 압살론 대주교의 동상, 말을 타고 마치 바이킹 전사처럼 도끼를 들고 있다. 코펜하겐 가장 번화가이자 왕실이 사용하던 크리스티안보르 궁전(지금은 국회와 대법원, 수상 집무실로 이용) 인근 호브로 광장에 그의 동상이 서있다.
* 코펜하겐의 아버지로 부르는 압살론 대주교의 동판이 시청사 건물 중앙 입구 위에 붙어있다. 시내 한복판에 바이킹 전사 같은 동상의 모습과 다르게 당시 덴마크의 수도 로스킬데 대주교의 성스런 모습으로 금칠을 해 장식을 했다.